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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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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일 경찰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남편을 청부 살해한 혐의로 김 모씨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달아난 박 모씨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지난달 7일 오전 9시쯤 금천구 시흥동 자신의 집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허 모씨를 시켜 잠을 자던 남편을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자살로 위장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김씨는 이에 앞서 범행 전날인 지난달 6일에도 자신의 집에서 소주에 수면제 60알을 섞어 먹여 남편을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5년 전부터 캬바레 등을 출입하며 생활이 어려워지자 남편 이름으로 모두 2억 4천만원 상당의 종신보험에 든 뒤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편 같은 날 대법원은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와 세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장 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장씨는 지난해 8월 대전시 자신의 집에서 아내 김 모씨와 두 아들에게 독극물을 탄 물을 마시게 해 살해한 뒤 물을 마시지 않은 막내아들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습니다. 장씨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휴대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고, 퇴근 후에는 사체와 집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른 혐의도 드러났습니다.

  어느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전 국민의 사분의 일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악해질 수 있습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인 교회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경건을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경건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경건이란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그 믿음대로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진정한 의미의 경건은 그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삶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경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삶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경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경건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당시 지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켜 가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통해서 경건을 회복하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의미의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 말씀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사도는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경건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를 더디 하면 경건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듣기를 싫어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말하기만 좋아합니다. 또한 몹시 조급합니다. 그리고 쉽게 화를 냅니다. 걸핏하면 분노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경건을 상실한 사람들의 자화상이라는 말입니다.

  경건이 없으면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신비하게도 거기서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살기는 잘 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말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소리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화를 내기 쉽습니다. 그러면 더 듣지 않게 됩니다.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따라서 경건을 말할 때 침묵은 기본입니다. 침묵하는 까닭은 듣기 위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침묵해야 합니다. 참된 말, 창조적인 말 그리고 생명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하는 말이 용기를 주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올바른 언어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거짓 경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언어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경건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는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모든 더러운 것과 악을 내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을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며 성내지 않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악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밭을 먼저 잘 갈아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좋은 씨앗을 길가나 돌밭에 뿌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거두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돌을 제거하고 잡초를 제거하고 흙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런 다음에 씨앗을 뿌립니다.

  거듭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듣는다고 해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또 관심이 없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다 내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더러운 것과 추한 것이 있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옛날 다윗도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과 불순종과 더러운 죄를 낱낱이 고하고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사도는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도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는 잘 하는데 행동이 안 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사도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길을 두고 나쁜 길로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말씀은 길입니다. 길은 가야 합니다. 길은 구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듣고 행하여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러시아에서 3명이 참석했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느냐?”하는 안건을 가지고 사흘 동안 토의를 하는데 러시아에서 온 3명은 전혀 아무 소리를 안 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에게 소감을 말하라고 하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흘 동안 이 회의를 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다 보면 오류가 없다는 것을 저절로 알 텐데 그런 것을 가지고 뭘 회의를 하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번역이 있는데,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성경 번역이 있다면 그것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는 세상의 온갖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삶이 일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건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훈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경건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나아가 경건은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도를 행하는 것에서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에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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