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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요 5: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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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행어사는 평소에는 자기 신분을 감추고 평민처럼 복장을 하고 다니다가 필요한 때에만 소위 '암행어사 출도'를 선언했는데 그럴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마패였습니다.
  원래 암행어사에게는 임금이 내려주는 봉서(封書)가 그 신분을 증명해주는 문서였지만, 역마(驛馬)를 빌려 쓸 수 있도록 의정부에서 지급해주는 마패가 더 실용적인 신분증 역할을 했습니다.
  평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할 한문으로 된 문서를 펼치는 것보다는 주로 세 마리의 말들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던 마패를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대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자기 신분을 어필(appeal)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그 마패를 관리들이나 백성들 앞에 제시를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특별히 임명받은 어사임이 분명해지고 그 신분에 따른 권한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행어사 출도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자기 선언'을 하신 분이셨습니다.
  바로 본문 앞의 17절 이하에서 보았던 대로, 당신은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또한 장차 다시 오실 심판주라고 밝히셨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스스로 주장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모든 사람에 대한 영생구원과 영벌저주의 전권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라고 하시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자 그대로 경천동지하지 않을 수 없는 출현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엄청난 신분을 선포하셨는데 과연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제시해주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과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귀하고도 특별한 신분에 대하여 친히 보여주시는 두 가지 증거, 주관적인 증거 하나와 객관적인 증거 하나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한 주관적인 증거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1절과 3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말씀 중에 '참되지 아니한' 것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절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법적 원칙과 법정에서의 관례를 뜻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도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 수는 없다."라고 못 박고 있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인이 되는 '자증'은 인간사회의 그 어떤 법정에서도 통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라고 하신 것인데, 문제는 이 '증거하시는 이'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신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는 이 증인이 바로 그 다음 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한 아주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증거, 누구 앞에서나 "참인 줄"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를 제시하려 하시는데, 그것을 세례요한이라는 한 사람의 증언에 의지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조금 뒤 34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더욱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증거하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성자의 자증이 아닌 만큼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유일하게 유력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같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성부 하나님의 증거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졌습니까?
  우선 36절에 보면 "36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 즉 예수님께서 제시하실 수 있는 최고의 증거, 곧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첫째가 바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하여 나타난 복음사역 그 자체가 바로 최고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면 정말 비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소위 '4대 성자'라고 불리는 다른 세 사람들과도 사실상 필적될 수 없는, 도무지 비교의 상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묘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예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행적 하나하나가 바로 기적보다 더 위대한 사건들로서, 그 자체가 예수님은 실로 '화육강생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도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증거, 그러면서도 이 성자의 화육강생과 직결되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이어지는 37절부터 39절에서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린 성부의 음성을 가리키신 것일 수도 있고, 또 나중에 변화산상에서의 소리도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성부의 증거는 바로 성경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까지는 아직 구약성경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사람은 "아무 때에도 그 음성" 즉 하나님의 육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 즉 하나님의 모양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말씀"인데, 그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셔서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하는 마음으로는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상고"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약 구석구석을 뒤져 읽으면서, 각 권마다 몇 절, 몇 개의 단어들, 그리고 몇 글자까지 있는지를 꼼꼼히 세어보았습니다.
  구약의 어떤 절에 히브리어 알파벳 전체가 다 들어있는지, 각 권의 제일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절이 무엇인지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읽던 성경의 주제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구약성경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기록목적이 '영생을 얻게 해주는 것'인 줄은 바로 파악하고서 열심히 그것을 상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생을 얻는 길이 자질구레한 율법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가운데 헛수고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경의 '숲'을 바로 볼 줄 아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성경 말씀이야말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에 관해서 내려주시는 최고의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자증'도 통하지 않지만 또한 사실 '직계가족의 증언'도 채택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도로공사 현장을 지나가다가 위반딱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이미 5시 이후였고 비록 공사차량은 있었지만 인부들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공사표지판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다들 퇴근한 줄로 여기고 평소의 속도로 지나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량 뒤에 모여 앉아 있던 인부들이 제 차가 공사현장을 지나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고 신고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제 집을 찾아온 경찰관에게 저는 분명히 공사표지판 등이 꺼져 있었고 제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제 아들도 곁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주었지만, 그 증언이 법정에 가서는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을 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냥 벌금을 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제 아들의 증언을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증언 자체는 어디까지나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직계가족의 증언이라고 해서 못 믿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사정이고 판사의 불신앙(?)일 뿐이지, 제 아들의 증언이야말로 제게 있어서는 가장 틀림없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성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외에 누가 더 잘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직계가족의 증언을 못 믿는 것은 바로 못 믿는 쪽의 불신앙 때문일 뿐이지, 아무리 친한 이웃이라 해도 자기 친아들보다 더 좋은 증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의 과학이, 인생의 체험이, 성자의 수도(修道)가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예수님을 잘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사실상 사람 편에서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증인도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자기의 결백이나 진실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면서'(As God is my witness), 자기의 양심선언을 증거해줄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는 분이시며 완전무결하게 진실하신 증인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할 때에는 왜 하나님은 안 되고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성부께서 성자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불충분하고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무슨 인격자나 지식인이나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법정에서 개나 고양이가 사람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없듯이 열등한 존재가 자기보다 우수한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을 뒷받침해주는 증인이 될 수는 결코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을 증거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친히 '증거하시는 성경' 이것만이 최고의 증거물일 따름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증거인 동시에, 수십 명의 선지와 사도의 증언, 즉 법이 요구하는 2명을 훨씬 초과하는 충분한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어진다는 사람은 일단 성경부터 제대로 정독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믿음 주옵소서'하고 기도만 드린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에 아주 간단하면서도 더 없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11장에도 꼭 같은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래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라는 가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날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알아요.'라는 뜻인데, 너무 길어서 음표에 맞출 수 없어서 그냥 '거룩하신 말일세'라고 줄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후렴에 가서는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라고 원가사의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단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나면 그 '완전한 인간'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대로'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증거하신' 참 증거이며 최고의 증거인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됨으로써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다시 오실 심판주로,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전도자들이 외치는 증언입니다.

  본문 33절부터 3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주고 계시는데, 말씀하시기를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고 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요한에게 찾아가서 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요한은 그 대답의 결론에서 자기에 대하여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했는데(요 1:19-28),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내가 곧 진리요"(요 14:6)라고, 또는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고 하셨으니,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등불은 일단 그 자체가 '켜져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비취는' 조명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로 세례요한 자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깨닫는 불이 켜졌으며 그 빛은 그의 증언을 통하여 절로 사람들에게 비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된 사람에게서는 절로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일만 공부를 하고 나와도 그 무언가 달라진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게 된 신자라면 불신자의 눈에 얼마나 뚜렷하게 돋보이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증거와 비교해볼 때에는 도저히 상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라 할지라도 그 점에 있어서는 오십보백보입니다.
  바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대로, 세례요한이 아무리 열심히 진리에 대하여 증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증거인 성경에 견줄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설명조차 필요없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세례요한의 증거는 사실상 그리 큰 실제적 효과도 발생시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을" 뿐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였습니다.
  대중들은 그 동안 바리새인들의 지긋지긋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지쳐 있었던 까닭에 세례요한의 설교를 일시적으로는 즐겨 들었지만, 그 요한의 전도의 핵심, 즉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메시아 되신다는 진리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증거한 '빛'은 그저 세례요한 자신의 제자들 몇 명만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굳이 언급하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의 증거가 필요 없다.'고 바로 앞에 말씀해 놓으셨으면서도 곧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례요한의 증거를 여기서 언급하는 까닭은 그것이 너희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주는 증언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또 한 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증거와는 결코 견줄 수 없는, 또 성자 예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도 않는, 게다가 사람들에게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도 못했던 세례요한의 증거를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그의 증거는 만약 사람들이 듣고 받아들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이었다.'라고 인정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요한의 증거는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에 예수님에 대하여 그렇게 증거한 사람은 세례요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대중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이나 얻어먹고 병이나 고침 받기를 바랬을 뿐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철도 들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그저 예수님이 미쳤다고만 여기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아무도 그를 영접해주기는커녕 인정조차 해주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세례요한이 왔던 것입니다.
  그 세례요한을 가리켜 요한복음 1장 7절에 "저는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존재 목적이 '예수 증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대속의 희생제물 어린 양이 되실 메시아'라고 증거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것은 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혼자서만 지르는 고독한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그 소리는 우리 예수님에게는 더욱 귀중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도 자기를 믿지 않을 때 자기를 믿어줄 뿐 아니라 남들 앞에서 증거까지 해주는 사람, 얼마나 반가운 사람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할 때,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정말 진실한 사람입니다."라고 용기 있게 외쳐주는 사람,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겠습니까?
  그것도 온 힘을 다하여, 끝내 목숨까지 바치면서 증거해준다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식자라 할지라도 신자가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외치는 증거는 최고의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 자신이 곧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득도나 논리 때문에 우리의 전도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도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이미 요지부동의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누가 전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는 다 '참된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도는 아무리 미련하게 보이고 어설프기까지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놀라운 증언입니다.
  사람이 입 밖에 내어놓을 수 있는 말 중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 대신에 천당 가게 만들어줄 수 있는 말은 전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혹 우리의 그런 증언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증인이 되어주는 그 자체만 가지고도 우리를 지극히 귀히 여겨주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죄인이 감히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법정에서도 신빙성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 자격과 사회적인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세금도 잘 내고 이웃사람들에게 평판도 좋고 무엇보다도 범법행위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증인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준이 낮고 신용도가 없으면 그 증언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증언 받는 쪽에서 먼저 거부할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같은, 수준에 있어서나 자격에 있어서나 미달 되어도 한참 미달인 우리들의 증언을 기쁘시게 받아주고 계십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받아주지도 않고 세상의 지식인들과 현대인들은 결코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먼저 '등불처럼 켜진' 이 예수님이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비취는 빛'이시라고 우리가 높이 들면,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저와 여러분만이야말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참된 증인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도 '천사 같이 말 못하고' 말을 더듬고, 그렇게 서투르게 전도하는 까닭에 '바울 같이' 많은 해산신자도 낳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로 하여금 먼저 믿게 해주신 '예수께서 구속함을 힘을 다해 전하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귀중한 소수라고 아껴주시고 별과 같이 최고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바로 믿게 된 신자라면 어찌 이런 귀한 사명을 위하여 불러주실 때 '힘이 없어 못한다고 핑계할 수' 있겠습니까?
  성자에 대하여 성부께서 성경을 통하여 친히 증거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죄인 중에도 괴수된 자'를 부르셔서 그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 세워주시는 이 과분한 소명 앞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즉시 순종하고 그 사명을 '항상 기뻐하며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증거를 본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처럼 증거를 먼저 본 사람은 증인이 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암행어사는 출도를 외치기 전에 먼저 역참(驛站)에서 자기의 마패를 보여주고 역졸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관가에 가게 되면 그 "암행어사 출도야!"하고 외치는 것은 암행어사가 아니라 바로 그 역졸들이었습니다.
  자기네들은 암행어사가 아닌 것은 물론이요 그저 최말단 공무원에 불과하면서도 기분은 그네들이 다 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분을 누가 말릴 수 있었겠습니까?
  암행어사의 마패를 먼저 보고 그 암행어사를 수행하면서 그 암행어사의 신분을 제일 먼저 외치게 되었는데, 그 신나는 선포를 누가 감히 막겠으며 그 있는 힘 다 내어서 지르는 소리를 설사 암행어사 본인이라 할지라도 "야, 그 소리 너무 크다. 좀 작게 해라."고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장차 오실 심판주이심을 먼저 알게 된 신자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 이 기분을 도대체 누가 말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동의 영원한 증거이며, 신자는 그 증거를 먼저 받고 현존하는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는 현실적인 증인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증거를 성경 말씀을 통하여 먼저 받은 '비취는 등불'이 되어서, 아직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악한 세대를 향하여 비록 외롭더라도 그 주님을 소리 높여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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