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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문을 여시고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 (시 78:23~25, 요 6: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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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에서 장로님께서 성경을 봉독하시면서 ‘역대하’를 봉독하시게 되었는데 “대하드라마 5장 10절”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 얘기를 하시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역대하’야 말로 대하드라마가 맞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섭리와 역사가 대하드리마 아니겠습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섭리는 문자 그대로 대하드라마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만나를 주신 일입니다. 만나 이야기는 정말 대하드라마의 백미이며 압권입니다.

  미국까지는 비행기를 타면 가장 빨리 갑니다. 그런데 영국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고, 오순도순 얘기하면서 가면 가장 지루하지 않고 좋은 여행이 될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이라는 여인을 얻기 위하여 외삼촌 집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봉사를 7년을 하루같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긴 세월인데 7년을 하루같이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면 7년도 금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40년도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4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40년은 정말 하루같이 지나갈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잠잘 것 다 우리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과제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에 가장 지루하지 않고 쉽게 지날 수 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는 축복의 음식입니다. 40년의 광야생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은혜가 만나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의 옷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장막 칠 곳도 미리 예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알아서 제공하시는 여정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문제입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다른 모든 욕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먹지 못해 배고 고픈데 무슨 성욕이 생기겠습니까? 당장 굶주리는데 무슨 명예욕이 필요 있습니까?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 이런저런 인간의 욕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시험은 먹는 문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먹는 것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지식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첫 시험은 먹는 문제였습니다. 먹는 것을 통하여 마귀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시험도 먹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근 때문에 아브라함은 애굽까지 이주하였고 거기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미숙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만나는 하늘의 음식입니다. 축복의 음식입니다. 은혜의 음식입니다. 기적의 음식입니다. 풍족한 음식입니다. 40년 동안 한결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입니다. 시편 78:23에는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신 까닭은 만나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시려고 하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의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십니다. 그리고 열린 문을 통하여 만나를 주십니다. 우리를 지금도 먹이시려고 하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 문을 통하여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만나로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늘 문을 여신 것은 하늘 양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시편 78:24에는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라고 합니다. 어떤 두 남자가 간이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콜라 두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싸온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인이 나오더니 “여기서는 자기가 싸온 음식을 먹으면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남자는 서로 쳐다보더니 둘이서 서로의 것을 바꿔 먹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바꿔먹는 것이 아닙니다. 물물교환이 아닙니다. 농사한 사람들의 식량과 다른 공업 제품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농부의 수고만으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먹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수고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음식은 산 양식입니다. 생명을 주고, 하늘에서 왔기에 하늘을 생각하게 하는 음식입니다. 세상농사에 감사하지 않고 먹는 것과 농부에게만 감사하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둘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비로소 하늘양식입니다.

  산 사람은 산 떡을 먹습니다. “사자는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맹수 중에 사자는 죽은 고기는 먹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물만을 공격하여 잡아먹습니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산 떡을 먹어야 삽니다.
  만나는 하늘 양식입니다. 하늘을 위한 양식입니다. 하늘을 가기 위한 양식입니다. 하늘 양식이 풍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갈 수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시는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썩은 양식, 썩은 고기를 줄 리가 없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그 자체가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싸인입니다.

  스테이크는 섭씨 5도 가량으로 닷새 정도 얼지 않게 냉장하는 것이 가장 연하고 맛있다고 합니다. 소는 죽었지만 고기는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죽었지만 살아있는 고기가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고기이어야 합니다. 살아 숨쉬는 양식인 하늘 만나여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인 하늘 양식은 영원히 살아 있는 양식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베푸신 기적은 가장 인상적인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가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먹이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먹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이 기적의 참 목적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히 사는 떡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영원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실망할 만한 말씀입니다. 진정한 하늘 양식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나는 하늘의 떡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신 최고의 날이 언제인지 아세요? 예수님을 보내신 날입니다. 하늘의 천사가 찬송하던 그 날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열린 문을 통해 세상에 오신 주님의 탄생일입니다. 이전에 하늘 문을 여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 여는 것의 연습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늘 양식은 매일 새벽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영원히 사는 하늘 양식이신 그리스도가 매일 새벽마다 집집마다 소복이 쌓이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늘 양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족한 음식입니다.

  시편 78:25에는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어머니의 마음이 뭔지 아세요? ‘많이 먹어라’, ‘실컷 먹어라’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보면 화가 나면 도시락을 안 가지고 학교엘 갑니다. 어머니는 그게 애처로워서 도시락을 싸들고 교실을 찾아갑니다. 이런 한국 어머니의 정서로 봐서 학교 급식의 부실이나, 집단식중독 등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못할 중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만나를 주십니다. 누구나 모자라지 않게 풍족하게, 마음껏 거두고 먹게 하십니다.

  어느 뷔페 음식점 앞에 광고를 붙였습니다. “운동부원들은 식사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합니다”. 이게 세상의 인심입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거두어 마음껏, 충족하게, 모자라지 않게 먹으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16:18에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40년 동안, 풍족한 음식이 만나라는 식량입니다.
  하늘 양식은 충족한 음식입니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누구에게나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음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나음이 없는 자기의 양에 적합한 음식입니다.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다 문제인 이 땅에서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며 오묘하신 섭리입니다.

  세상의 양식은 모자랍니다. 먹어도 배고픕니다. 세상의 생수는 점점 고갈됩니다. 아무리 마셔도 목말라 합니다. 하늘의 물은 모자라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광야에서 주셨던 만나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 양식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누구에게나 충족한 음식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의 8억5000만 명이 굶주려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 인구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어야 합니다. 전 세계 인구의 20%가 빈곤자입니다. 빈곤은 문자 그대로 지구적 과제입니다.

  인간 사회는 두 계급이 있다고 합니다. 식욕보다 먹을 것이 넘치는 계급과 먹을 것보다 식욕이 넘치는 계급입니다. 이 두 계급의 해소방안은 식욕만큼 먹을 것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이론과 자신이 가진 먹을 것만큼만 식욕을 느껴야 한다는 이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인간의 이론은 인간의 식욕을 충족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소크라테스입니다. 하루는 그가 장터 가게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평생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이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 이 말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고 있네”. 참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필요 없는 것까지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어떤 인에게는 꼭 필요한 것 까지도 너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시편 132:15에는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충족하게 먹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성이 풍족하게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풍족하게 채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대로 “내게 부족함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칩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현재적 고백입니다. 하늘 양식이 풍족하고 넘칩니다.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런 축복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적 축복입니다. 하늘나라의 축복입니다. 요한계시록 7:16에는 “저희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친구에게 “자네는 빈속에 사과를 몇 개나 먹을 수 있을 것 같나?”라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글쎄, 한 다섯 개”라고 대답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를 먹으면 이미 빈속이 아니잖아”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집에 가자마자 “여보, 당신은 빈속에 사과를 몇 개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글쎄, 두개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편은 “피, 다섯 개라고 했으면 재미있는 얘기 해줄려고 했는데”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은 빈속에 사과를 몇 개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배가 고파 허덕인다고 하지만 마음껏 먹으라고 해도 얼마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무리 목말라 목이 탄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마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기껏해야 얼마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이 먹고 마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족이 됩니까? 다음에 또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끊임없이 계속 채운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부족을 충족으로 바꾸십니다.

  현대인은 무엇에 충족함을 얻고 있습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밤새 춤을 추고 취한다고 충족합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폭주한다고 젊음이 충족됩니까? 바다이야기에 빠져서 돈 몇 푼 딴다고 충족됩니까? 사람들이 충족을 얻기 위한 중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 말씀에 대한 묵상과 성도의 교제, 그리고 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에게 전하는 전도, 이게 얼마나 좋은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충족하는지 압니다. 참 충족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참 충족이란 하나님 안에서 얻는 것입니다.

  ‘타임’이란 잡지에 “새로 발견된 종교문서들은 신비적 영성에 굶주린 현대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발견된 ‘유다복음’이나 다른 어떤 문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고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만 가지고도, 말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우리 영혼이 충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새롭고,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초코파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답은 “군대간다”입니다. 하나님의 만나를 가장 맛있게 먹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늘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만나를 먹는 것입니다. 하늘 양식으로 배불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살면 하나님의 만나가 가장 맛있고, 충족한 음식이 됩니다.

  ‘예’(禮)라는 한자에는 이미지 관리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풍성할 ‘풍’(豊)자에 보일 ‘시’(示)자를 더해 놓은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그냥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보이면서 전달될 때에 예(禮)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풍성하게 보이는 것이 ‘예’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항상 풍성하게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는 풍성하게 보여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돼야 합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여야 합니다. 날마다 하늘 양식으로 생명의 양식을 얻고, 날마다 하늘 양식으로 풍성하고 충족한 삶을 살아 우리의 풍성함이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정받은 것이 부족함이 없는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 앞에 하늘 문이 열리고 만나가 풍성한 기적의 삶을 사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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