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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의 심령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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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둘째,“내 나이 몇 살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심각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세상에 왔던 세례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신의 심정을 밝힌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세례 요한만큼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1:11에“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늙은 부모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삼십 세가 되도록 일반 청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선지자로서 대중 앞에 두각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1:80). 그는 포도주를 평생 입에 대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삼십대 초반에 벌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목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 인기도 잠깐이었습니다. 일 년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초라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비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헤롯의 부도덕함을 직설적으로 책망하다가 투옥되었고, 얼마 후 간교한 헤로디아에 의해 목이 베인 후, 그 머리가 쟁반에 담겨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마가복음 6:17-29). 이와 같은 그의 비극적인 생을 놓고 예수님께서 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는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심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을 때 세례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부근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마태복음 3:5-6).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고, 갈릴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그의 외침에 양심이 찔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수다한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우뚝 섰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눈에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별 구별이 없어 보였습니다. 두 사역이 거의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도 물로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2).

세례 요한에게만 몰렸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유사해 보이는 사역 때문에 두 인물을 놓고 비교하게 되었고 결국은 어느 한편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진짜 메시아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고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게 된 반면 세례 요한의 주변에는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보면“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돠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세례 요한의 제자와 유대인 사이에 손 씻는 의식 때문에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논쟁을 하는 중에 그 제자의 마음이 몹시 상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다투던 유대인이“너희 선생보다 예수가 훨씬 더 인기가 있다. 봐라.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한 제자들이 돌아와서 세례 요한에게 말한 내용이 본문 26절에“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에게만 몰려가는 것을 보고,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상당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선생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크면 클수록 예수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선생이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고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동시에 혜성처럼 나타나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님께 대해서는 은근히 질투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지도자의 입장서는 중대한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월등히 탁월한 사람이 나타나므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면 피해 의식 때문에 파괴적인 경쟁을 일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허탈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야 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이 바로 이런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제자들이 경쟁자를 질투하는 것을 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럴 때  지도자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됨됨이를 재어볼 수 있는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보인 세례요한의 처신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태복음 11:11)라는 예수님의 평가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一. 세례요한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본문 27절에“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랍비여 전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요한복음 3:26)라고 했을 때에 답한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선생님 선생님이 증거하던 그 사람이 세례를 주니까 인기가 지금 그쪽으로 다 넘어 갑니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로 인기가 넘어가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지금 시기와 질투심에 속이 상해하는 말입니다. 아직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 신지를 알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났을까요? 비교의식에서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인기와 자기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의 인기를 비교해볼 때 자기들의 스승보다 예수님의 인기가 더 높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가 나보다 앞선 것 같으면 내 자신을 초라하게 느껴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시기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뒤떨어진 것 같을 땐 우월감에 사로잡혀 그를 무시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기심이 가득한 제자들의 말을 들은 세례 요한의 대답이“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본문 27절)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 자신의 사명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어서 말하기를“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본문 28절). 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가 평소에 제자들한테 분명히 밝힌 사실이 있었습니다.“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은 바로 작은 소리의 역할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중한 소명이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 분수를 넘는 일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12:3에 말씀하시기를“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셨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마음을 조금만 잘못 먹으면 자신을 메시아로 착각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를 향해 메시아가 아니냐고 떠보는 바리새인들도 더러 있었고, 그를 메시아라고 믿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위기감을 느낀 세례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만 주목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누가 어떤 말로 흔들어도 하나님이 서 있으라고 명령하신 그 자리에서 그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가 낮으냐 높으냐,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은 세례 요한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경력을 보아 예수님보다 앞섰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세가 되도록 먼지를 뒤집어쓰며 대패질을 하며 망치로 두드린 목수였지만, 그는 이십년이 넘도록 광야에서 거룩한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매력을 줄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분수 이상의 것을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질지라도, 자신의 모습이 작아 보인다 할지라도,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날지라도, 그는 섭섭해 하거나 원망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매우 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분수를 잘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소인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모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듯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나 역할도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누구든지 받은 것만큼 일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분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야 말로 지혜 중에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큰 옷을 입은 사람을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사절에 여러 번 낙제를 했다고 합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를 평하기를“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며“네가 남과 같아지려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남과 다르려고 한다면 크게 될 수 있다.”고 격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처럼 아인슈타인은 남과 다르게 된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을 닮으라고 해서는 안 되며, 형에게 동생을 닮으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형과 동생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질없이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즉 재능을 찾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부인이 티코차를 운전해 가다가 차가 밀려 서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당시 최고급차인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 부인이 크락선을 울리기기에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그 차 얼마 줬어요? 우리 딸 하나 사주려고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상한 티코 운전자가 들은 척도 않고 그냥 갔습니다. 조금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그 그랜저 운전자가 또 크락션을 울렸습니다. 창문을 열었더니 또 하는 말이 “그 차 얼마 줬어요? 우리 딸 하나 사주려고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분이 대답하기를 “벤츠를 샀더니 한대 끼워줬어요. 이제 됐어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각각 갑절을 남겼습니다. 받은 것과 남긴 것의 차이는 갑절이 넘습니다. 그런데 칭찬하신 말씀은 똑같습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일뿐입니다. 60억이 넘는 세계 인구 가운데 오직 나와 같은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독창적인 재능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二. 세례 요한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습니다.

본문 28절 말씀에“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가끔 중년 여성들 가운데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허무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심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다가, 아이들은 자라서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가고, 남편도 이제 사회적으로 자리가 잡혀서 자기 일에 분주한데, 텅 빈 집에 혼자 있노라면“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어렵게 공부를 했던가?”하는 목적 상실증으로 번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마지막 잎 새”의 작가“오 헨리”의 말처럼 길가의 조약돌도 필요 없이 딩구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겠습니까? 자기의 사명을 분명히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때 삶의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 명의 선수들이 함께 뛰는 운동경기를 보면 각자의 선수들이 서 있는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를 지키면서 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자기의 위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의 할 일을 다 할 때 여기에 보람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영화나 연속극을 보면 주연도 있고 조연도 있습니다. 주연만 있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조연이 그 작품을 빛나게 합니다. 주연만이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연 역을 잘하는 사람이 주연보다 못지않게 인기를 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묵묵히 하나님을 섬겨 나가야 하겠습니다.

三.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본문 29절에“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신부이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이십니다. 세례 요한 자신의 사명은 신랑의 친구로 보았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신랑의 친구는 혼인식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도 마련하고, 초청장도 보내고, 모든 결혼식을 주재했습니다. 낮에 찾아오는 하객들을 신랑 친구가 맞아 대접을 했습니다. 또한 신랑의 친구는 신부의 방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엉뚱한 사람이 신부 방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신랑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반갑게 맞이하는 것도 신랑 친구입니다. 친구는 신랑을 안내하여 신부가 있는 방까지 가서 방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만나게 될 때, 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곳을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유대인의 결혼 풍습에 비유하여, 자신은 예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한 후 그의 사명이 완성됨을 알고 그는 사라져갔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가 신랑을 보고 기뻐하는 것같이 신랑에 비유된 예수님은 우리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0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멸망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신 분이시기에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염려와 근심의 짐을 대신 지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평안이며 기쁨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4:4) 하셨으며“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 하셨습니다.

옛날 영국 황제 루이스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국내를 순시하는 도중에 어떤 동리 한 모퉁이에 있는 물방앗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물방앗간에서 기뻐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데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황제는 노래 소리에 도취되어 듣다가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 보니 물레방앗간 노인이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그 물레방앗간 노인에게 다시 노래를 청했습니다. 그 노인은 노래하기를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하고 불렀습니다. 황제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둘째 절은 이렇게 부르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해.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신 곳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래전 청년들이 즐겨 부르던 복음성가 가운데“너는 왜 항상 웃니? 아무것도 없는 대도...”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곳에는 세상 것을 초월한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 굳게 잠긴 옥문이 열리며 수갑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쁨은 곧 행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랑이 신부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기뻐하는 친구의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세례 요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2의 말씀에“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도를 합니다. 전도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가리켜“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중매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의 중매로 인해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서 살아가던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기쁨이 있습니다. 중매한 보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중매에 비유하여 복음증거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 기쁨, 즉 새 생명을 얻은 기쁨입니다. 한 영혼이 돌아와 하나님을 만날 때의 기쁨에 대해 누가복음 15:7에 기록하기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영혼 구원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四. 주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할 자로 알았습니다.

본문 30절에“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귀한 말입니다.“흥한다.”는 말은“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쇠하여야 한다.”는 것은“감소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그는 더 증가하여 커져야 하겠고 나는 더 감소하여 작아져야 한다.”라고 바꾸어 보면 그 뜻을 더 분명히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마디에서 세례 요한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의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영원히 경배 받으실 하 나님으로서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자기가 작아져야 한다면 얼마든지 작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희생해야 될 것이 있으면 희생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세례 요한은 마지막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선교사인 윌리암 캐리는 인도의 선교사로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견디며 인도의 백성들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여러분 내가 죽거든 윌리암 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윌리암 캐리라는 말 대선에 월리암 캐리의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로교의 창설자인 요한 칼빈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나를 위해서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석마저 없게 한 칼빈의 무덤은 지금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모두다 세례 요한의 마음처럼 “그는 홍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두 부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도 받고, 소원 성취도 해서 편하게 사는 것이 신양 생활의 목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요한처럼 예수를 위하여 자기가 쇠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인가요? 작은 자인가요? 자기 집을 계속 늘리기 위해서는 수천, 수억 원도 아깝지 않게 투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는 단돈 십만 원 내놓기도 아까워한다면 그는 소인입니다. 자기의 건강과 여가 활용을 위해서는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고 쓰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만 원짜리를 천 원짜리 지폐로 바꿔서 헌금해야 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쇠하기를 바라는 소인입니다. 썩어 없어질 몸을 묻을 묘지를 위해서는 수천, 수억을 들여서 준비하면서 영원히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보좌를 빛내기 위해서는 헌금할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예수님보다 자신이 흥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한동대학교 후원의 밤에 어느 분이 이러한 간증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오십대의 나이로 암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사남매에게 이십 억원의 현찰을 유산으로 남겼답니다. 장례를 치르고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면서 이 유산을 어떻게 쓰는 것이 아버지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의논했다고 합니다. 결국 기독교 대학으로 새 출발을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동대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그는 홍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 요한의 심정을 가진 아름다운 자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마태복음 11:11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이 세상에서는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에는 그보다 더 큰 자들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곳에는 세상에 있으면서 주님을 높이기 위해 자기는 최대한 낮아지고 하나님 나라가 홍하기 위해 자기는 철저히 쇠하여진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들의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황홀해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금방 말라서 바람에 날리는 들꽃과 같고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 역전되어 엄청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는 철저히 쇠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심히 작아 보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왜 세상에 왔는지를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할 자로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깨끗한 세례 요한의 삶, 이처럼 맑은 세례 요한의 심정을 본받으므로 하나님 앞에 큰 자로 서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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