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각을 바꿔라(2) (민 13:30-33)

  • 잡초 잡초
  • 410
  • 0

첨부 1


  가나안을 정탐할 때, 부정적인 10명은, 가나안에서 겪을 일들을 미리 과장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두려워했다. 불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적 특징은, 행복을 두려워한다.

  미래에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과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불안이다. 불안심리를 느끼는 사람은, 바라고 기다리던 성공과 행복이, 현실로 다가오면 두려움에 빠진다. 그래서 행복한 순간이 두려워서, 그 순간을 피하려 한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즐거운 후에 불행한 일이 닥친다는 생각 때문에, 한 순간도 즐거워하지 못하고, 힘든 쪽을 택한다. 이스라엘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다. 이제는 성공과 행복의 길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두려움에 빠졌다. 불행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인데, 불행으로 과대 포장함으로써, 행복을 걷어 차버렸다. 불안심리가 있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좋은 상태, 좋은 말, 좋은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예였다. 행복한 순간은 잠시뿐, 곧 다른 어려움이 닥쳐왔다.

  그래서 현실이 너무 좋으면 ‘이 행복은 내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내 인생은 항상 잿빛이야!,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믿을 수 없어,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자신의 나쁜 점을 먼저 말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일어날 수 있는 나쁜 가능성까지 과장하여 말하면서, 자신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기대했다가 혹시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아예 실패를 선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의 불안한 삶을 살아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가운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삶이었고, 닥쳐오는 문제들로 인하여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좋은 가나안을 보고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성공은 일시적이며, 자신들은 성공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믿을 수 없는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말했다. 또 가나안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가나안 족속은 거인이라고 하며, 나쁜 실패의 가능성을 모두 말했다. 그들은 실패하게 될까봐 두려워서, 아예 실패를 선택했다.

1. 불안심리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

(1) 항상 갈등을 원한다. 그들은 고통, 혼란, 불편, 아픔, 슬픔, 갈등, 불행 등과 같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단어와, 현실에 대해 익숙해 있다. 평안, 안전, 사랑, 즐거움, 유쾌함의 단어는, 불가능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잘되면 오히려 불안하고,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안도의 숨을 쉰다.

  이들의 언어는 “우리는 그들을 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가나안 땅은 우리를 삼키는 땅이다.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 애굽 땅에서 있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의 처자는 사로잡히고, 칼로 망하게 되니,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부정적인 언어에 익숙하다.

(2)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항상 원망한다.

자신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원망할 대상을 가지려고 한다.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 부모님에, 자녀, 형제, 타인에게 둔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행복을 외면하는 사람은 자신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도 아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리더였던 모세를 원망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원망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기 원하고, 성공하기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불안이, 스스로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실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하고 소리질렀다.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쥐어박아도, 계속 소리를 치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때 그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났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소경이 대답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46-52). 왜 당연한 질문을 하셨을까?

  이런 당연한 질문과 대답이,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셨다. 병자들이 낫기를 원하지, 병자로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도, 꼭 물으셨다. 인간의 내면에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아프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질까 두려워한다.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 자기 연민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보다는, 성공하면 더 큰 어두움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지금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불안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런 내면에, 감추어진 심리를 알고 계셨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계속 실패한다면, 내 안에 나를 방해하는 불안은 없는지,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한다. ‘나는 진정 행복하기 원하는가?, 나는 진정 성공하기 원하는가, 내 행복과 성공을 내가 스스로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청년들에게 꿈을 가지고 성공하라고 했을 때, 어떤 청년은 자신은 더 이상 꿈을 가지고 싶지도, 성공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더 큰 요구를 하실 것 같기에, 그것이 두렵다고 했다. 이 청년처럼 자신의 행복이나 성공, 성장을 스스로 방해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저는 무자하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며, 행복을 포기하려고 했다(창15:2-3). 불안에 대한 치료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과장성, 즉 문제를 과대평가 하는 부분을 찾아서 축소해야 한다.

  불안에 빠진 사람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부정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부정적 사건을, 훨씬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2. 부정적 과장을 바꿔라. 어떻게 바꿔야 하나?

어떤 사건의 결과를 실제보다, 더 나쁘게 확대 해석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여,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극히 위험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끝장난, 끔찍한’과 같은 말을 잘 사용한다.

(1)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라.

  과연 그 일이 정말 그렇게 끔찍하고, 그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지를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라.  인간이 평생 살면서, 벼락 맞아 죽을 확률은, 600만 분의 1일이고, 개에 물려 죽을 확률은 14만 분의 1이다. 침대에서 떨어져 죽을 확률은, 200만 분의 1이다.

  비행기가 떨어져 죽을 확률은 75만 분의 1이다.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은 3만 분의 1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분은, 벼락 맞아 죽을까봐, 아파트 안에 있어도 번개만 번쩍이면, 두려워 벌벌 떨다가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도 있다. 이런 확률 법칙을 생각해보고, 근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근심 걱정 중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 40%,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 30%,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22%,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 4%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걱정이 4%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염려에 대하여 (눅12:25) “너희 중에 누구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다. 밤새도록 돈 걱정을 해도, 단돈 천 원도 생기지 않는다. 이 물음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어떤 문제로 염려할 때, 스스로에게 어떻게 질문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골치 아파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지?,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화가 나 있는데, 화를 낸다고 내게 무슨 도움이 되지? 내가 지금 그 문제 때문에 불안해지는데, 나아게 무슨 유익이 되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이렇게 대답하게 된다. “화를 내고 걱정해봐야 나만 손해지”

  “그렇다면 쓸데없이, 속상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 나만 손해지”라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늘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며 산다.  우리의 질문이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떤 대답이냐에 따라, 삶의 가치와 행복이 정해진다.

(2) 두려움의 대상을 피하려고만 하지말고, 두려움의 대상과 직면하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 과장을 축소시킴을 넘어서, 긍정적 사고를 확대시키는 상상을 하도록 하신다.
“내 종을 후사로 삼겠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밖으로 이끌어 내시고, 하늘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보아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별을 보아라.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을 상상하라(창15:5)고 하셨다. 부정을 축소시키기 보다, 긍정을 확대시키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늘의 무수한 별 하나하나에 자신의 자손인 아이들이 방글방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살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부정적 현실을, 줄줄이 넘쳐나는 후손에 대한 긍정적인 현실로 바꿨다. 하나님의 과장성 상상기법은, 자녀의 복과 함께 땅에 대한 축복에도 적용되었다. (창13:14-17) 아브라함아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다 주마.

  네 자손은 땅의 티끌같이, 셀 수 없을 만큼 줄 테니, 일어나 걸어라. 네가 밟은 땅을 다 주겠다, 다 늙도록 한 명의 자녀도 없는 사람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세상의 티끌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니, 정말 지나친 과장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과장적인 상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엄청난 축복의 사람이라는 꿈을 꿔야 한다.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꿈을 꿔라. 사업이 잘 되는 꿈을 꿔라. 공부를 잘하는 꿈을 꿔라.

(3) 자신에게 긍정적인 질문을 던져라.

생각은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다. 질문은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한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가?’에 대해 살펴 보라.

  우울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한다. “이것은 해서 무엇하나? 다 부질 없는 짓 아닌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꼬이지?”, “왜 하필이면 나일까?”

  자신이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다 틀렸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잖아?, 내가 하는 일은 항상 다 이 꼴이었지, 또 실패하지 않을까?, 나는 왜 늘 재수가 없지?”라고 질문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두뇌는 긍정적인 질문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부정적인 질문에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왜 이렇게 실패만 하지?”라는 질문에는, “내가 멍청해서 그렇지,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야, 나는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는 인간이야?”라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타인에 관한 질문에서도 “저 사람은 왜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지? 왜 저 사람은 내게 불친절하지?”라고 질문하면, “저 인간이 몰염치한 인간이기 때문이지, 내가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이지”라는 좋지 못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질문은 우리의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우리의 의식은 우울에 초점을 맞춰, 우울해지는 이유를 찾아내고, 더 우울의 늪에 점점 깊어져 간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즐거웠던 기억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행복을 느낄까” 질문하면, 즐겁고 아름다웠던 추억과, 지금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지기에 행복해진다. 예수님의 질문은, 잘못된 우리 사고를 바꾸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을 연구해 보라.

  (마5:13)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맞아요, 저는 세상의 모래가 아니라 소금이지요, 제 맛이 있는 삶을 살아야겠지요.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밥상도 없겠지요, 미워도 사랑해야겠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을 바꾸어서, 질문하라.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한 자는커녕, 염려로는 1mm의 가능성도 없지요. 오히려 몸을 해칠 뿐이니, 염려를 ‘끝’내야 겠지요. 주님은 긍정적인 면을 과장하셨다. 긍정적인 면은 과장해도, 부정적인 면은 과장하지 말자.

3. 말을 아름답게 바꿔라.

말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므로, 말을 아름답게 하라. (민14:2) 이스라엘 백성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참지 못하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그들을, 참을 수 없는 극한 감정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현재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감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말은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만 아니라, 감정의 크기도 담을 수 있다.

  “네가 정말 싫다, 이 일은 정말 끔찍해서 견딜 수 없다. 정말 미치겠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강렬하게 사로잡히게 되고, 그 말이 행동하는 방식까지 정해버리게 된다.

  이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게 되어서, 땅을 치며 통곡하게 되었고, 돌을 드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민14:10).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란 극단적인 말 대신, “좀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했다면, 감정과 행동은 바뀌었다.

  감정을 표현할 때, 긍정적인 언어를 선택하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긍정적이 되고, 부정적인 언어를 선택하면, 생각과 감정 행동이 부정적이 된다.

  (막9:14-)에 벙어리 되고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해져가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갔지만, 치료가 되지 않아서, 낙심하였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아들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실패의 경험만 쌓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막9:22)라고 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질병보다 먼저 말을 고쳐주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

  ‘무엇을 할 수 있으면’을 ‘못할 일이 없다’로 바꿔 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할 때, 그는 낙망과 무기력 감에 맥이 빠져 있었고, 아들이 치료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때 그의 말을 고쳐주시자, 정신이 번쩍 나서 소리질렀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말을 바꾸어주심으로, 삶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주셨고,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치유해주셨다. 말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까지, 즉각적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셨다.

  감정에 관련된 단어는 긍정적인 단어보다, 부정적인 단어가 훨씬 많고, 그 가운데서도 극단적인 단어를 쓸 때가 많다. 사람들은 감정의 극단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같은 감정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행동방식이 달라진다.

  화날 때 “화가 나서 돌아버리겠다”고 말하면,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지만, “화낼 가치도 없어”라거나 “조금 화가 나는데”라고 말하면, 극단적인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울해 죽겠어”가 아니라, “조금 기분이 가라앉아”라고 말하면, 훨씬 감정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이 격해질수록, “조금, 약간, 별로”라는 말을 넣어 말하면, 격한 감정을 피할 수 있다. 좀 더 즐겁게 살려면,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말 대신, 힘을 주는 새 단어를 찾아 바꿔야 한다.

  감정은 외부 조건 때문에 생기지 않고, 자기 자신이 감정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한 감정을 느끼려면, 행복한 일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자신의 감정에서 나타난다. 기분 좋은 상황은 자기 자신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어떤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일하실 때, 하나님께서 먼저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점검하신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나님 중심의 생각으로 바꾸도록 훈련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는 과정이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생각을 바꾸시고, 감정을 바꾸시고, 행동도 바꾸신다. 그리고 삶도 바꾸신다. 생각을 바꿈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시기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