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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 (요 6:5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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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유명한 대학들 중에 프린스톤 대학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학이라고 발표되었습니다.  전에 프린스턴 대학에 ‘잭 월슨’이라는 유명한 구약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린스턴 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월슨 박사에게 찾아와서 “우리는 구약의 이 것 저 것들이 믿을 수 없어서 토론 좀 하려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노 교수는 그 말을 듣고 웃으시면서 “토론하는 것은 좋은 데, 성경을 토론하겠다고,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 한 번도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교수는 “나는 적어도 40년 동안 밤잠 안자면서 몇 백번을 읽고 연구했어도 믿지 못할 것이 없는데 우선 몇 번 읽고 오세요.”라고 했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은 이곳에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오늘은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식주(衣食住)라고 하면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 옷과 음식과 집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체면문화가 발달하고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허세를 부리는 면이 없지 않으므로 옷(衣)을 먼저 넣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먹는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하루 세 때 먹는 문제가 정말 다급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지요, 연로하신 어른들에게 내놓을 것을 없다면 눈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식주의”라는 말을 해야 옳을 듯합니다.  먹는 것과 사는 집과 그리고 입는 옷이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사먹을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뒷산으로 올라가던 친구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시내 큰 교회 여전도회에서 와서 전 학생들에게 대접할 때면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던 친구들이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학문과 경건의 신학교만 나온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연단의 신학교를 나온 것입니다.  학문과 경건 그리고 연단이란 신학교를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배고픔을 겪어 보아야, 사람이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먹는 문제, 양식, 참된 양식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가운데, 4복음서에 함께 기록하고 있는 이적은 오병이어의 이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아 거둔 것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와야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으로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그곳에서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논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였습니다.

  다음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갈릴리 바다 건너편, 이적을 행하셨던 벳새다 광야로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제 본 동리 가버나움으로 오시는데, 바다 위를 걸어 건너오셨습니다.  수소문 끝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6:27-28)고 했습니다.  예수님이나 따라다니면 먹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에게 무엇을 얻어먹을까 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요6:28)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의 남은 사역에 동참하여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소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집요하게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은 광야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도 예수님이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할 수 있느냐?  겨우 5천명에게 한 끼 먹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라고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으며  47-48절의 말씀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성경을 보고 믿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확신을 주시는 귀한 말씀들인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던 이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군거립니다.  어떻게 함께 살아가던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점점 더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고 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습니다. 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가 영생을 줄 수 있다느니, 없다느니, 예수님이란 분은 흔히 볼 수 있는 랍비와 다르다니, 아니라니 말하면서 다투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이 된다는 말이 걸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먹고 마시듯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생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5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을 참된 양식이요 내 피를 참된 음료로다”(53-5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살을 먹어야 하고,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므로 그것이  몸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고 살아가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생활 속에 깊이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 분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본문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56-57절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믿어온 것은 그들의 해방자였던 모세를 따르면 영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알았으나 예수님을 당신을 믿으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수정하셨습니다.  그들의 옛날부터 내려오던 유대교를 믿어야 구원받는 것으로 알았는데, 영생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으로 수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오고 오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양식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가 되십니다.  누구의 살과 피라고 함은 곧 그의 전부요,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또 피라고 함은 성경에서 생명을 의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함은 문자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비유적이 말씀이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56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계시는 연합과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즐거움만큼 큰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제할 때에 식탁의 교제만큼 좋은 교제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예수님을 먹고 마시듯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그를 묵상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주님과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는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요, 주님으로 인하여 감격과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나눌 때에 잘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어렵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영생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살을 도려내어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 영적 세계의 깊이가 있는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식인종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판단하고 떠나갑니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하려고 왔는데, 자기 살을 주겠으니 먹으라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유대인 무리들이 예수님 앞에 있었고, 수많은 일반 성도들 곧 여러 제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떠나갔습니다.  일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다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당신이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갈 것을 예언하시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면서 지금 일러주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한 끼 양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을 들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많은 제자들이 그를 떠나가고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내려왔는데,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겨우 한 끼 식사나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12제자들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을 주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세례를 줄 때는 구원받은 확신이 있느냐는 것과 언제까지 예수님을 믿을 것이야 하는 것, 두 가지만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답 못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예수를 믿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개 “죽을 때까지”라고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믿겠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 하고도 세상으로 나가 버리고 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12제자를 대표하여 말씀드린 것이요, 그들 모두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중에 한 사람 가룟 유다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선생님을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따를 것인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추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겠습니다.  나를 위해 살아갈 것이냐, 주님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주님은 우리의 생애를 아름답게 사용하시고 보람과 의미를 찾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살고 내 길을 걸어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패와 낙심이요, 절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처음에 우리를 지으실 때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롬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힘쓰면 인생 성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받아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인 것처럼 우리도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요,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영은 살아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에서 56-57절의 말씀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신앙의 진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서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 안에 머물고, 체재하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메노(remain)라고 하는데, 어느 장소에 머무르다, 살다, 체재하다는 뜻입니다.  요14:10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산다는 말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적인 관계로 밀접한 관계요, 떨어지려고 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일치와 연합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명이요, 서로 다른 인격인데도 하나로 결합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어떤 학자는 이것을 내적 단일성, 신비적 단일성, 불가분리의 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권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진정한 본을 보여주신 사도가 있다고 하면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갔으며, 주님처럼 말씀하였고, 주님과 같이 당신의 전 삶을 헌신할 수 있었고, 마지막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주님이 자기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14:10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빌1:20-21에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자신 안에 그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와 함께 죽었고,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되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의 남은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은 당신을 떠나가는 이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지 못하고 떠나가는 이들을 잡지 않았습니다.  쉽게 온 자들은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십니다.  가고 싶으면 지금이 좋은 기회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갈 때에 그들과 함께 어울려 떠나가면 별로 미안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떠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좀 보기 싫어질 수 있고,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우리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된다면 버스를 몇 차례 바꿔 타고 와야 해도 오시기 바라고, 내 영혼이 죽는다면 교회 문 앞에 살아도 다른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주님을 믿지, 교회를 믿는 것도 아니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신앙 생활하는 이곳, 우리교회에서 승부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신앙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은 의무병이 아니라, 지원병입니다.  신앙은 곧 결심입니다.  그런 결심을 통하여 성령은 능력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한 사람만 더 예를 든다고 하면 룻이라는 모압 여성입니다.  룻1:16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제자훈련의 사역반에서 어머니라는 말 대신 예수님이라고 넣어 자기의 결심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름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야 합니다.
“룻(성홍모)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예수님)를 떠나며 어머니(예수님)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예수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예수님)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이런 절대 각오의 신앙으로 주님을 따라가야겠습니다. 

  오는 9월 11일-13일에는 심령부흥회를 개최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올해의 열매를 거둘 수 있어야겠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은 결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확고할수록 보람이 있고, 가치 있는 삶, 위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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