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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과 상급 (마 20: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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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가진 가치관을 깨뜨리면서 제자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가져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그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20, 22). 젊은 재벌이라 여러 가지 유혹이 많았을 텐데, 도덕적으로도 탁월하고 타인의 모범이 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많은 소유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영생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이 사윗감으로 탐낼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어떤 공동체의 회원으로 가입하려고 한다면,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까다롭게 대하시고 실천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심으로 그를 쫓아버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선한 일을 묻는 그를 타박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 청년은 제시하신 계명들은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1)하셨습니다. 결국 청년은 주님의 엄청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슬퍼하며 떠났습니다. 어찌하든지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한 사람이라도 더 회원을 확보하려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비춰본다면 예수님의 태도는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청년이 돌아간 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 당시 유대인들은 ‘부’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자 청년은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시대의 재물관을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부’는 ‘축복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각한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

16절에서 부자 청년이 던진 질문과 25절에서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곧,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관심은 부자 청년에게도 있고, 가난한 제자에게도 있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물론 구원 받은 모습에 대한 개념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영원히 잘 먹고 잘 사는 삶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좀 더 고상하게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구원 받기를 갈망합니다.

역사적으로 구원받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부자 청년처럼 ‘무슨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곧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태도를 율법주의라 합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구원자는 필요치 않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결코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생각해서 찾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선행을 행하여 구원에 이른 모델로 여기고 본받기 위하여, 혹은 구원받으려면 어떤 선행을 해야 하는지 비밀을 알고 있는 분으로 여겨 조언을 얻기 위해 찾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동일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

부자 청년이 알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청년은 선과 부로 영생을 얻을 수 없자, 어떤 비밀한 지식을 알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줬던 영지주의가 이처럼 ‘비밀한 영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선한 행위를 하거나, 비밀한 지식을 얻거나, 어떤 원리를 깨우쳐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자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 해도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둘째로, 청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 끝에 마침내 예수님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 생명을 얻는 길을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체를 얻기보다, 예수님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했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람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선으로도 부로도 안되자 어떤 비밀한 지식과 정보를 통해 영생을 추구하고자 그 방법만 바꾸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자꾸 얻고 가짐으로서 영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할수록 생이 풍성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영생을 얻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자신의 많은 소유로 인해서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생을 얻느니보다는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차라리 지금의 삶이 좋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과 함께 살기보다는 돈과 함께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지만, 그렇다고 이 땅의 풍요롭고 안정된 삶까지 포기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는 가치관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 앞에서 쓸쓸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 구원을 받는 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혹은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또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부자 청년을 통해 깊이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들의 힘과 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영생이고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힘입어 무엇을 하려기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좀 더 생각해야 했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 주님 자체를 얻기 위해 힘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끝난 후에 이어진 베드로의 질문은 그의 가치관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을 통해서 얻을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버렸다’는 그 행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자기가 행한 것의 대가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8-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태도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헌신은 칭찬할 만한 것임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헌신에 대해서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훨씬 많은 부모나 자식을 얻으려고 지금 있는 부모와 자식을 버릴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배의 부모와 자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가족관계에서 얻어지는 화목함과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배의 집과 토지도 많은 부동산의 소요보다는 진정한 충만감이나 넉넉함과 관계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헌신한 만큼 보상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결과로 생긴 결핍과 공백을 충분히 메우고도 넘칠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훨씬 차고 넘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영생도 은혜이고 상급도 은혜입니다.

베드로의 헌신에 대해 인정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에 이 세상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가 있음을 최종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버리고 먼저 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포기하고, 오래 포기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첫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장의 포도원 일꾼들과 관련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대가’로 계산되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계산되는 나라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구원과 상급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속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제자의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을 먼저 알고 먼저 따랐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재물을 헌신했다 할지라도 그 재물을 얻을 능과 힘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셨고,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을 주신분도 하나님입니다. 그 은혜를 알 때, 우리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의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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