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기도문강해 : 이렇게 기도하라(2) (마 6:9~13)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하늘에 계신

지난주 설교를 통해 주기도문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이 주기도문을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왜 가르쳐 주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첫 부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문을 살펴봅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했을까가 중요합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요? 물론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하늘'은 절대 공간적인 하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하나님은 저 하늘 위 우주 어딘가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저 명왕성 천왕성 어디쯤엔가 계시다가 우리의 기도를 듣고 필요하면 잠시 지구로 내려오는 그런 우주인과 같은 존재일까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이 공간적인 저 하늘,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한 것일까요? 여기서 하늘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초월적인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땅에 살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에 연연하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늘만 아니라 그 어디든 계시며, 무엇이든지 아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크고 위대한 분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늘'은 아주 큰 것을 뜻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 중에 하늘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가장 크고 위대한 것을 표현할 때 하늘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위대하심을, 그 끝없는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오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갈수록 많은 것을 넓게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것에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높은 하늘에 계시면 오히려 너무 멀어서 잘 못 보고, 잘 못 들으실 것 같지만 이것은 공간이나 거리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어느 복음성가 가사처럼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늘 바라보시고, 인자한 귀로서 우리에게 귀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은 하늘 위로 올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위에서,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은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늘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줄 믿고(빌 3:20) 늘 하늘을 바라보며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 드리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제물을 태우는 향기로운 연기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늘로부터 오시는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두 번째로,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여러분도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들어보면 불을 끄고 개인기도 할 때 여기저기서 '아버지'(기도용어로는 '아바지')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이렇게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놀라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아바'(Abba)란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아람어로 '아버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라는 표현입니다. 같은 뜻인데도 '아버님'과 '아버지'가 다르고 더더구나 '아빠'는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제 부친을 '아빠'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늘 '아버님' 하고 불렀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목사님이 어려서부터 참 예의 바른 어린이었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예의바른 어린이어서 '아버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제 아버님은 좀 엄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아버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 중에도 평생 단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못 해본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아이들 중에 '아버님' 하고 부르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제 두 아들만 해도 저를 늘 '아빠' 하고 부르지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요즘 애들 점점 버릇이 나빠져서 그럴까요? 하지만 저는 이 말이 싫지가 않습니다. 제 아이들이 저를 '아버님'이라고 안 부르고 '아빠' 하고 부르는 것이 조금도 싫지 않을 뿐 아니라 참 좋습니다. 그만큼 제 두 아들이 저를 두려워하거나 멀게 느끼지 않고 정겹게 친밀하게 느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바' 즉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늘 곁에 계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빠'라고 부른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자신의 아빠인 하나님을 우리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지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더더구나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되어있고, 감히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릴 수도 없어서 제사장이 대신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는 너무나 먼 우리를,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의 괴수인 우리를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을 부를 때 '내 아버지'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도 아닌 바로 '우리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주기도문을 외울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음껏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우리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특권인지 깨닫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짜릿한 감동과 전율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홀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그만 비뚤어진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이 '아비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놀리면 견디지 못하고 때려주곤 하다가 그렇게 비뚤어진 길로 간 것입니다. 한참을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 말씀이 교회 다니고 뭐가 제일 좋았느냐?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제일 좋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제일 불러보고 싶었던 말이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친구들 아버지가 가난하든, 직업이 천하든 상관없이 그저 친구들이 누군가를 '아버지!' 하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움과 부러움이 너무 사무친 나머지 비뚤어진 길로 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교회 나와 보니 하나님을 마음껏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 같은 천한 사람은 감히 쳐다 볼 수도 없는 그 거룩하고 높으신 분을 내가 마음껏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니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21에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며 종이라고 삼아달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감히 아버지, 아빠는커녕 종이라고 감당치 못할 죄인이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자녀까지 삼아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을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빠의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제가 아들들이 저를 '아빠' 하고 부를 때마다 기분이 좋은 것처럼 하나님도 자녀 된 우리가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면서 '아빠'하고 부를 때마다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우리 아빠' 하고 부르면 너무도 좋아서 '아빠'라고 부르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마태복음 7:11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아빠'라고 부르며 간구하는 모든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 최고(Best)의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아바(아빠)기도'의 원리입니다. 다 같이 따라합니다. '아빠기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이 내 아빠라는 뜻이며, 그 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을 저 멀리 계신 분으로 느끼지 말고, 저 높은 하늘 어딘가에 계신 나와 떨어진 분으로 생각하지 말고 바로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아빠로 느끼고 그 아빠께 간구함으로 모든 것을 응답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음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누구의 이름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크게 두 가지의 간구가 있습니다. 먼저 9~10절은 하나님을 위한 간구고, 11~13절은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위한 간구 중에 첫 번째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왜 하나님을 위한 첫 번째 간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거룩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히 여긴다고 거룩해지고, 반대로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아지는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왜 자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간구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만큼 우리가 그 거룩하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만큼 대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에스겔 36:23에 보면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본디 거룩하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그 이름을 더럽히고 그 거룩하심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그 더렵혀진 이름을 거룩하게 원상복구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답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행동하고, 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지켜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벧전 1:16)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인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자녀답게 살아야 아버지인 하나님의 거룩함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오늘도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성도가 너무도 많습니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인데 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수요예배 때 사사기강해를 하면서 아버지 기드온은 훌륭한 위인이지만 아들 아비멜렉은 실패한 인생이었던 것처럼 우리들 중에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아들이 너무 말썽부려 아버지를 괴롭고 힘들게 하면 어떤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아들 하나 없는 셈 치마."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아버지가 정말 아들을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남들 보기에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말은 너 내 아들 아니라고 해도 아들은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아무리 말썽 부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지 못해도 아들은 아들이고 딸은 딸입니다. 절대 이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이런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성이 더럽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서 어떤 일을 하던 늘 기억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내 행동이나 삶의 모습이 나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이하준이라는 이름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성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하나님의 거룩성을 해치거나 더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하심이 인정받게 하시고, 그 아버지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자녀 된 나 또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이 주기도문의 첫 문장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반드시 이 사실을 깨닫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3년 전 설교 시간에 했던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들려드립니다. 그 옛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대는 용맹하기로 이름난 부대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겁쟁이를 가장 싫어해서 전쟁터에서 싸움이 무서워 도망을 하는 병사가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잔인하게 사형에 처함으로 엄격한 군율을 유지했습니다. 어느 날 이 알렉산더 대왕 앞에 싸움터에서 도망하다가 잡힌 한 병사가 끌려왔습니다. 그 병사는 열댓 살이나 되었을까 너무도 앳된 나이인 데다가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너무나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이었습니다. 대왕의 주변에 있는 신하들은 그 소년을 본 대왕의 표정이 순간 엄격하게 굳어진 얼굴에서 온화한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망병에 대한 분노에 차있던 대왕의 얼굴이 그 소년의 앳된 모습을 보고 그만 분노가 사그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대왕은 아주 온화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 소년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예, 알렉산더입니다." 그 순간 온화했던 대왕의 표정은 순식간에 분노로 일그러졌습니다. 대왕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라고?" "예,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더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지금 네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알렉산더입니다." 그 순간 대왕은 왕좌에서 뛰어내려와 그 소년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뭐라고? 네 이름이 알렉산더라고? 이 못난 녀석아! 너는 그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당장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부끄러운 행실에 대해 죗값을 치르도록 해라!" 이 소년 병사가 누구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됨의 기쁨을 망각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이 병사처럼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