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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망과 섬김 (마 2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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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노상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당신님께서 받으실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17).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18-19) 예수님은 받으실 수난에 대해서 이미 두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에 비해 이번 예고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은 제자들 중에 배반이 있을 것을 암시합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죽이기로 결안만 할 것이고, 사형 집행권이 있는 로마 권력자들에게 다시 넘겨줄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인 그들은 예수님을 능욕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당신님께 닥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당함과 고난과 죽음이 동영상을 보듯 분명했습니다. 이처럼 고난과 죽음을 뻔히 알고도 계속 전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갈등하고 주저하고 회피하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확고하게 아셨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부활의 영광도 있음을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며, 그 분의 계획에 끝까지 헌신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미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때에 세베데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 곧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청탁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 이것은 자식의 보다 높은 지위와 특권을 바라는 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머니는 얼마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장성한 청년이라도 어머니의 눈에는 아이처럼 보이기에,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하고자 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기도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케 만듭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불편케 만들고, 제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제 마음도 불편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주님의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야망은, 고난과 죽음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하거나 믿지 못하게 한 듯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새겨듣고 묵상했더라면, 도무지 드릴 수 없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을 데리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은, 왠지 코흘리개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철딱서니 없는 아낙같이 여겨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철없는 제자들은 “할 수 있나이다”고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22).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탐내었습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에게 그 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았는데, 최근에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책망도 받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온 셈입니다. 그들은 좌우편 자리만 보장해준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할 작정이었습니다. 헌신의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강도들이 못 박혔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진짜 검을 사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철부지 같은 그들은 예수님은 잘 달래야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 그들도 결국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요한은 가장 나중까지 살아남아서 누구 보다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국에서의 지위는 그들의 헌신한 정도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가 자신의 야심에 근거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기보다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4) 드러나게 청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에도 높아지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격에 따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속으로 숨기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공통된 것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회에서도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헌신과 충성을 불러왔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헌신의 각오는 진지했으나, 그 헌신에는 아직까지 주님의 영광 보다는 자기욕망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세속적인 그들의 가치관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치관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교육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5-27)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할지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마음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정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간교한 수를 쓰거나 분을 내며 싸우는 법이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NIV, must) ‘섬김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는 자가 큰 자로 인정받는 제자 공동체, 섬겨보지 않은 자가 으뜸이 된 제자 공동체는 세속 제국과 같을 뿐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겸손이 미덕이 아니라 강한 것이 미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함은 절대적인 권력을 얼마나 부릴 수 있느냐로 확인되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 권좌를 차지하려는 욕망 때문에 서로를 향해 서로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절대 권좌에 도전하고, 절대권좌를 차지하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밀나노 칙령(312년)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 전, 코모두스(Comodus, 180-192) 황제부터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 308-313) 황제까지 약 100여 년 동안 32명의 황제들이 교체되었습니다. 그 중 3명만 병사했고, 4명 전사, 1명 처형, 1명 자살, 그리고 나머지 23명은 살해당했습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또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전형적인 세상의 모습이었고, 세상 가치관의 결국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밟히는 자는 천한 자이며, 밟는 자가 높은 자로 인식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때문에 제자들의 공동체마저 섬기는 자는 낮은 자로, 섬김 받는 자는 높은 자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셨을 때는, 그것으로 교회 공동체를 잘 섬기고 세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은사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면서 우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를 따라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은 스승은 제자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하는 태도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스승은 제자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하는 태도가 아니라 섬기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다 큰 제자들이 코흘리개처럼 유치하게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꾸짖고 야단치기 보다는 조용히 불러서 조근 조근 설명해주셨습니다. 십자가 말씀에 귀를 막고 받아들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실제 생활 속에서 군림하지 않고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허물 많은 제자들을 다루시는 스승의 모습’ 속에서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비만 오늘의 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섬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보통 섬기라고 하면 어느 정도까지, 언제까지 섬겨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죽기까지 섬기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불러서 꾸짖고 야단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 성질을 죽이기보다 남을 죽이는 것이며,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자존심과, 자기 성질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길이기 때문에 그 좁고 협착한 길을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한 섬김이 어느 한 순간에, 어느 정도만 하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섬김’은 주님의 백성 된 자가 가져야 할 마땅한 성품입니다. 일생토록 섬기지 못함에 대해서는 회개하며, 보다 잘 섬길 수 있도록 소망하며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주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에게 섬김의 성품이 풍성하게 열매 맺히기를 간구합니다.

29-34절은 여리고의 소경을 섬기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 일행이 여리고를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29).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지르며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 역시나 섬기는 자세가 없는 무리들은 비천한 그들을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1)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지 물으셨고, 소경들은 눈 뜨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습니다(32-33).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고 저희의 눈을 만져 곧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예수를 좇았습니다(34).

예수님의 섬김은 주님을 바르게 보고 주님을 좇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자들은 야망에 눈이 멀어 고난 받으실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을 고치신 주님은 그들을 섬겨서 마침내 영적 눈을 열고 주님을 바르게 좇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바르게 좇도록 인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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