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포도나무 (요 15:1-10)

  • 잡초 잡초
  • 410
  • 0

첨부 1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 한 마리가 포도밭에 들어가기 위해 울타리 아래서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울타리의 틈이 너무 좁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여우는 자기 몸을 울타리 틈의 크기에 맞추기로 하고 사흘 동안 굶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틈새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포도밭으로 들어간 여우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는 맛있는 포도를 실컷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밖으로 빠져 나오려니 배가 불러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여우는 다시 사흘을 굶어 몸을 홀쭉하게 만든 후에 간신히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허탈해진 여우가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배고프기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다를 바가 없군’” 그러면서 결론에서 탈무드는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사람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를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자연은 더할 나위 없는 교훈의 현장이었고, 유대 땅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포도원, 포도나무는 더 귀하게 배우는 곳으로 늘 인식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아울러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신앙을 배웁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속해서 성경의 자연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무화과나무에 이어 오늘은 ‘포도나무’입니다. 성경은 포도나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포도나무를 생각하면 우리가 늘 마음에 담고,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2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첫째는 관계입니다. 포도나무는 무화과나무와 함께 팔레스타인 땅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포도나무와 관련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포도나무와 관련하여 가장 귀한 의미를 전하는 말씀이 바로 본문인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밀스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우선적인 교훈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 우리 성도들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나무, 농부, 가지, 이 모두는 한마디로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우선적으로 알려주려는 것이 관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뗄 수 없는 관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를 뗄 수 없고,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인간의 관계는 수없이 맺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냥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는 원수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미움과 갈등과 싸움의 관계로 바뀝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고,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번 관계를 맺으면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갑니다. 주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이 후회 없이 우리를 부르시어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또한, 이 관계의 특징은 유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유기적’이란 것은 ‘많은 조직(組織)이나 요소(要素) 등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서로 긴밀(緊密)히 연관(聯關)되어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유기적인 관계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몸의 구조입니다. 우리 몸은 많은 조직과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각각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몸의 지체 중에 어느 한가지도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그 지체가 따로 떨어져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유기적 관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서로 유기적으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내가 주님께 붙어 있어야 살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반복하여 강조하며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뗄 수 없는 관계, 유기적인 관계,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진 것입니다. 한번 맺어진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살수 있듯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진정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신분’과 밀접한 연결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관계는 신분을 의미합니다. 내가 주님과 유기적,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요, 왕자요, 공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강력한 특권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전에 우리는 세상이고, 어두움이고, 사탄이고,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서의 귀한 신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요, 사랑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이런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과 나와의 이런 관계는 신분을 넘어, 이젠 내가 주안에서 누리는 권리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왕이 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영원토록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자요, 왕이 되시어 그들을 광야 40년 동안 책임지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굶어서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었지 외부의 침략에 의해 죽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책임지셨고, 모든 것을 풍성하게, 아름답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권리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문제와 난관을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결국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 천국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늘 이런 은혜 속에 삽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가 심령에 새겨져야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말라...” (사43:1-4)

  하나님은 관계와 신분과 권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도와주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큰 은혜와 축복 속에 내가 살고 있음을 감사하며 주님을 굳건하게 붙잡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과실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유독 ‘과실’을 많이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2절에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하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4절, 5절, 8절에 계속해서 과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있으면 가지인 우리는 과실을 맺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참된 제자의 증거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포도나무를 통해 과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는 ‘관계’와 함께 ‘과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포도나무를 통해 배우는 진리입니다.

  과실은 곧 열매를 말하는데, 열매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주에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말씀드렸습니다.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와 같이 모든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열매와 과실이 빠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에서 열매는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열매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열매가 나타나고, 결국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열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열매로 신앙을 알고, 열매로 나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곧 신앙입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곧 우리 신앙의 수준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관계가 신앙의 신분이라면 과실은 신앙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수준이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왕자와 공주의 신분으로 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따라 우리의 수준이 높아지고, 품격이 달라지고, 신분에 맞는 행동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아무리 부모의 기쁨이고, 자랑이어도 자라지 못하는 것을 기뻐할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얻은 기쁨과 함께 이제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더욱 기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은 것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기쁨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자라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이제 신분의 변화에서 수준의 변화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린도서와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11)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3-15)

  더 중요한 것은 과실이 이처럼 수준과 관련이 있고, 그것이 우리 삶에 책임과 의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권리와 축복이라면, 과실은 책임과 의무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생활이지만, 아울러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뒤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은혜는 은혜의 합당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과실로, 신분은 수준으로, 권리는 의무로 이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균형이요 질서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관계가 중요한 만큼 과실이 중요하고, 신분이 있는 만큼 수준이 뒤따라야 하고, 권리를 누리는 만큼 의무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 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은 프랑스 말인데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노블레스’와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오블리제’를 합한 말로서,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사상이 처음 시작된 것은 로마시대였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그들이 고귀한 신분을 권리로 누리는 만큼 신분에 맞는 사회적인 의무를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가 세계의 최대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쇠퇴할 때 그 원인은 다른 것보다도 귀족들이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진단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 사상이 오래 동안 서구 유럽사회를 지배하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영국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귀족, 지도층 자제가 입학하는 이튼 칼리지 졸업생 가운데 무려 2,000여명이 1,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군인가운데 하버드, 예일대학의 학생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철강 왕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에서부터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갑부 빌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 부자들의 사회를 향한 자선 기부문화도 바로 이런 전통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노블레스’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고, 고귀한 신분을 주셨으며, 놀라운 축복과 권리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거룩한 ‘오블리제’가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 삶에 과실이 있어야 하고,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품격이 달라야 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고귀한 신분에 맞는 거룩한 의무와 책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의 삶이요, 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주시는 귀한 교훈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는 관계, 신분, 권리가 생각나고, 아울러 과실, 수준, 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귀한 ‘노블레스’로서 이제 거룩한 ‘오블리제’의 삶을 향해 한 주간도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