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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을 바꿔라 (민 1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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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백성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신1:20-23과 연결해서 봐야 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둘을 택하매” 분명히 백성들이 먼저 정탐하자고 제의할 때, 모세가 허락했다(민13:1-2).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정탐하라는 말이 없다.

  인간의 생각이 정탐하도록 만들었다. 신앙은 순종이지 이해가 아니다. 먼저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순종이 먼저다. 그러면 이해된다. 이해가 안되고 궁금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진할 때, 먼저 가보았기에 갔는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가면 가고, 멈추면 그들도 멈췄다. 정탐을 원하는 백성들의 마음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앙을 보게 된다. 신13:2을 보면, “사람을 보내어”라고 되어 있다. 원문은 “너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라”이다.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를 위하여, 가나안의 지형, 사람, 전투 준비 등 정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계획을, 17절 이하에서 정탐꾼에게 말한다.

  남방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을 탐지하라. 그곳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땅은 좋은지 안 좋은지, 천막에 사는지 견고한 성에 사는지, 땅은 기름진지, 그리고 과일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저들은 갔다와서, 보고 들은 것을 모세에게 보고하면 되었다.

  그런데 26절에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보고하였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40일을 정탐하고 돌아온 저들이, 보고서를 제출한다. 27절을 보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서, 가져온 과실을 보여주었다. 희망을 주는 보고다. 그런데 갑자기 28절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그래서 의견이 둘로 분열되고, 백성들도 분열된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말하지만, 열 사람은 “못 들어간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다”며 악평한다.

  부정적인 정탐꾼들의 보고가 백성들을 겁먹게 하고, 실망과 좌절 속에 방황하고, 격동시킬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약속하신 것을 환기시키면서, 믿음으로 올라가서 소유하자고 말씀한다. 백성들을 안돈시켰다(30).

  담대한 신앙인은 주변 사람을 안심하게 한다. 그러나 불안한 사람 곁에 있으면, 자신도 불안하게 된다. 그러나 담대한 사람 곁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담대해 진다. 따라서 지도자는 담대해야 한다. 그래야 따르는 무리가 평안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생각을 바꾸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생각을 바꿔야 하는가?

1.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지저분하고 더러운 말을 들으면, 음식 맛이 떨어진다. 음식이 변했는가? 아니다, 똑같은 음식이지만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가운데,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현명한 조언자가 나타나서, 여인에게 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문제없는 집, 슬픔과 분노가 없는 집의 냄비를 구해 오면, 슬픔을 잊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따라, 여인은 냄비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런 집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위로되고, 슬픔을 이길 수 있다.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문제와 사건이, 줄줄이 엮여있다. 그런데 문제를 만났을 때, 사람들마다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 문제와, 사건으로’ 상처를 입고,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문제를 오히려 즐긴다. 그래서 인지심리학자들은 문제와 사건이, 정서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문제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즉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라고, 12지파에서 족장 1명씩 가나안으로 보내셨다. 12사람은 분명히, 똑같은 장소를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사람은, 전혀 다른 두 편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은 서울을 갔다오고, 열 사람은 부산을 갔다오지 않았다. 12명 모두가, 가나안 정탐이라는 사건을 함께 겪었지만, 그들의 정서적, 행동적 반응은 너무 달랐다. 10명의 사람들은 가나안 땅을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보았고, 가나안 사람을 엄청난 거인으로 보았다.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은 자들이야, 그래서 도저히 이길 수 없어…”하면서, 두려움과 불안과 패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패배감은 온 회중을 두려움으로 몰아갔고,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고불고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만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본 순간, 이곳은 대단히 아름다운 곳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니 우리 땅이다. 저 거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이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흥분시켰고, 도전의식을 자극했으며, 희망과 기쁨에 반응하게 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문제 앞에, 두 팀의 생각은 전혀 달랐고, 이에 따라 행동도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여기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볼 수 있는데, 생각을 바꾸면 인생도 바뀐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허락하셨다. 우리는 합리적 생각과, 왜곡된 생각을 할 수 있는, 잠재적 기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합리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 문제와 사건을 봐야한다.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현실을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성향이 생겼다. 그래서 인간은 외부적 문제로 방해받기보다, 자기 스스로 방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고대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인간은 사물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고, 사물을 보는 견해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부정적으로 사건을 보지 말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고 살아간다. 잘못된 생각의 틀을 깨닫지 못하니, 생각을 새롭게 바꾸지 못하고 살아간다.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

  그 자리는 주저앉아 울고 있을 자리가 아니고, 소망의 깃발을 흔들어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회중을 밤새도록 울고불고 하게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해 돌을 던지게 만들었다(14:10).

2. 잘못된 생각은 불행하게 만든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정탐꾼들이 자신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13:33)고 말했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수치, 분노, 낙망하는 감정으로 자신을 몰아간다. 스스로 메뚜기가 되고서, 메뚜기라는 열등감에 누가 자신의 발이라도 밟게 되면, 자신을 메뚜기로 본다고 하면서, 열 받는다면서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

  거대한 거인 골리앗도, 자아 개념이 개였다. 손에 막대기를 들고 대적하는 다윗을 보고, 골리앗이 외친 말은,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삼상17:43)고 하였다. 자신이 개라는 개념이 없다면, 그리 분노하지 않는다.

  자신이 ‘개’라는 생각을 가진 골리앗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자’라는 생각을 하는, 다윗을 이길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한 후에,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며, 먹었던 고기를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출16:3). 그 이유는 자신이 노예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배자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자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가나안을 탈환하는 일은 꿈꾸지 못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보는 개념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환경이나 문화의 영향을 받기에, 자신에 대한 관점은 스스로, 반복적으로 경험할 때 형성된다.

  특별히 그를 둘러싼 가까운 사람의 반응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매우 큰 영향을 준다.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한 분은 부모인데,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나 언어가 매우 중요하다. 어느 부모님은 자녀가 실수할 때마다, “어이쿠 저 멍청한 놈, 꼭 바보 같은 짓만 해”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처음에 “나는 바보가 아니야”라고 부인한다. 그러다가 또 실수한다. 그때, 부모님께서 “저 바보 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또 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내가 정말 바보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난 정말 바보인가 봐”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받은 사람은, 부정적인 자기 암시를 통하여, 서서히 잘못된 신념 체계로 이루어진, 자아 개념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나는 바보야, 그래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어”하고 성장이 멈춘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기에, 감정과 행동을 바꾸려면, 잘못된 개념을 바꿔야 한다. 잘못된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변할 수 없다. ‘나는 뚱뚱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가진 여인이, 양장점에 옷을 맞추러 가서, 더 살찔 것을 예상해서 큼직하게 치수를 재어달라고 했다.

  그때 그 남편은 “아니요, 당신은 더 날씬해질 테니, 치수를 줄여 옷을 맞춰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나는 날씬해질 수 있다, 아니다, 나는 날씬하다”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 생각을 따라 먹고, 입고, 운동하는 일에 신경을 써서 실제로 날씬해 졌다고 한다.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이상 화를 내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결심으로는 변할 수 없다. “나는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자아 개념을 바꿀 때, 감정과 행동이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자아개념을 바꿔주신다.

  어떻게 바꿀 수 있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주셨다. 참 밝은 세상을 주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저마다 세상을 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하늘도 희미하고 사람도 희미하고, 내가 가야할 세상도 희미하기만 했다.

  이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다. 구원의 길과 영생의 길을 보게 만들어 주셨다. 추한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고, 어두운 세상이 밝게 보인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만사를 어둡게만 보기에,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추수 시기에 미디안족이 침입하여, 타작한 곡식을 약탈해갈 때, 기드온은 두려워서 몰래 숨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였다. 이처럼 소심하고 비겁한 청년이었다. “나는 가문도 형편없고, 형편없는 가문 중에서도 가장 약한 자”라고 했다(삿6:15).

  그런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큰 용사여”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볼 때, 째째한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대장으로 임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너는 용서받은 죄인이다”고 하시고, “나는 아이라 말을 못하는 사람이다”고 하자, “너는 선지자다”하셨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바꿔주시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자아 개념을 뒤집어주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다. 또한 갈대처럼 흔들리는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주셨다. 이처럼 우리의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주님으로 인하여 바꾸시기 바란다.

3. 부정적인 면을 과장하지 말라.

사람들은 현실을 그대로 보기보다는, 훨씬 더 과장해서 생각하고 말한다. 본문을 보면 양쪽 모두 다, 과장해서 말했다. 가나안 땅을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고,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거인들을 자신들의 밥이라고 했다. 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믿음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다. 바라는 것들이 현실이 된다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만 한다.

  부정적인 면은 과장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성경적인 과장은 사용해도 좋다. 이는 문제를 과장함이 아니라, 꿈과 축복의 기대를 크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를 크게 보면, 두려움이 밀려오고, 자신은 점점 엄지공주와 같이, 메뚜기만큼 작아진다.

  사업에 망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다. “목사님, 저는 쫄딱 망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까? 아내는 있나요?”, “착한 아내가 있지요”, “자녀도 있나요?”, “예, 아주 착하고 예쁜 두 딸이 있어요”

  “친구는 어떤가요?”, “좋은 친구 둘이 있지요”, “건강은 어때요?”, “아주 좋은 편이지요” 목사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 사나이는 “그리고 보니, 제가 아주 나쁜 형편은 아니군요,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았네요”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문제를 과장하지 말고, 축소할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문제가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니다. 있는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현실이다.

  아프리카로 현지 파악을 하러 갔던, 구두점의 두 직원이, 맨발로 다니는 아프리카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이곳이야말로, 구두를 대량으로 팔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네 회사의 구두를 신고 다니는 모습을 그렸고, 결국에는 현실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모두 맨발이라니, ‘한 켤레도 안 팔리겠구나’하고 생각했고,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현실로 이어졌다. 문제 앞에 자꾸만 벌벌 떠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과장해 보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파리만 보면,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한 파리를 무서워하다니, 얼마나 우스운가? 파리를 무서워하지 말고, 파리채로 잡으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철장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고, 문제 앞에, 환경 앞에, 마귀 앞에, 떨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각을 하지 못하면, 불행하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능력을 방해한다. 문제가 너무 커서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놓는다 해도,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풍랑을 만난 제자처럼 떨지 말라.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무서운 생각아 아니라, 불신의 생각이다. 이상한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아래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알려진 나무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나무 아래서 쉬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팠기에, 평소에 즐겨 먹었던 음식을 떠올렸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음식들이 눈앞에 차려졌고, 남자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이번엔 푹신한 잠자리가 생각났다. 생각을 하자마자 또 놀랍게도 침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상한 일이군’하며, 침대에 누웠다. 너무 편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아름다운 여자들이 다리를 주물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사이 이번에도 아름다운 여자들이 나타나더니, 애교를 떨며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너무나 행복했기에, 갑자기 두려움이 일었다. ‘불행이 갑자기 들이닥쳐 지금의 행복을 빼앗아 가면 어떡하지?’

  ‘이렇게 누워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두려움에 대한 생각이 자신을 몽땅 삼켜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최악을 생각하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재앙화, 또는 부정적 과장”이라고 한다. 부정적 과장이 생생한 상상력을 가질 때, 마치 현실처럼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부정적 과장은 세상적인 믿음이다. 그 반대로 믿음의 상상은 생명력을 발휘한다.

  메뚜기 족은 엄청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했는데도, 가나안 거민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주님은 그들의 두려운 생각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이 곧 자신을 멸시받는 것이라고 하셨다(민14:11).

  결국 부정적 과장을 사고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민14:23). 축복의 관문 앞에서, 과장적 사고로 인한 두려움이 그들의 축복을 빼앗았다. 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왜 그렇게 슬퍼하고,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짜증내며 살아가나요? 믿음의 눈을 여시기 바란다.

  결론이다. 생각을 바꾸자. 생각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잘못된 생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면을 과장하지 말고, 현실의 문제를 믿음의 눈을 열어, 꿈과 축복을 기대함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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