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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서 죽은 부자의 소원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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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없이 맑고 한없이 높아져만 가는 가을 하늘을 보면서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봅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요 결실의 계절입니다. 가을에 열매가 없다면 어찌 될까요? 가을의 단풍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풍성한 열매들이 함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에 열매가 없다면 이 질문은 성도에게 있어 열매가 없다면 하는 질문과 같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최고의 아름다움은 열매입니다. 30.60.100배의 열매의 결실이 있는 신앙 말입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주님이 열매를 찾곤 합니다.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모습 속에서 주님의 아픔을 주님의 원하심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안타깝게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주님의 기대에 실망을 주고 말았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달란트 비유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대가 있었음을 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나무가 혹 무성한 나무는 아니신지요 여러분은 혹 여러분의 신앙의 나무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신지요 내 신앙의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여 하고 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주님 기대하시는 최고의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왜 우리가 전도해야만 하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에서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가장 미련 없이 살다가 가장 처절한 마지막을 본 사람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속에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땅에서의 삶은 마지막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두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부자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왕족들이 입는 자색옷을 입고 가장 아름다운 실크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린 부자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거지 나사로가 있습니다. 그는 거지이자 그의 삶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버려지는 음식들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버림받아 개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헌데를 핣아 주었습니다. 대책이 없는 듯이 처절한 삶을 산 것입니다. 저들의 마지막을 무어라 소개하고 있습니까 거지는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아마 한 날에 똑 같이 죽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인생에는 끝이 있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소돔도 노아시대도 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지긋지긋한 처절한 삶을 살았던 나사로에게는 죽음이 그리 두렵거나 아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거지에게 있어 죽음은 해방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에서의 해방과 가난이라는 절망에서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외로움에서 해방과 개하고나 놀아야 하는 처절함에서 잘 죽었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얼마나 죽기가 어려웠을까요? 롯의 처가 소돔성을 돌아볼수 밖에 없었듯 가야 할 하늘보다는 이 땅에 두고 가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자식 좋은 일만 시켰다고 했을 것입니다. 거지나사로에 대해서는 그냥 죽었다 표현합니다. 부자는 장사되었다 표현하고 말입니다. 거지는 죽었다하고 부자에게는 장사되었다했는데 거지의 주변에는 마지막 장사지내줄 변변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청소부들에 의해 이름도 모를 공동묘지에 던져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잘 장사되었습니다. 이 자의 장사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동네 유지들이 다 모였을 것이고 정관계 지인들도 다 모였을 것입니다. 장례절차도 요란했을 것입니다. 거지의 죽음에는 모두가 잘 갔다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났지 하거나 부자의 죽음에는 아까워서 어떻게 죽었을까 마누라나 자식만 좋겠네 하며 주변의 소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거지가 들었던 소리를 듣는 죽음이었으면 합니다 죽음자체가 복이 되어서 아닙니다. 나사로가 잘 죽은 것은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내 이름이 이 땅에 있는 것보다 하늘에 기록된 것이 많아야 복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죽음뒤에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물 한 모금의 애절함이 있습니다. 부자에게 영원할 것 같았던 세상이 결국 끝이 있었습니다. 왜 거지의 삶이 힘들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런 삶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면 인간은 자기문제를 자신안에서 해결 할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사실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주님에게 가지고 오는 것이 최고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뉩니다.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질병이나 상처가 없고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새 하늘과 새땅입니다. 무엇보다 너무도 사랑하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지옥은 정 반대의 불구덩이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상상하는 곳 이상의 장소입니다. 부자의 착각은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쌓아둘려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26절에서는 천국과 지옥사이에는 큰 구덩이 있다합니다. 이는 구분과 경계를 확실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결정된 것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것을 늦게 깨달았습니다. 깊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늦은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야만 아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 이 땅에서 선택하는 곳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는 단비 같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예고되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결단하셔야 합니다. 복된 죽음은 이 땅에서 미련없이 호강하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예비된 죽음이 복된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이 가장 복된 분입니다. 하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말입니다.

  앞서 죽은 부자의 결국에서 보여지는 소원

나사로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모세도 있고 다윗도 있는데 왜 성경은 아브라함의 품이라 할까요? 이는 믿음을 상징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에게 믿음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곳이지 거지여서 가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어려웠지만 모든 환경 중에 믿음을 놓아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딤후 4: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합니다. 믿음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어 최고의 재산은 믿음입니다. 무엇을 더 가지기 위해 이루기 위해 믿음이 포기되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늘입니다. 더 잘되고 부자가 되고 이 땅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믿음을 지켰다고 부자가 되거나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가치는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우심이라는 나사로의 이름에 모든 것에는 부족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믿음의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요? 부자여서일까요 아닙니다. 먼저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을 보면 그는 이 땅이 목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알고 하나님고 알고 예배도 드렸던 존재였습니다. 나사로가 그렇게나마 다른 곳이 아닌 부자의 미문앞에 있었던 것은 어느정도 구제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가 두 가지 청원을 했던 28절-30절에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다섯형제가 이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회개하도록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지만 예배의 자리에도 있었지만 부자의 결과는 결국 회개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삶은 결국 지옥입니다. 부자의 청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의 중요성입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지금 응답될 수 없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지금 지옥에서야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습니다. 부자는 지금 지옥에서 얼마나 전도가 소중한지 알았습니다. 돈으로 구제하는 것 이상으로 그날 위로하는 것 이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합니다. 아마도 부자는 나사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야 왜 나에게 천국과 지옥의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니 하나님안에서 사는 것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라 왜 말해주지 않았니 이러면서 통곡했을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책임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바로 우리를 상징합니다. 앞서 간 사람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전도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에게 맡긴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말입니다. 사마리아여인을 불쌍한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하듯 구원받아야 할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구령의 열정의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말입니다. 나를 뛰어 넘어야 내 생각을 깨야 합니다. 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열매가 없어도 되는 사람이야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있을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금년 11월 12일에 새생명축제주일입니다. 열매가 있는 나무 수확을 거두는 나무로 보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기대할 만한 열매가 있는 나무입니다. 가을에 열매가 없는 것은 성도에게도 아름답지 않는 모습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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