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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흩어짐으로 하나되는 세계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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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과 흩어짐의 변증법>
이런 구호가 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분열을 막고 단결을 강조하는 구호이지요.
어떤 공동체이든지 간에 단결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함께 모이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고 각기 흩어지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로 단결될 때 무엇을 위한 단결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작당'(作黨)이라는 말, 혹은 '패거리'라는 말도 있듯이 함께 모여서
남을 해치고자 음모를 꾸밀 때, 그런 단결은 참 위험한 것이 되고 말지요.

반면에 흩어지는 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로서
모든 인민이 하나의 틀 안에서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인간의 주체성이라든지 개성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옷을 입어도 인민복이라는 유니폼을 함께 입고 머리를 깎아도 스포츠 머리로 똑같이 깎습니다.
개개인의 다양성이 전혀 용납되지 않고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자꾸 모이는 것을 종용합니다.

우리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이 볼 때
이와 같이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사회는 숨이 막혀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체성과 개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흩어지는 것은 좋은 것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통념처럼 모여서 단결하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흩어져 분산되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여서 하나되는 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욕심과 교만에 가득 찬 사람들끼리
모여서 악한 일을 도모할 때 그 단결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흩어져 분산되는 것이 일면 개인주의를 조장한 것처럼 보여도
개개인의 주체성과 다양성을 긍정하는 쪽이라면 좋은 일이 됩니다.

<'흩어짐'의 시각에서 해석해보는 바벨탑 사건>
오늘 저는 하나됨과 흩어짐에 대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됨과 흩어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사실, 제가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설교가 창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였는데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가운데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뜻을 풀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벨탑 사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은 이런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이 모여서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한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 즉 바벨탑을 쌓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인간의 교만과 욕망에 쐐기를 박고자 그동안 써오던 하나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온 땅에 흩어져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벨탑' 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교만, 그 끝을 모르고 무한질주를 해온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동안 하나였던 언어가 다양한 언어로 나누어졌고
한 곳에 모여 살던 인류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게되었다는 것이지요.
"언어의 다양성, 인류의 흩어짐이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벨탑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사실 인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굵직굵직한 사건을
터뜨릴 때마다 우리는 '바벨탑' 운운했습니다.
아마 대표적인 경우가 생명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뽑아내어
유전자 복제를 시도하려했던 황우석 박사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황박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제 모든 난치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복제인간이 탄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면서 잔뜩 흥분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윤리적인 시각에서 이와 같은 시도 자체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눈초리를 보냈던 사람들은, 황우석 박사의 실패를
현대판 바벨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줄기 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에 새로운 길을
여는 것처럼 기대를 모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허황된 욕심과 끝을 모르는 인간적 자만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까지 넘보는 인본주의적 교만을
우리는 흔히 바벨탑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해석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심도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되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흩으심의 대응책>
본문 말씀의 문학적 구조를 살펴보면 인간과 하나님의 대결이라고
할 만큼 서로 대칭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시작되는 1절과 끝나는 9절이 서로 대칭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온 땅의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 처음 1절과 끄트머리 9절을 보면 본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셔서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한 곳에 함께 모여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다양한 말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1절과 9절 사이에 끼어 있는 말씀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3절과 4절은 인간의 결심이,
6절과 7절은 하나님의 결단이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먼저 3-4절 말씀을 볼까요?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자, 여기 보세요.
노아의 후손들은 건설 기술을 많이 발전시켰습니다.
원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에 역청을 쓸 만큼 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이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인간은 세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첫째로, 도시를 세우자는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셨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시를 상징적인 용어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설계와 건축 기술로 자신만의 아성을 쌓은 것을 도시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도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 되고
인간의 허영심과 교만이 지배하는 인본주의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그 도시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의 이름을 날리자는 결심을 합니다.
이 때까지는 아직 이 탑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고 그 안에 탑을 쌓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문제는 탑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게 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데 있습니다.
최신, 최고의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최고의 탑을 세워서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명심(功名心)과 허황된 교만, 이것이 문제이지요!

줄기 세포다, 복제 인간이다, 하는 생명공학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불치병, 난치병을 고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근본 문제는 영생불멸에 대한 유혹에 있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방법, 뭐 이런 방법에 몰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생명공학의 야심은 다시 기술적 부가가치, 시장규모, 기술 선진성,
등등의 상업적 대박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공학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복제기술과 우생학이 결합하여 머리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만 생산해낼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말대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유전적 완벽성이 아니라 결함"이 아닐까요?
인류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들 가운데 유전적 결함을 가진 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병환자였고, 니체는 우울증 환자,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이었고, 아인슈타인은 네 살 때까지 말을 잘 못하는 자폐증 아이였다고 합니다.
만일 우생학적 사회였다고 한다면 인류사의 천재들 가운데
절반쯤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넘봐서는 안될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까지 넘어서려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자칫하면 이와 같은 인간의 허영심과 교만이 인류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벨탑을 쌓는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넘보는 교만이지요.

셋째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도시를 만들어 도시 한 가운데 바벨탑을 쌓았던 것일까요?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고 이름을 날리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이 '흩어짐'(SCATTERING)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흩어짐이 두려워서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수 있는 탑을 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어 놓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보면 흩어짐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창 10: 32에 보면 온 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창 1: 28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해서 온 땅에 충만한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자, 그렇다면, 바벨탑을 만든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는 사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온 땅에 흩어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기보다
자기들끼리 모여 교만과 불순종과 불신앙 속에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시'와 '탑'은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어기고
자기들끼리 성을 쌓고 교만과 불순종 속에 살겠다는 인간적 불신앙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의미의 하나됨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된다면 다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겸손히
순종하며 살기 위해 그리해야지 교만과 허영심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단결한다면 그런 단결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히틀러가 나치 정권을 세웠을 때 일반 대중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 광기 어린 운동에 합세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종류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시지 않는 단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 교만과 불순종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흩으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함에 있어서는 열심히 모여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또한 흩어지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까지는 좋은데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허황된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으로 똘똘 뭉치는 하나됨, 그런 단결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독재자를 중심으로 해서 똘똘 뭉친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한 단결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듯이
오늘 우리가 단결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기 위한 하나됨이어야 하지
어떤 집단 이기주의와 음모와 공모를 위한 단결이 되어서 안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같이 헛된 교만과 불순종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6-7절 말씀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기 하나님의 대응을 보면 참 놀라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로, 이들이 이같이 하는 일을 앞으로 막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이렇게 거창한 도시를 만들어 하늘 꼭대기까지 닿게 하는 탑 쌓는 일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들은 장차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탄식하십니다. 

여러분, 아, 이것은 얼마나 정확한 예언인지요!
바벨탑에서 시작된 인간의 교만은 수 천년이 흐르는 가운데
가지가지의 과학기술과 최신식 무기를 만들어왔습니다. 
오늘날 핵무기를 만들어 지구 전체를 쑥대밭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제인간을 만들 수준의 생명공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으로
그 스스로 주인이 되는 도시를 만든 인간이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을
못하리라는 법이 없다는 예언의 말씀은 이미 역사를 통해 입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 흥미로운 말씀은 이와 같은 인간의 무소불위,
전능성에 대한 착각이 도대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같은 말을 쓰면서 한 족속이 되어 흩어지지 않고 함께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들끼리 한 말을 쓰며 찰떡같이 뭉쳐 하나님은 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작당을 해서 스스로 주인이 되는 도시를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입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헛된 욕망과 교만과 불순종으로 스스로 인본주의적인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불신앙의 사람들은 장차 바벨탑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 이제 둘째로, 이와 같은 인간의 무모하고 교만한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은
사람들을 흩어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욕망의 언어요 교만의 언어요 불신앙의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리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언어가 아니라
작당해서 하나님보다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예 이들이 쓰는 언어를 복잡하게 만드셔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벌을 내리셨던 것이지요.

말이라는 것이 의사소통의 기본 수단이요 말에서부터 모든 인간의 활동이 나오기 때문에 만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 없는 도시를 만들고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교만의 죄를 되풀이한다면 인류의 죄악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영어가 세계적인 공용어로 자리 잡아서 인류가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온 인류가 영어라는 국제어를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떠나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웃을 해치려는 죄로 인해
이와 같은 공용어를 쓴다면 인류의 파멸은 점점 더 가깝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류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더욱 더 크고 무서운
교만의 죄를 짓지 못하도록 아예 언어를 흩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인류의 언어가 각기 다르고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것은
이와 같이 더욱 더 크고 가증스러운 죄악을 차단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령의 언어로 흩어져 하나되는 공동체'를 향하여>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욕심과 교만과 불신앙으로 가득 차 도시를 만들고 바벨탑을 쌓던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온 땅에 흩어져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바벨탑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로 단결하느냐 여럿으로 흩어지느냐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됨과 흩어짐은 일방적으로 좋다 나쁘다 그렇게 해석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로 단결하는 것이 축복도 될 수 있으며 저주도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인간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하나되어 똘똘 뭉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만일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이기심 때문에 따로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혹시라도 함께 모여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을
앞세우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또한 잘 흩어져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참된 성도는 잘 모이면서도 잘 흩어지는 성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흩어짐으로 하나되는 세계'라는 말로 표현해봤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욕심과 교만으로 가득찬
인간의 도시를 건설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함께 모여 계속해서 한 언어를 쓰면 이보다 더 엄청난 일도 저지를 수 있다고
우려하셨기에 이들을 온 땅에 흩어지게 해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벨탑 없는 신앙과 순종과 겸손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비결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혹시라도 사람들끼리 작당을 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죄지을 소지가 있을 때에는 과감히 흩어져야 합니다.
수시로 흩어지고 수시로 하나되어 '흩어져 모이는 교회,' 이런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느 때 모이고 어느 때 흩어져야 하는가를
잘 깨달을 수 있는 분별력을 다 갖추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흩어져 하나되는 교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바벨탑 사건의 결과는 언어가 서로 달라 사람들이 서로 못 알아 듣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초대 교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을 때
세계 각국 사람들이 와서 방언을 말해도 서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 불신앙으로 가득 찼을 때에는 언어가 갈라지는 일이 생겼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언어가 통일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흩어져 있던 우리가 또 다시 하나가 되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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