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기도문 강해(9)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 6:9-13)..

  • 잡초 잡초
  • 849
  • 0

첨부 1


주기도문 강해(9)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간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하나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은 곧 악에 빠지는 것이고,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은 곧 시험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하기에 두 문장은 같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당하는 주체자의 입장에서 본 의미입니다. 이는 ‘유혹’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악’은 시험에 들게 만드는 원인이나 세력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로 이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신 까닭은 그만큼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얼마나 비굴해지는지 모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아주 쉽게 진리를 버리고 맙니다. 우리 육신이라는 것은 조그만 바이러스의 침입에도 금새 쓰러지고 맙니다. 한 마디 말에도 쉽게 마음 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입니다. 단순한 말 한마디 때문에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그 다음날 아침이면 실의에 빠져 절망하고 포기하려는 마음이 가득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야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연약함이 도덕과 윤리와 관련될 때는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이 되기도 합니다. 악의 유혹은 달콤합니다. 정욕의 유혹에 빠져 외도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져 거짓과 속임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정말 순간의 문제입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악의 유혹에 많이 노출되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지 내가 더 본질적으로 선하다 악하다 하는 것은 정말 오십보백보로 차이가 없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우리 보다 악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 살아서 악의 유혹들에 더 노출이 되어 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그들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실제 그렇게 저지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악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드러난 죄인이고,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누가 하나 잘못을 범하면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왕따 시키는 것은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자기는 잘못이 없고 의인인 채 합니다. 우리는 그럴 때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고, 자기도 동일한 환경에 있었다면 저런 악을 행할 수도 있겠다고 하며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또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에 빠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오늘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와 같은 간구입니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0-41) 우리들도 제자들처럼 잠들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기도 안 하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는 얼마나 시험이 많고 유혹이 많습니까?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니 스스로 견딜 힘이 있는 모양입니다.

주님의 시험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주님은 금식하시면서 공생애 기간 동안 받을 가장 중요한 시험 세 가지를 미리 받으셨습니다. 이 시험들을 기도로 미리 이기신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굶주린 예수님에게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먹는 것이 먼저냐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냐는 시험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문제는 먹는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양심을 팔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합니다. 부요하게 살기 위해 인생의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다 뒷전으로 미루어 놓거나 포기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두 번째 시험은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시험이 명예의 시험이라 하지만 저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시험이라 생각합니다.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받아 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 하고 이번에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며 위기의 순간에 항상 도우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서도 추호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설사 죽어 음부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자신을 건지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때도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하시며 사단을 물리칩니다. 이 시험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사단에게 넘어간 천하만국의 권세를 되찾으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를 되찾는 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한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사단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떤 인간적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선한 목적은 선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 가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가장 유혹이 되었던 문제들입니다. 무리들은 떡만 보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메시야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야 천하의 모든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대한 문제로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유혹에서 이기신 힘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습니까? 원래 하나님이시니까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고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렇다면 그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이 모든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이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하며 기도하라고 명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유혹들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주님은 우리처럼 똑같이 연약함을 경험하셨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기도는 저축이 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를 쌓아 놓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니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과 위험과 시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우리 자녀들이 그 기도의 덕을 볼 것입니다. 정말 위기의 순간에 이 기도가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확히 적을 알고 우리 기도의 목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의 근원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둘째는 인간이 함께 살며 사회에 만들어 놓은 구조악이며, 셋째는 유혹자 사단입니다. 지금 자기를 시험하는 것이 이 셋 중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우리 기도가 효과적이 됩니다.

먼저는 우리 속에 있는 죄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죄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안의 어두운 부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넘어가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악함이나 욕심, 분노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우리는 이 죄의 소욕을 끊임없이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곧 성화입니다.

인디언들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늙은 인디언 노인이 자기 손자에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얘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데,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분노, 시기, 슬픔, 후회, 탐욕, 오만, 자기 연민, 죄의식, 원한, 열등감, 거짓, 허영, 우월감,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인내, 겸손, 친절, 자비, 이해, 아량, 진실, 동정, 믿음이란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현명한 인디언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 속에 긍정적이고 선한 쪽에 먹이를 주고 키워줘야 합니다. 분노나 욕심에게 자꾸 먹이를 주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서 거룩의 형상을 많이 이루어 갈수록 우리는 시험에 들거나 악에 빠질 확률이 적어질 것입니다.

둘째는 사회악입니다. 사회는 또 하나의 인격입니다. 개인적으로 선해도 사회 자체가 악하면 시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예컨대 군대문화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신앙인들에게는 매일이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 조직 문화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술대접이나 뇌물이 일반화된 곳에서 그런 방식을 안 하고 사업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신앙적으로 살려 해도 어렵습니다. 사회구조가 악을 범하도록 만들어 놨는데 개인만 탓할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게 악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그 구조를 바꾸던지 아니면 그 구조에서 나와야 합니다.

셋째는 사단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여주옵소서 할 때의 이 ‘악’의 헬라어는 중성형이면서 동시에 남성형입니다. 중성형으로 해석하면 일반적인 ‘악’을 의미하고, 남성형으로 해석하면 ‘악한 자’가 됩니다. 악한 자는 대표적으로 사단을 가리킵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사단과 같은 영적실체를 잘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악은 존재합니다. 사단의 가장 고차원적 수법 중에 하나는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는 정확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어서 자신이 받을 고난과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책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말에 대해서 주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의 고백은 정말 인간적인 애정에서 한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사단이 가장하고 베드로를 충동질한 것입니다. 사단은 이처럼 교묘하게 우리를 죄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성경에서는 사단을 우리의 마음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자로 묘사합니다(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그 화살에 맞을 때 죄의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때는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를 유혹하는 이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욕심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마귀와 싸움을 많이 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보름쯔 의회라는 곳에서 종교재판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말렸지만 루터는 그곳에 가서 진리를 증언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때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 확고히 서 있다. 나는 보름쯔 시의 기왓장 수만큼의 마귀가 있을 지라도 그곳에 갈 것이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번역하던 왈트부르크 성은 루터의 잉크 자국으로 유명합니다. 루터가 성서를 번역할 때 마귀가 나타나자 그를 쫓기 위해 벽에 잉크 병을 던졌던 일화 때문입니다. 관광객들이 그 잉크 자국을 너무 만져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은 마귀가 루터가 집무하고 있는 서재에 루터의 모든 죄를 소상히 기록한 책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죄를 보여주며 “너 같은 놈이 무슨 종교개혁을 해” 하며 비아냥대더랍니다. 그때 루터가 “이게 다냐?”고 묻자 또 있다고 하며 비슷한 두께의 두꺼운 책을 두 권 더 가지고 오더랍니다. 루터는 아무 말 없이 펜으로 붉은 잉크를 찍어서 한 장 한 장의 페이지마다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7). 그러자 마귀가 물러갔다고 합니다.

루터는 사단의 정체를 알고 그와 날카로운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부르다보면 지금도 마귀와 처절한 싸움을 하며 내 뿜는 화약 냄새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1절)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 (2절)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 (3절) 이 땅에 마귀 들끊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여러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악의 시험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비록 우리가 이렇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지만 우리는 번번이 시험에 들고 맙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는 계기로 만드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미혹되어 시험에 빠졌을지라도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우리를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평상시에는 잠잠하지만 시험의 순간에 마치 병을 흔들면 그 속에 가라 앉아 있던 더러운 것들이 떠오르듯 모든 악들이 다 올라오게 됩니다. 시험은 이 악을 제거하기에 가장 좋은 찬스입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불순물이 빠져나오고 정금으로 빚어져 나오듯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 인격이 하나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시련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군대 훈련이 그렇습니다. 군복무 개월 수가 짧거나 낮은 위치에 있을수록 훈련 기간이 짧고 장교는 6개월 이상을 훈련시킵니다. 장교는 다른 사람을 이끌어야 할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졸병과 같은 존재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장교요 장군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사60:21-22)

시험에 들고 악에 빠진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기 좋은 때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새벽 기도를 시작한 것은 첫사랑의 시련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자신감이 없어지고, 심한 열등감까지 겹쳐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시작했던 것이 새벽 기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이지만 저는 그때는 하루하루가 견딜 수가 없었고 오직 기도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를 계기로 본격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되어 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청년시절에 흔히 겪을 수 있는 시련이요 시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계기를 잡아 저를 연단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시험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니다. 설사 시험에 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계기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겸손히 무릎 꿇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종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