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기쁨을 좇아 사는 삶 (삼하 6:1-15)

  • 잡초 잡초
  • 290
  • 0

첨부 1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새로 통일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열광적인 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까? 본문 14-15절과 그 후의 몇 몇 구절의 기록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선 본문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했습니다. 다윗이 힘을 다하여 춤을 췄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16절은 또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얼마나 정신없이 춤을 췄는지 그의 아내가 기가 막혀 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또 20절에 내려가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다윗이 왕의 체통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옷이 다 벗겨지도록 춤을 췄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옷이 다 벗겨질 정도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다른 사람들이 보고 어떻게 여길지 상관하지 않고 좋아한 일을 우리는 다른 어디에서 또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온 것이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열광적인 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가 어느 때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 왕이 죽은 후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2:1-4). 나머지 다른 지파들은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지만 그 후 신하들의 모반과 왕의 암살 등으로 정국이 혼미하고 불안정해지자 각 지파의 대표들이 함께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음으로써 다윗은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군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삼하 5:1-3).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삼하 5:5-16). 다윗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블레셋이 공격해왔으나 다윗은 이들을 물리치고 기세를 더욱 떨치게 되었습니다(삼하 5:17-25). 이제 다윗의 권위를 확정짓기 위해서 한 가지 남은 것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상징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군주로서의 결정적 위엄을 드러낼 수 있으며, 새 수도 예루살렘의 무게를 더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은 순조롭게 단 번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본문6-8절이 전하는 웃사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웃사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이라 하는 사람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거나 손상될까 두려워 수레를 몰던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를 그곳에서 치셔서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일은 거기서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웃사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군들 하나님의 궤가 떨어져 부서지거나 그 속에 든 하나님의 성물들이 쏟아질 것 같으면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 일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크게 잘못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셨다"고 했습니다. 웃사가 분명히 잘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웃사의 행동에 있어서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4장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을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집계할지니"(1-2) ... "고핫 자손이 회막 안의 지성물에 대하여 할 일은 이러하니라.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4-6) ...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15)"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은 레위 자손 중에서 고핫 자손들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에는 채를 꿰고 메어 옮기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절대로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게 한 과정에서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무리 삼만 명을 뽑아 모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데에 군사 3만 명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적당한 수의 고핫 자손들이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군사를 3만 명이나 동원한 것입니까?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을 안전하고 위엄을 갖춰서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쁘게 보면 나라 안팎으로 다윗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에는 채를 꿰고 메어 옮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궤이기 때문에 잘 모시려고 한 것이고 그래서 수레도 새것으로 준비하여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던 것 또한 하나님의 경고를 잊었거나 소홀히 한 데서 기인한 일이었음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있어서의 다윗의 잘못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역대상 13:1에 보면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했습니다. 그 일을 제사장들이나 레위 족속의 대표들과 의논하지 않고 군 지휘관들과 의논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도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이렇게 계획하고 진행시키는 데에 반대하거나 만류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군의 지휘관들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은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며 제사장들과 의논해야 할 일이라고 다윗에게 말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도 그 일은 자신들이 책임질 일이므로 군의 지휘관들과 의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언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제사장들이건 일반백성들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바르게 따라야겠다는 의식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었습니다. 웃사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신앙적 해이의 희생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이들에게는 큰 복이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큰 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에는 그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온갖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널 때나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에도 하나님의 궤는 놀라운 기적과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궤가 어떤 인간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거부하시곤 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세가 기울자 전세를 돌이켜 볼 셈으로 허겁지겁 하나님의 궤를 가져왔다가 이스라엘은 오히려 대패하고 궤를 이방 블레셋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궤를 차지했던 블레셋은 그 궤 때문에 큰 재앙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향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상징물은 이 땅에 너무나 많습니다. 어디 가나 즐비하게 늘어선 십자가를 보십시오. 교회종탑을 보십시오. 그러나 교회수가 아무리 많고 기독교인수가 아무리 많아져도 잘못 믿으면 사회와 나라에 복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믿음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화를 자초할 뿐입니다.

  다윗은 뒤늦게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에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따랐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15:2-3을 봅니다: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온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여호와의 궤를 그 마련한 곳으로 메어 올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또 그 12-15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하반절 이하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의 일에 있어서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기쁨이겠습니까? 매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명령대로, 규례대로 행할 때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을 많이 동원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 군사 삼만을 동원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예산을 많이 들인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길 새 수레를 만들기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처음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실행할 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의 기쁨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기쁨을 하나님의 기쁨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인간적인 사고, 판단, 계산, 방법을 좇으면 웃사의 비극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좇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좇아 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