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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붙잡아야합니다 (롬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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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붙잡아야합니다 (본문: 롬 5:1-8)
 
갑자기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구절은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지금은 대부분 강해설교를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주제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중 무엇을 설교할지 묵상하다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와 맞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면 그 성경구절을 찾느라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는 주석성경의 뒷면에 단어가 들어간 구절들을 찾을 수 있도록 색인이 있는데 그것을 참고로 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정확한 단어를 알고 많이 나오는 구절일 때는 가능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찾다 찾다 결국은 그 구절 찾기를 포기했던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게 찾을까요? 물론 이제는 그 고생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앞에 있으면 성경프로그램이나, 인터넷의 싸이트에 들어가서 누르면 바로 제가 생각난 단어가 들어있는 모든 성경구절을 순식간에 찾아줍니다.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몰라서 찾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좋은걸 사용하지 않는 분은 모르는 것이지요.

은혜를 붙잡아야합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잡아야하지 내가 잡지 않으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잡지 않으면 제일 나쁜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할 때 한쪽 손에는 모든 암을 치료해주는 약이 있고, 다른 쪽 손에는 암을 오히려 더 번지게 하는 약이 있다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환자에게는 어떤 것이 좋은 것입니까? 물론 치료하는 약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환자가 둘 다 먹지 않았다면 그 환자에게 있어 그 두 약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둘 다 똑같습니다. 그 환자에게는 그 두 약은 어차피 똑같은 것입니다.

은혜는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붙잡지 않고 있습니다. 은혜는 왜 좋습니까?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현인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은 고통이라 말하였습니다. 고통스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정신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죽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주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아주 놀라운 일을 하셔서 우리에게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나, 스스로에게 조차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나를 높고 높으신 그 분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 은혜를 우리가 붙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가득한 세상(늘 불평만 하는 사람들)

이 땅은 죄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또한 은혜로 가득합니다. 죄만 있었다면 이 땅은 벌써 멸망했을 것입니다. 죄는 파괴합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인간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이어져 오면서 그 죄에 의해 파괴가 더 쌓여 멸망했어야 하는데 여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의사들은 왜 병이 생겼는지는 안다고 합니다. 그것도 적은 퍼센트이지만 하여간 병의 원인을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병이 생기지 않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신과의사도 어떤 사람이 왜 정신병에 걸렸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사람은 왜 정신병에 걸렸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죄는 이 세상을 벌써 멸망시키고도 남음이 있는데 왜 이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인내하시며 그 속에서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죄입니까? 은혜입니까?

고등학교 때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닌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귀던 여인하고 헤어지면서 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인을 뺐어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잠시 시를 읽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교회를 접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렸으므로 그도 하나님을 버린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태풍으로 인해 아주 큰 파도가 치는 날 그 사람은 부두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큰 파도에 맞섰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파도에 휩싸였겠지요. 역시 큰 파도는 그를 덮쳤습니다. 큰 파도에 휩쓸려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순간 다시 한 번 파도가 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몸은 그 파도에 의해 부두바닥에 다시 내팽겨 쳐졌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그것이 행운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하나님에 대항하여 욕하고 세상이 더럽고 몹쓸 곳이라고 욕을 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그저 행운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심하여 그는 결국 정신병 증세가 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니 우리들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노력으로 되었거나 아니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많은 실명의 위기도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였습니까?

어떤 분은 참 좋은 사람인데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윗분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이중적인 성격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실족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인생을 살면서 다른 신앙이 좋은 사람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실족한 사람은 사람에 의해 풀려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사람에게 실족은 하면서 사람에게 은혜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많이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다가 은혜를 붙잡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에 우지끼 노부로라는 한 여고생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의 몸은 팔다리만 잘리고 몸은 살게 되었습니다. 그 여고생은 너무 절망스러웠습니다. 온 몸이 멀정할 때도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 했는데 사지가 절단되었으니 그녀는 기회만 되면 죽을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그 여고생이 병원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책 한권을 씁니다. 그 책 제목이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은혜를 알기 전 여러 환경 때문에 인생은 절망이었지만 은혜를 알게 되자 비교할 수도 없는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황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이 열리면 은혜가 보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요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곧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가자고 하면 조금 더 착해지고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그 마음속에는 교회는 경건하고 거룩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교회는 착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병원에 건강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 가는 곳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을 고치고 병원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교회에 착해지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사랑은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방법은 우리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 우리의 가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만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술담배를 아무리 많이 하고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죄 중에 있다 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혼자 풀어서는 안 됩니다. 풀수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와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은혜를 만나면 풀릴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여기에서 구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구해야 할 많은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구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은혜를 붙잡는 믿음입니다. 은혜를 아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많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욕심으로 구하는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좋아 보이는 것도 구해도 주지 않으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꼭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진실하게 구하면 그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믿음은 어떤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가장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놀라운 은총이여! 나같이 타락한 자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리시는 다정한 음성! 나는 버린 자식, 그러나 지금은 집을 찾았네. 눈 뜬 장님이었으나 지금은 보이네.  가시밭길 쑥넝쿨 다 지나서 나 이제 여기왔네 이토록 멀리까지 나를 이끌어 고이 인도하신 은총이여 이 몸을 찬국으로 이끌어 주시리”은혜에 대한 처음 반응은 놀라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게 되면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내 옆에 있던 은총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죄만 보면서 불평하던 일에 놀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붙잡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과 만나 우리 인생 안에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소망합니다. 그 꽃은 바로 은혜의 꽃입니다. 은혜로 인해 피는 꽃, 은혜를 알 때 피는 꽃, 은혜를 가지고 사는 꽃, 은혜의 행복의 꽃입니다. 은혜를 붙잡아 그 꽃을 피우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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