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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슬픈 노래 (삼하 1:17-27, 롬 13:8-14, 마 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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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번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보러 나간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충동에 쉽게 부화뢰동하는 줏대 없는 사람이냐?”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례 요한을 만났다고 해도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앞에 자기 과시나 하기 위함”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세례 요한이 아니라 헤롯이나 빌라도를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했더냐?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목적을 가지고 나간 사람이라면 말로 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신앙의 목적과 본질을 다시 살펴보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통해 얻는 유익은 금생과 내생에 걸쳐서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서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너희는 어떻게 보느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두고 보는 시각이 어떠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중심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여러분 각자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 되셨습니까? 20대, 30대, 40대, 50대, 또는 60-70대 또는 80대나 그 이상이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만두고 60이나 70대 이상 되신 분들은 이미 살아오신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상당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그가 99살이 되었을 때 천사가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미 고목나무 같이 되어버린 이 나이에 아들은 무슨 아들입니까?”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겨자씨 같은 믿음을 찾으셨습니다. 그 믿음을 토대로 100세난 아브라함에게 아들 날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서 불가능을 보았고, 하나님은 그에게서 가능을 보았습니다. 가능을 보신 하나님이 불가능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을 이기셨기 때문에 큰 기적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처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베드로는 그 지역에서 결코 존경 받는 인물이 못되었습니다. 그 어부가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대뜸 말씀하시기를 “너를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시몬에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부요 그것도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불학무식한 베드로에게서 아무런 가능성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엄청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 이름을 “게바”라고 고쳐주셨습니다. 말하자면 “너는 마침내 게바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자기 암시였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몬은 게바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오늘 가톨릭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보신 그 겨자 씨 같은 가능성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는 어린 자녀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린 자녀들이 뭐 그리 의젓하겠습니까? 애들이란 원래 놀기 좋아하고 엉뚱한 장난을 잘도 저지르지 않습니까? 그럴 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부정적인 말로 애들을 혼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그 아이의 장래를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여러분의 자녀들에게서 가능성을 보시고, 소망의 싹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과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자녀들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을 보면 사울의 전사소식을 들은 사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패전과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보는 다윗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 먼저 마침내 원수 사울이 죽었다고 기뻐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울 때문에 도망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환호작약하며 “만세!”라도 부를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사망소식에도 불구하고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만세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2) 이제는 다윗이 자기 세상이 되었노라고 판단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사무엘이 오래전에 자기에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속히 서둘러 자기 사람들을 모으고 권력을 잡고 이 혼란한 정국을 장악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다윗은 이 정국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다윗이 이 비상시국에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1) 17절에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취한 반응은 슬픔이었습니다. 다윗은 전혀 자기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당한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그럴 줄 알았다”느니 “이러이러해서 그렇게 되었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부정적인 안목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심지어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는 일뿐입니다.

(2) “슬픈 노래”를 짓고 명하기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기는커녕 슬픈 노래를 지었습니다. 장차 왕이 될 사람,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다윗의 이런 모습이 앞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어가려는 그들에게 얼마나 크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우리는 어쨌거나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을 강하게 일깨워주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마땅히 다윗의 적대세력이었어야 할 북쪽 사람들이 오히려 솔선해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사랑의 승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 어려운 통일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은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과 함께 예수님의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문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 이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이요,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처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3. 그러면 다윗은 그 슬픈 노래에서 무엇을 말했습니까?

(1) 20절에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고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이스라엘의 패망의 소식을 원수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원수가 기뻐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이 일이, 이 말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좋은 일인 것 같고, 내게 유익이 될 것 같은 일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라도 내 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3가지 관문을 거치라고 했습니다. “첫째, 사실인가?” “둘째 유익한가?” “셋째 지금 꼭 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교회나 교역자 또는 직분자들의 이야기를 아무데서나 마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다면 우리 교회를 나쁘게 평가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좋게 보고 좋은 것을 말하고 좋게 말하는 습관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보혈로 씻음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 사울과 요나단에 대하여 과오나 허물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의 좋은 점만 말했습니다. 그들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록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자랑꺼리란 뜻입니다. 그리고 용사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울에게서 우리는 대장부다운 기개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일컬어서 남자 중의 남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비록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평한다든지 나쁘게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말로 네가 정죄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타 교회 교인들이 밖에 나와서 자기 교회 교역자나 중직자들을 악평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이 여러분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고 추궁하십니다. 사울을 좋게 말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통하여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3) 24절에 “이스라엘아 슬피 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슬픈 노래를 지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런 불행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실패를 거울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물론 사울의 실패는 이스라엘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요나단의 우정, 아버지에 대한 효성, 국가에 대한 충성은 그야말로 모든 국민들의 모범이요 본받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일회적으로 끝나지만 그 영향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받지 못하게 되면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거듭거듭 실패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를 통하여 전혀 교훈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두 사람이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서는 그 선을 본받게 되기 때문에 스승이요, 악한 사람은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에 역시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보혈로 씻음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고, 여러분의 눈이 하나님의 눈과 같이 바르게 보며 주의 뜻을 따라 살 때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승리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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