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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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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비롯해서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특별하게 대우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보다 훨씬 탁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된 것도 영광스럽지만,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은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갈 4:6). 세상에 이 보다 더 위대한 신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 시간 저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라는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일을 만납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승승장구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질병으로 고생할 때도 있고, 경제적인 위기를 만날 때도 있고, 가정적으로 혹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어제까지 형통하다가 오늘 와서 형편이 반전되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생존경쟁이 극심한 시대에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살얼음판입니다. 사람들은 격투기 선수처럼 비장한 각오를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고 늘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하신 성경 말씀이 실감납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간 지 두 세대가 지난 때였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토로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아무 응답도 없으시다고 불평했습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듯이, 고난의 시기가 너무 길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시고 보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크게 상심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한시라도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잡혀온 지 70년이 지나면 고토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바벨론 제국이 건재한데 어떻게 유다인들의 해방이 가능하겠는가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실 뿐 아니라 그 능력으로 땅 끝까지 창조하신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대로 이루지 않으실 리가 만무합니다.

선민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듯이, 때로는 우리도 곤고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고난이 중첩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처럼 낙심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고 불신앙의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한다’ 함은 믿고 기다리는 것, 희망을 품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곧 앙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만 앙망하는 것입니다. 나의 방법을 사용하고 그래도 힘이 부족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앙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위대한 기적들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영원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구원을 갈망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5)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의뢰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온갖 핍박과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 전파자로서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그가 극심한 환난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얼마나 고초가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도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앙망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사도 바울에게 그 같은 환난을 겪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조금만 내세울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이나 지혜로서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마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백성은 무력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천하에 적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막강한 바벨론의 손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이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망각한 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아 있는 자에게 힘을 주셔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힘이 세었든지 맨 손으로 젊은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밧줄로 결박당했어도 한 번 힘을 쓰니 밧줄이 불탄 삼 처럼 끊어졌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올라간 적도 있습니다. 힘으로 삼손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그 힘이 본래부터 그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자기를 결박한 밧줄을 불탄 삼 처럼 끊어버렸다고 했습니다(삿 15:14). 또는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다’(삿 14:6)고 하였습니다. 삼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했을 때 이처럼 위대한 능력을 받아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새 힘은 비단 육체의 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힘보다 시험과 시련을 이겨내는 마음의 힘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맥없이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돈의 위력 앞에 굴복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께서 새 힘을 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던 사람이 독수리처럼 강인한 신앙인이 됩니다.

독수리는 새 중에서 왕입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새 중에서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새는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께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강하고 담대한 영력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셨을 때였습니다. 한 남자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귀신에게 조롱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돕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기를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고 하시고, 이에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왜 작은 시험 앞에서도 쉽게 넘어지는 것일까요?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시험에 들거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믿음이 약한 것이 시험에 든 원인입니다.

참새는 그리 높이 날지 못하고,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갑니다. 둥지를 만들어도 처마 밑이나 기껏해야 나무 위에 짓습니다. 참새는 높이 날지 못하므로 멀리 볼 수도 없고 창공을 비행하는 기분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때문에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태풍이 불어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늠름하게 비행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받아 누리는 은혜의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한이 없으시지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를 위해서만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엘리야 시대에 삼년 반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고침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은 여호와를 앙망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여호와를 앙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할 때였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에 따라 행진하다보니 어느덧 홍해 가에 당도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주위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입니다. 그야말로 광야에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수비대가 이 사실을 바로에게 보고했을 때, 바로는 마음이 변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로잡기 위해 애굽의 모든 마병과 병거를 거느리고 추격해 왔습니다.

병거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고 저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11)…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키셨더니 도로 가서 종노릇을 하겠다고 하다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부정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이르기를 “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더러 나가서 애굽의 군대와 싸우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헤엄쳐 건너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구원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그 사이에 난 길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으나 뒤 따라 들어온 애굽의 마병들은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다니엘을 미워하던 신하들이 다리오 왕을 충동질해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법령을 만들어서 왕의 어인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서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평소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태도입니다.

대적들이 이를 적발해서 왕에게 고했습니다. 다리오 왕은 신하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이 일을 꾸민 것을 알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을 결박해서 사자굴 속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니엘이 죽게 된 것을 슬퍼하며 말하기를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리오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아낀 나머지 막연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위로 차 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다니엘을 사자들의 입에서 건져내심으로 다리오 왕의 소망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북방의 강대국인 앗수르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앗수르를 막아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앗수르 왕의 편지를 펴 놓고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15)…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18)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 19:)

히스기야는 믿음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에 구원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앗수르에게 항복하지도 않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오직 여호와만 앙망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쳤더니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다는 싸우지도 않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 문제의 홍해가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피할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까? 앗수르 대군에 의해 포위된 히스기야처럼 속수무책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도님들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한 그 어떠한 문제도 겁낼 것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앙망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사자의 입이 봉해 지고, 대적들이 멸망하고 말았듯이, 성도님들이 당면한 문제가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거에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놓치셨기 때문에 우리가 낭패를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눈에는 도무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기만 하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고후 4:)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매우 불리한 시대를 만났습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세속의 유혹과 황금만능주의 풍조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특별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성도님들께서는 여호와를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받아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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