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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낡은 부대를 버리라.(눅 5:36~38,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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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 5:36-38)."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7-24절)"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은 에베소서 5장 24절에서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새사람을 입으라."고??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가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 것은 새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구체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Put away your former way of life) "새 사람을 입는 것"(To clothe yourselves with the new self)이라고 알려줍니다.

마치 본문의 누가복음 5장 38절 말씀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천국 백성으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헌 부대', '오래되고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넣으면 낡은 부대 때문에 새 술마저 버리게 됩니다. 본문에서 비유한 '오래된 부대는 바로 우리의 옛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헌 부대와 같은 옛 사람을 쫒는 구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십자가의 공로로 지난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고, 거듭나며, 법적으로는 의로워 지며, 가족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소속 적으로는 천국시민이 되므로 이미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후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먼저 예수님을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내 죄 값을 대신해 죽어주신 구세주이시므로 믿음으로 영접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예배드리시는 우리 대 부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 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옛 성품'이 남아 있어서 자꾸 '옛날로 돌아가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새 사람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믿음을 점검해야 하는데 나의 성품 가운데 옛 사람으로 돌아 간 부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 죄악 된 모습이나 불신자 데 행했던 구습이 있다면 옛사람의 모습을 청산하고 결단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옛 사람'은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옛 사람이란? 그 삶의 속성이 영혼이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생활 상태에서 떠나 육체가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삶 즉, 타락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옛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던 옛 인격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들의 부끄러운 옛 모습이고, 우리들의 과거의 생활방식이고, 불신자 때에 가졌던 우리들의 비뚤어진 가치관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중심, 공로 중심, 인간중심 위주, 학연과 지연과 혈연 위주로 살아왔던 삶, 자기중심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빨리 벗어야 할 육적인 소욕들은 옛 성품, 옛날 기질, 옛 기억들인데 마치 먼지나 헌옷처럼 훌훌 털고 벗어 던질 수가 있어야 새로운 삶을 살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청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새롭게 사는 삶의 그 다음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후 예배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벗어 버려야 할 헌 부대, 오래되고 낡은 부대와 같은 것들 즉, 청산하여야 할 옛 사람의 속성(본성)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옛 사람의 본성은 무엇이 있습니까? 본문에서 우리가 떠나야 할 옛 사람의 본성들 중 다섯 가지를 요약하므로 신앙의 경계를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옛 사람의 본성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째,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Walking in the futility of their mind)에서 떠나야 합니다.

본문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방향이 없다.', '목표가 없다.'는 말입니다. 목적을 상실해 버림을 의미합니다. 또한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아주 허무하고 마냥 잘 살아보려고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잘 살고 애쓰는지 의미가 없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애를 쓰고, 수고하는 지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존재 목적을 모르고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사업을 해도 결혼을 해도, 직장을 다녀도 공부를 해도 올바른 목적이 없이. 의미가 없이 애를 써 왔기에 결국 허망함에 빠져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생각하는 바를 마음에 담고, 그 마음의 생각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즉 마음과 생각과 행동은 늘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의 결과는 그 사람의 생각패턴(thinking pattern)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움가운데 사는 '옛 사람의 자아'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마음이 허망해져서 (futile,하찮은, 쓸데없는 - 이 단어는 '공허한', '비어 있는'의 뜻인 emptiness와 동의어 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롬 1:2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였고,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목적 없이 헛된 것에 욕망을 기울여 무익하고 공허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베드로후서 2장 17절에서 '마음이 허망해져서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이며,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두움만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소욕대로 살므로 하찮은 일들, 열매 없는 일들,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것 자체가 허망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기 전에는 다 이렇게 육적인 소욕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허망한 마음을 가지고 방향이 없는 삶, 목표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살아가는 방향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인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그런 믿음으로 사는 동안 얼마 안 되어 나도 모르게 또 다시 육체의 소욕과 욕심에 사로잡혀 '그런 존재목적이나 구원받은 성도로서 천성을 향해 가는 방향'이나 '선택받은 목표'를 잃어버리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쫒아 사는 '허망한 삶'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졌습니다.

특별히 현대의 특징이 이렇게 존재목적이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쉬운 그런 시대를 살다 보니 나도 세상에 동화되어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처럼 허망한 삶을 따라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헌 부대를 버리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성령을 쫒아 살지 않고, 진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삶을 살아왔던 옛 구습, 하나님을 믿기 전에 행하였던 죄악 된 삶,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옛 사람의 본성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둘째, 총명이 어두워진 것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에서 떠나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총명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총명, 그런 지혜에 어두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이나 삶의 경험에는 밝았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는 너무나도 무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마음은 불신으로 아예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되었고, 성경 말씀에 대해서도 감각을 잃었으며. 죄를 짖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양심이 화인 받아 마치 굳은살이 박인 마음처럼 되고 말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됨으로 진정한 참된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진리의 성경말씀을 통해 성령의 조명해 주심으로 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잠언 9:10절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었고, 그 분께 예배도 드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성경도 열심히 읽게 되었으며, 그 말씀 가운데서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렇지 못할 때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또다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므로 죄를 짓게 되었고 또 다시 세상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께는 어둡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이나 깨달음도 무디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양심의 가책마저 별로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마음이 되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은 '이런 총명인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나 완고함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헌 부대 즉, 떠나야 할 옛 사람의 본성은인 무지함에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지함이란? "아그노이안"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 짐'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총명이 어두워진 상태에 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 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성령의 감동이 아니며, 교회의 덕이 되지 않고, 신앙의 유익이 없다면 총명을 흐리게 하는 것이요, 사탄의 역사요, 정욕으로 빠지게 함으로 빨리 떠나야 합니다. 죄에서 떠나는 거룩한 결단으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은 총명이 가득한 성도들이 되시어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총명을 어둡게 하는 옛 사람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세 번째로, 마음이 굳어짐에서 떠나야 합니다.

육체의 소용대로 살면 심령이 굳어집니다. 이 굳어짐의 헬라어 'porosis' 즉, "완악함"은 '돌'을 의미하는 'poros'에서 파생된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능력들에 대하여 전혀 깨달음이나 감격 등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 마치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춤을 추기는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이런 무지와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과의 분리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생명을 태내에 갖고 있는 산모가 무지해서 아무런 조심성 없이 약을 복용한다거나, 태내 아기를 생각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음식을 마구 먹거나 심한 운동 등을 한 나머지, 태내에 있는 어린 생명이 결국은 '유산' 또는 '사산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엄마의 무지와 굳어진 마음 때문에 이런 잘못된 습관이 있었다면 임신 중 구습에서 떠나지 않으면 결국 어린 생명은 죽어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인간이 가장 비참하게 된 상태 것입니다. 탯줄이 끊어진 태아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빛이 차단된 곳에 있는 꽃나무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탯줄로부터 끊어진 태아. 빛이 차단된 꽃나무의 생명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생명은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입입니다.

바로 육체의 소욕대로 살므로 죄를 지은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빨리 돌이켜 회개의 열매를 맺음으로 옥토 밭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말씀을 듣고 나와 상관없이 여겨진다면 나의 영적 상태가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도덕적, 영적 무감각(Moral & Spiritual Numbness)에 떠나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말씀합니다. 19절에서 옛사람이 타락의 길로 접어든 과정이 마치 빛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은 모습임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인 욕심으로 살면 처음에는 '감각 마비증에 빠집니다(Lost sensitivity)'. 죄는 영적으로 나병과 같아서 '자신이 지금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이런 행동이 부끄러운 것인지, 추한 것인지, 전혀 깨닫지를 못합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을 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차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속도감각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을 쫒아 살면 이와 같게 됩니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술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십니다. 담배를 피우면 코메디언 '이주일'씨처럼 폐암에 걸려 사망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정욕적으로 살며, 간음하는 것과 도박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기회만 나면 그것을 계속 합니다. 바다이야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산을 하고,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져올 파멸과 심판이 분명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때부터 영적, 도덕적 무감각한 상태가 되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거듭되는 죄의 쓴 뿌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죄의 반복성에서 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토한 것을 또 먹어야 되겠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귀가하던 한 청년에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들고 온 '열 개의 병'을 내 보이며 청년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이 열 개의 병중에 단 한 개에만 독약이 들어 있고 나머지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네. 만약 자네가 꿀물이 들어있는 병을 고른다면 엄청난 돈을 주겠네." 청년은 이 사탄의 제의를 받아 들여, 병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마셨더니 너무도 맛있는 꿀물이었습니다. "와! 살았다. 자 어서 약속한 돈을 달라." 의기양양한 청년에게 사탄은 약속대로 많은 돈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언제라도 돈이 필요하거든 날 찾아오게."

청년은 쉽게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술과 도박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술과 여자와 도박으로 인해 몸은 극도로 나빠졌고, 가정도 모두가 파탄이 났습니다. 그런 중에 점점 나이만 먹어갔습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스스럼없이 사탄을 찾아가서 게임을 하고 돈을 가져왔습니다. 어느덧 청년은 노인이 되었고, 이제 사탄의 손에 있는 병은 두 개만 남았습니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두 개의 병중에 50%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약이 아니라 그것 역시 꿀물이었습니다. "내가 이겼어. 마지막까지 내가 이긴 거야. 자, 어서 마지막으로 네가 가진 돈을 모두 내놔라." 사탄을 향해 마치 '개선장군'처럼 소리를 쳤습니다.

기뻐하는 그 노인의 모습을 비웃듯이 지켜보던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병을 자신이 들이켰습니다. "자 이래도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애당초 몇 개의 병중에 독약이란 건 있지도 않았어. 하지만 너는 '꿀물이라는 독약으로 인해 이미 죽어가고 있어.' 내가 준 턱없이 많은 돈으로 인해 너의 인생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어! 나는 돈으로 네 인생을 산거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젊은 청년의 타락은 조금 조금씩 이어져 왔기에 전혀 자신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죄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무서운 세력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옛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한, 이처럼 죄에 사로잡힌 육적인 생활을 청산하지 아니하면 마귀와 사탄은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으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접근해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 우리들 자신을 방탕한 생활로 내몰아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살도록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무감각에 빠져 급기야는 양심과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멀고, 눈멀게 만들어 타락의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영적 무감각에 빠지도록 하는 육적인 삶에서 떠나지 않으면 곧 파멸로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 옛 구습, 옛 성품을 과감하게 헌 부대인 줄 알고 버리는 결단을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섯 번째는 '방임'을 버려야 합니다.

죄로 파괴된 영혼을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날마다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방임"을 영어로 말하면 '포기상태(Give up),'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 우리는 '인간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하면 구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의지함으로 우리의 인생과 모든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은 온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주셔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목숨, 생명, 피 값으로 죄악 된 저와 우리 모두를 대속의 핏 값으로 구원하시고 대속의 핏 값으로 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신한 생명, 값어치인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천하보다 귀하고 천사보다 존귀하고 귀한 존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비싼 보혈의 댓가로 구원 받았기에 이 귀한 영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에 세상의 욕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마음이 허망하여져서 방향감각을 잃었고, 총명이 어두워져서 무지하게 되고 완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욕심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의 삶은 한 마디로 '욕심을 좇아 사는 삶'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 이 세상 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다 못 박아 버렸습니다.' 더 이상 욕심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다른 면의 거룩한 욕심들이 생겨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까?, 어떻게 하면 남을 더 섬길까?'하는 거룩한 욕심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욕심도 살아가면서 점차 약해지고, 오히려 세상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때가 얼마나 많으냐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은 '이런 세상에 속한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새 술은 낡고, 헌 부대에 넣으면 결국 '부대도 새 술도 버려지게 됩니다.' 오래되고 낡은 헌 부대는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우리의 낡은 부대는 예수님께서 버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낡은 것에 집착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옛 사람에서 떠나야 합니다. 옛 성품과 심지어 습관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은 옛 사람에게 속한 '목표가 허망한 마음', '하나님을 아는 총명이 어두워짐'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함'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능력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마음의 굳어짐'에서 '무엇보다 죄에 대한 영적 무감각한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과 삶을 포기하는 방임과 하나님보다 더 세상을 더 좋아하고, 좇아가는 세상적인 모든 욕심이 가득하게 찬 이런 "옛 사람을 벗어 버림으로"  모든 성도 여러분들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값비싼 구원을 상실하지 않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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