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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10) (삼상 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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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10)
삼상 24: 1- 7.

저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나이도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녀를 볼 만큼 먹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젊잖아 보입니다. 그리고 보통 때는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법 목사답고 할아버지답습니다.

그러나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운전하다가 가끔 싸웁니다. 제가 주로 싸우는 대상은 택시 기사와 버스 기사 그리고 트럭 기사들입니다. 저들 기사들 중에는 시비가 붙으면 대번 상소리부터 해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기가 죽어서 피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반대입니다. 나이도 많이 않는 젊은 기사에게 상소리를 들으면 거의 제 정신을 잃습니다. 앞뒤를 잘 못 가립니다. 차를 세우고 대번 좇아가 저들의 멱살을 잡습니다.

잡은 후에는 늘 아차 후회합니다만, 화가 나면 그 생각을 못하고 거의 늘 상대방의 멱살부터 잡고 봅니다. 그래도 다행히 대부분 거기서 제 정신이 듭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그래도 주먹다짐까지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싸움이 거기서 끝나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제 정신이 들어 멱살까지만 잡고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는 걸 억지로 참습니다. 목사만 아니라면, 나중에 그것이 들통만 나지 않을 것 같으면 솔직히 내가 맞는 한이 있어도 몇 대라고 쥐어박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분이 풀리고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 짓을 하지 못하고 살아 가슴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 같은 것이 늘 제게는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그와 같은 응어리들이 없으십니까? 사람들에게는 거의 누구에게나 다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와 억울함을 준 대상들이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원수 같은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자신을 억울 하게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한번 시원하게 응징하고 복수하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있다고 하여도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답답함이 우리들에게는 대개 있습니다.

복수하고 싶은데, 근사하게 원수를 갚고 싶은데, 기회가 없고,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근사하게 복수할 기회와 힘이 있는 대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고 복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답답해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정말 근사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처 들어 왔습니다. 당시 블레셋의 장군이 그 유명한 골리앗 장군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나서지 못하고 숨어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물맷돌을 들고 나아가 골리앗을 죽입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말은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네게 나간다.>

그와 같은 근사한 승리로 말미암아 다윗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집니다. 공공연하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이 노래처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시기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온 사방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겠습니까?

아무 죄 없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큰 상을 받아도 시원치 않는 마당에 그 때문에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왜 그에게 분이 없고 화가 없었겠습니까?

다윗이 엔게디라고 하는 황무지 곧 사막에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의 일행 그 사막에 있는 한 굴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기까지 자기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겠다고 쫓아 왔습니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다윗이 숨어 있는 굴로 들어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윗에게 아주 유리한 상황입니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들어왔기 때문에 혼자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굴속에 금방 들어오면 굴속에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굴 안에 있는 사람은 굴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하는데, 다윗은 사울을 봅니다. 그리고 사울은 혼자인데 다윗은 부하들과 함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원수를 갚고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정말 누가 봐도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기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불의한 사울에게 복수하라고 주신 기회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 이니이다.>

다윗의 신하들의 생각과 말은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우리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이를 내가 함부로 손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이건 정말 도통한 사람의 말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여 멱살잡고 싸우려고 드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삶입니다.

다윗이 훗날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내려 갈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길가에서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하며 저주합니다.

아비새라고 하는 다윗의 신하가 시므이를 당장 처 죽이려고 할 때 다윗의 말이 너무 근사하고 훌륭합니다. 저가 나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를 저주하라 하심이라면 아비새를 막습니다. (삼하 16장)

사울에게도 복수하지 않고, 시므이에게도 복수하지 않는 이유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손대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에게도 손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수를 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을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지만 그 말씀은 복수의 법이 아니라 책임의 법입니다. 그 말씀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해자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 만큼 핑계하지 말고 정직하게 갚아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을 악하여 그 말씀을 책임의 법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에도 사람들이 친히 가인에게 복수하고 심판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시며 누구도 가인에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가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친히 하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에도 보면 아무리 원수가 있다고 하여도 원수 갚은 일을 직접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씀하십니다. (롬 12:17)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롬 12:20) 그렇게 하는 것은 원수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 25:22) 우리가 그렇게 하면 원수가 얼마나 얼굴이 뜨거워 질 것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2:21)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은 쉽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말씀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습니다. 사울이 굴에 들어 왔을 때 가만히 칼로 그의 목을 베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베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옷을 벤 것을 가지고 다윗이 마음에 찔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머리 털 하나는 물론이고 옷자락도 손대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자신을 억울하게 하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복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락교회에 있을 때 장로님 한분과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이었는데 그 상처가 너무 커서 설교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매주일 고등부에서 설교를 하던 때였는데 그 장로님과의 다툼 때문에 받은 상처로 인해 설교를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주일 새벽 4시까지도 분 때문에 설교가 준비되지 않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잠도 오지 않는데 그냥 눈만 감고 침대에 누어 있었는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하는 찬송가 423장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찬송이었습니다. 나름대로의 간증이 있는 찬송이었습니다. 조용히 그 찬송을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찬송 중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라는 단순한 가사에 은혜가 되었습니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라는 가사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라는 가사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생각으로만 그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은혜가 차고 넘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수영 할 큼 물이 찼다는 말씀이 있는데 꼭 그 기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고 머리 꼭대기까지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은혜가 찰수록 미움과 분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릎에 찰 때쯤 그 장로님이 그냥 용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은혜가 허리에 찰 때 쯤 그 장로님이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장로님도 교회를 위하여 그러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들었습니다. 은혜가 머리 꼭대기에 찼을 때 그냥 그 장로님이 사랑스러워졌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 하자 마음의 분과 미움이 사라졌습니다. 거의 단번에 설교가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서 그 장로님을 만나 저도 모르게 꽉 껴 안았습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그런 일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그러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습니다. 장로님이 놀라셨지만 저의 진심을 대번에 아셨습니다. 장로님도 저를 꽉 안아 주셨습니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경험 중에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 장로님은 제게 원수 같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날만큼은 그랬습니다. 그 날 만큼은 정말 원수 같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넘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니분과 미움이 정말 눈 녹듯이 녹았습니다. 저는 그날 이와 같은 은혜가 있다면 정말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 용서가 얼마나 훌륭한 것이며 근사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동안교회에서도 장로님 한 분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마음으로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그를 향한 미움과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단 뒤에 걸려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제가 미워하던 그 장로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가 좋아하지 않고 솔직히 미워하는 그 장로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제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저를 보았더니 거기에는 죄인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나님 앞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나는 좀 낫고 그는 좀 못한 것처럼 보였는데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와 그를 비교해 보니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의 그런 면 때문에 내가 그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하나님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나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모든 사람을 십자가를 통하여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봅니다. 힘든 사람은 있는데 원수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억울하게 자기를 괴롭히는 사울을 저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졌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세상에 싫은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운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은 원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억울함을 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십니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윗이 굴속에서 사울을 만난 것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와 같은 기회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복수의 기회인 줄 알고 단 칼에 치고 싶은 사람이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윗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용서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용서뿐만 아니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심판은 공의로우셔서 절대로 사람을 억울하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으면 복수의 마음이 없어집니다.

상처를 붙잡고 살지 않고, 은혜를 붙잡고 살면,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보면 원수가 없어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 수준에 이르면 정말 우린 근사한 사람입니다. 사울까지도 용서하는 다윗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며 사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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