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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고전 13:5,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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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왜 바울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예찬했는지 그 이유를 더 실감하게 됩니다. 사랑은 인간을 괴롭히는 다양한 문제들의 가장 근본적인 해답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랑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절망과 낭패감만 더 깊어져 힘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매우 유익한 호전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과 자만심의 고질병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요1 4:7).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갈망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눈을 항상 밑으로 깔고 자기 밑만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위대하고 높은 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눈을 들어 자기 위를 바라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겸허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은 무례함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그와 관련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무례함은 앞서 살펴본 자기자랑, 교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셋은 자기가 무대의 중심에 서야된다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그 욕망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자랑은 자기의 이미지 강화를 추구합니다. 교만은 힘과 권력의 획득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무례함은 남을 무시하고 눌러버림으로 상대적으로 자기의 위상을 높이려는 전략적 행위입니다. 그럼 무례함의 정체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사랑이 어떻게 무례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무례함의 정체와 위험성

무례함은 단순히 예의가 없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원하지만 어떤 것이 예의바른 것인지 몰라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어린 사람이 윗사람과 대화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대화 중 자기보다는 나이가 많거나 자기가 높여야할 처지에 있지만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윗사람보다는 어리거나 낮은 위치에 있는 제3의 인물을 언급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때 그 제3의 인물에 대하여 존칭을 사용해야될까요 하지 말아야할까요?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윗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윗사람인데 존칭을 사용하지 않으려면 뭔가 켕기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법을 잘 모르면 그만 존칭을 사용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실수를 무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의적으로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누르려는 의도나 자기를 높여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아주 예의바르게 언어를 사용하고 행동해도 사실은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무례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월드컵 축구 프랑스와 이탈리아 결승전 경기 중 지단이 마테라치를 머리로 들이받아 경기장에 눕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근 축구장에서 그들 사이에 오갔던 말들의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발단은 마테라치가 지단과 몸싸움을 하다가 지단의 유니폼 상의를 잡아 당긴데 있었습니다. 페어 플레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축구경기에서 자주 있는 일이지요. 이 때 지단은 '내 유니폼 갖고 싶으면 나중에 줄께'라고 말했습니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이상할 거 아무 것도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축구선수인 마테라치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한 것에 틀림없습니다. 이에 마테라치도 발끈해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나는 네 누이를 갖고 싶다'. 훨씬 노골적으로 무례한 말입니다. 지단이 머리로 들이받을 만한 말입니다.

무례함의 핵심은 이렇게 상대방을 누르고 아프게 해서 결과적으로 자기를 상대적으로 높이려는 의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례한 사람도 아무에게나 무례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지위와 신분상승에 보탬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합니다. 도가 지나치면 갖은 아부와 아첨을 다합니다. 반면 나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거나 나의 위치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에겐 아주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소위 속물근성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죠. 또는 상대방의 도덕성 혹은 경건성 정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 특히 위선적인 사람만 만나면 눈에 불이 납니다. 말이 함부로 나갑니다. 우선 주먹부터 한 방 날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원래 그런 과의 사람입니다. 다만 덩치도 적은데다 격투기라곤 하나도 몸에 익혀본 바가 없는지라 실행에 잘 옮기지 못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러한 무례함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영적 권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을 정성껏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일군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확 깨버립니다. 그들은 간음 하다가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무리들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곤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표면적으론 예의를 갖춘 것 같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신학적 도덕적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중적으로 무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무례함입니다. 그들은 그 여인이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타락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 여인을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인격이나 자존심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무리들에 대한 무례함입니다. 언어표현상 기본적 예의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무리들의 배움의 현장을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영적 도덕적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기에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의 코를 공개적으로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역시 그들에게 위협이 되거나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사정없이 그들의 진지한 배움의 장을 뒤엎어 버림으로 그들을 누르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의 목적은 단 하나,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있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무례함은 두 가지 점에서 무섭습니다. 첫째, 무례함을 당하는 사람의 인격을 사정없이 짓밟아 깊은 상처를 줍니다. 심지어는 자살하게 까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점에서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지요.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모 대기업 사장이 대통령의 형에게 찾아와 청탁을 한 것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 때 표현이 무척 무례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 후 그 회장은 한강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회장의 비리나 자살행위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무례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우리들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례함을 단지 예의가 좀 없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례함이 무서운 두 번째 이유는 매우 역설적입니다만 극도로 무례한 사람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내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정없이 무례했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결국 많은 무리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가능케 했습니다. 빌라도 법정은 여론재판의 한 비극적 전형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무례로 말하자면 히틀러를 능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독일 국민들이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우리 역사로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떠했습니까? 정적들과 비판적 국민들에게 사정없이 무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교계는 어떻습니까? 성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고 있는 지도자들 중엔 사정없이 무례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참아 우리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말을 성도들에게 내뱉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말에 성도들이 '아멘, 할렐루야!'로 환호하며 화답한다는 점입니다. 아, 무례의 어두운 힘이 무섭습니다.

대중들은 어설프게 무례한 사람에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그룹에 속합니다. 그러나 넘치는 확신으로 남을 무례하게 짓밟는 사람에게선 묘한 카리스마를 느낍니다. 소위 마조키스트적 즉 자기학대적 쾌락입니다. 학대받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한 권위를 필요로 합니다. 그 권위를 상실할 때 빈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갈증을 갖게 됩니다. 그 공간을 파고드는 것이 극도로 무례한 권위입니다. 속이 허한 사람들은 무례함을 권위로 착각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안도감을 느낍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무례한 지도자들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렘 5:30-31):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유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고후 11:20):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오늘 한국교회 건강회복이 어려운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무례한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개혁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무례는 우리가 진지하게 싸워야할 실로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 스스로 어떻게 무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무례한 권위를 분별하여 그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2. 사랑은 무례를 이기게 하는 힘

바울 자신이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 영적 우월감이 그를 극도로 무례한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그가 청년이었을 때 벌써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청년으로 무례한 지도자 대제사장에게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랬던 그가 사도가 된 후 돌변했습니다. 무례는 그의 삶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새로운 차원에서 신학적 깊이와 도덕적 탁월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더 이상 무례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습니다(고전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빌립보서 3:18을 볼까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의 눈엔 눈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원수들에게조차 무례하지 않았고 눈물로 호소함으로 그들을 소중히 받들었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무시당하고 버림당하고 짓밟힐지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까?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사랑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온유하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처음 대면했습니다. 위협과 살기를 뿜어내고 있던 무례한 사울에게 예수님이 다가와 하신 것이라곤 빛으로 그를 두르신 후, 겨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질문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그의 인격과 존재를 존중하셨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후 바울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변하여 사랑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례는 그의 삶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배추가 소금에 속속들이 저려지듯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푹 적셔질 때, 비로소 무례함을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결코 무례하게 대응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땅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내용 보단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조용히 땅에 뭔가를 쓰신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무례를 촉발시킬 수 있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다그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양심의 정곡을 찔러 도전하시되 결코 무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 하던 모든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곤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인은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답을 하면서 여인은 얼마나 마음의 안도를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여인을 무리들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의 인격을 존중하여 조심스럽게 다루시고 계심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안도시킨 다음 예수님은 중요한 권면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를 정죄할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를 짖지 말라고 진지하게 권면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언제나 그 누구도 심지어는 사단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철저히 싸고도십니다. 주님 자신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만 진지하게 권면해주십니다. '가서 이제부터 새 출발해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똑 같은 죄를 짓고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똑 같이 대하십니다. 우리가 마침내 주님의 사랑과 인내에 감복하여 스스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반복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몸에 베이기 시작하면 우리도 꼭 그만큼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사랑으로 점점 변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꼭 그 만큼 우리는 무례함을 극복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람마다 성숙의 속도에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단번에 무례함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숙의 과정에서 태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길을 끈기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사람마다 무례해지는 경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부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약한 부분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도록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면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순간적으로 제가 무례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엔 다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잘 존중하는 것 같다가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꼭지가 열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다치고 상하게 만듭니다. 동지를 잃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역을 의도했을지라도 그 사역은 힘을 잃게 됩니다. 바른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의 경계1호 대상은 무례함입니다. 바른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례해지는 순간,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가장된 무례함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무진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한번 화끈하게 사랑해주면 곧 다시 풀릴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하며 무례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데로 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군림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으로 무례함을 잘 극복해나가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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