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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의 회심(2) (행 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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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큼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세치 혀가 한 자 칼보다도 무섭다고 했고 칼에 죽은 사람보다 세치 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했겠습니까? 다 죽어 가던 사람이 말 한 마디에 힘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반면 건강하던 사람이 말 한 마디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말에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려해주는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사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저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첫째라면 저로 하여금 좋은 전도자로 세워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울의 곁에는 사울로 하여금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해줌으로 도왔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으로 회심한 사울로 하여금 힘을 얻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울을 찾아가 격려했던 아나니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가 이렇듯 귀한 격려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나니아는 성령의 감동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저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고꾸라졌을 때 사울로서는 아주 절망이었습니다. 물론 눈은 떴으나 볼 수가 없었던 것도 그 하나가 되겠지마는 그보다는 저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부심에 걸맞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들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지금 다마스쿠스로 왔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에 이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게 될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했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 자신의 삶이 오히려 반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머리가 텅 비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자기가 잘못 믿고 잘못 생각해서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면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생각할 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 수가 있을지 정말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라는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가 핍박자로 알려진 사울을 찾아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마스쿠스의 제자 아나니아가 하루는 기도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환상 가운데서 주님께서 “아나니아야”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당연히 아나니아는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란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아니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마스쿠스까지 온 사람을 오히려 예수의 제자인 아나니아보고 찾아가라니요? 거기다가 분명 자기가 알기론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친 사람인데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가지고 다마스쿠스에 와 있는 사람인데 그를 찾아가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더욱 그 사울이 예수의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주님이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아나니아는 자기를 불러서 사울에게로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아나니아는 곧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더니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였더니 사울은 즉시 육신의 눈과 영혼의 눈을 동시에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렇듯 원수 중에 원수 사울을 찾아가 주님의 명령대로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왔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한 사람의 격려자 아나니아로 인해 귀한 전도자가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막이 오르게 되었던 것이요 이 복음의 줄기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격려자 한 사람의 중보 기도자 아나니아를 세우신 하나님께 우리는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잠언 11장 11절은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순종한 한 사람의 축원이 성읍 정도가 아니라 온 세계를 진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이 이렇듯 귀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축복하기를 힘쓰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사람, 오히려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만 끼치고, 하나가 되게 하기 보다는 다투고 갈라지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찾아 오히려 주의 사랑으로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성읍이 진흥하고 성읍이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신 마태복음 18장 18절의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해롭게 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속에서 그로 하여금 이렇게 망가진 삶을 살게 만드는 악한 마귀를 예수의 이름으로 묶어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 안에 넘치도록 축복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격려하기를 쉬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 지치고 낙심해 있을 때 따뜻한 격려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던 지요?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너무도 부끄럽고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할 그런 입장에 있을 때, 오히려 “괜찮아, 자 힘을 내”하고 감싸 안아줄 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정말 그렇게 품어 준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 바쳐 보답하고픈 마음뿐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는 격려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견디다 못해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들을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저들로 하여금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심으로 단번에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도록 하신 다음 바닷가로 좇아 나온 제자들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먼저 불에 구운 고기를 주시면서 “자 먹자” 하시고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지? 그러니 이제부터 내 양을 치라”고 하심으로 저들에게 새 힘을 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이런 격려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앞장서서 수고하는 일꾼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바로 이런 격려자입니다. 그 한 마디 격려와 칭찬으로 인해 한 사람의 귀한 일군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위로해 주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명령에 즉시 순종했던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이렇듯 격려해주는 사람, 중보기도하며 축복해주는 사람 되심으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일군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울 역시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사울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 한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정반대였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담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기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면서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놀라서 기절할 뻔했습니다.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자기가 본 환상이 참말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아나니아였으니요. 그 아나니아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또 그가 손을 얹어 기도해 주는 순간 볼 수 없었던 자기의 눈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기가 사기꾼이요 신성모독죄를 저지르고 십자가에 마땅히 죽은 죄인으로만 알았던 그 예수가 참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성령으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오 구세주임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울은 예수가 참 구세주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아나니아에게 요청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힘을 얻게 됩니다. 계속해서 그는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이렇듯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의 감동하심을 따라 즉각적으로 세례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역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까? 이렇듯 우리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의 의심의 비늘이 벗겨지고, 염려의 비늘이 벗겨지고, 좌절의 비늘이 벗겨지고, 불신과 교만의 비늘이 벗겨져, 믿음으로 보게 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어, 겸손하고 온유한 심정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염려라고 하는 비늘이 우리 심령의 눈을 덮고 있습니까? 내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조용히 묵상하며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안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비늘이 우리 심령의 눈을 덮고 있습니까?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내가 주님을 알지 못해서, 주님을 속상하게 만들고 주님을 대적했던 나를, 어떻게 주님이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나를 위해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 죽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나를 주님이 먼저 찾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나 역시 미움과 원망을 그 사랑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 힘으로 됩니까? 안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주시도록, 오히려 그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축복하시면서 감사하십시오. 밉기에 더 축복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순종하십시오. 원망스럽기에 더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내 심령이 바뀌게 되고, 내 심령이 바뀌게 되니 내 삶이 바뀌게 되고, 내 삶이 바뀌게 되니 모든 주위 환경이 바뀌게 되고, 상대방도 변화되더란 말입니다. 성읍이 정직한 자의 축원으로 인하여 진흥된다고 하신 말씀대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축복하며 사랑으로 순종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순종하십시오. 내게 주시는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순종하십시오. 누가 생각나거든 축복하며 기도하십시오. 누가 염려스럽거든 더욱 축복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찾아서 격려하여 주십시오.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으로 가득한 말 한 마디가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을 세우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대적자 사울이 좋은 하나님의 전도자가 되듯이 몹쓸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되도록 하는 귀한 도구로서 우리 모두가 쓰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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