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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스러기 재활용 (마 15: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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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은 누가 많이 나무를 하나 경쟁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도끼질을 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30 분 일 하고 10 분 쉬면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쉬면서 일한 친구가 훨씬 많은 나무를 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일한 자기보다 놀면서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나무를 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간단합니다. 10 분씩 쉬었던 친구는 그 때마다 도끼날을 갈은 것입니다. 이 친구는 시간을 쪼개 쓸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의 쉬는 시간은 다음을 위한 준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10 분씩 쉬면서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공부하는 비결은 얼마나 오래 공부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했느냐 입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학습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책상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전철에서 책을 보는 것이 훨씬 집중력이 높습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잘 것 없는 부스러기이지만 모으면 무시 못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기적입니다. 다만 모여 먹은 수효와 처음 재료의 양이 약간 다를 뿐입니다. 여기서는 먹은 자가 남자만 사천 명입니다.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거둔 것도 일곱 광주리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는 남은 조각을 거둔 것이 12 바구니였습니다. 이런 차이는 이것이 한 사건을 다르게 기록했다는 논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비슷한 기적이지만 오병이어와 다른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칠병이어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먹고 남은 조각을 거뒀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보려고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와 같이 예수님은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스러기를 어디에 쓰려고 거두게 하셨을까요?

이 부스러기 기록은 바로 앞에 기록한 가나안 여자의 고백과 연결됩니다. 가나안 여자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 부스러기 고백으로 여인의 믿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부스러기를 챙기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본문은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부스러기라는 같은 교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쓴 저자는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같이 배열해 두었습니다. 그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갈릴리에 오자 역시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입니다. 큰 무리가 사흘이나 머문 그곳에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끼니를 거르면서 예수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병을 고쳤지만, 굶은 상태에서 돌아가야 했습니다. 병이 나은 것은 좋지만, 돌아가는 길은 허기져서 기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불가능한 일을 시킨다고 여겼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바로 얼마 전에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지금 그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같은 갈릴리 호숫가의 광야입니다.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38 절을 보니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번 보다 조금 적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답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지금은 그 답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 답을 꺼내 쓰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때와 다른 것은 배고픈지 사흘이나 된 점입니다. 그만한 군중이 광야에 모였으면 먹는 문제가 생깁니다. 단 하루면 심각해집니다. 계획적으로 모인 군중이 아닙니다. 며칠 먹을 것을 준비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첫날부터 제자들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사흘이 지나도록 제자들은 문제를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추측컨대 자기들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했나 봅니다. 자기 배가 부르면 남 배고픈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사흘이 지나도록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을 굶겨 보낼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이 대답에는 과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배부를 만큼 이라고 단서도 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레 배수진을 칩니다. 무리를 먹이는 것은 제자들의 직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참견까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왜 사서 일을 만드냐?’는 항변이 이 대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이 맞습니까? 왜 한번 체험한 기적이 다시 일어날 줄을 모를까요?

그것은 믿음의 습관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신앙에 습관이 든 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습관이 들면 저절로 됩니다.

한 번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것으로 다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기적보다는 이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많은 기적을 구경했습니다. 매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기적도 자주 보다보니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기적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에게 기적은 더 이상 기적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적 매너리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매너리즘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익숙해져 더 이상 창조적이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매일 기적을 봤지만, 기적의 구경꾼이었습니다. 정작 자기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런 제자들을 볼 때 답답할 노릇입니다.

제자들은 불과 며칠 전에 가나안 여인을 통해 부스러기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 전에 부스러기 같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긴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맞는 문제에 대해 전혀 영적인 응용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기적을 재현해 보여주십니다. 있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전과 같이 무리를 앉혔습니다.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무리에게 나눠주게 했습니다. 역시 남자만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겼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신앙 복습 훈련을 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제 부스러기를 늘려 기적을 체험하는 영적인 방법에 익숙해졌겠지요? 제자들이 이제 영적으로 깨어 반응하게 됐을까요?

유감스럽게도 복음서에 소개된 제자들은 여간 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 16 장을 읽어보면 한심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거둔 떡 광주리를 챙기지 않았습니다. 깜박 잊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16 장 5 절입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7 절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여전히 제자들은 부스러기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둔한 제자들을 세워 큰일을 이루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어수룩한 제자들을 길이 참으시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은 길이 참으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느 사람은 이렇게 참지 못합니다. 운전 배울 때 식구에게 배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남편에게 배우지 마십시오. 꼭 부부싸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배울 때도 형이나 누나에게 배우면 중간에 꼭 탈이 납니다. 척척 알아듣지 못하면 이내 미련하고 우둔하다는 핀잔을 받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선생님 된 자세를 배우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교인들이 말썽을 부리면 길이 참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야단치고 핀잔을 주면 이내 시험에 듭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누굴 가르치려고 들면 가르치려는 자나 배우는 자나 다 똑같이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교사를 하고, 둥지어미를 하려면 길이 참는 법, 길이 기다려 주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조금씩 신앙이 자라서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가 배우는 것은 성령님께 맡깁시다.

오늘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학습 내용은 부스러기 은혜를 이용해서 놀라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자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셨을까요?

첫째, 남긴 떡 부스러기 조각을 재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볼 때 부스러기는 보잘것없습니다. 하찮게 여기고 쉽게 버립니다. 부스러기는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 부스러기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주님은 곧잘 작은 것을 들어 큰 것을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작은 것도 흘려버리지 않으십니다. 꼭 챙겨둡니다.

요즘 세상은 자원이 풍부합니다. 아직 쓸 만해도 버리고 새것을 장만합니다. 이런 소비 형태는 제조업을 활성화시켜 경제를 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눈으로 봐야 합니다. 지구는 한정된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로 잘 산다 해도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활발한 제조업의 부흥으로 지구 환경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자원은 고갈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양말에 구멍이 나면 꿰매 신었습니다. 요즘은 그냥 버립니다. 불공평하게도 지구 한 켠 에서는 양말은커녕 맨발로 평생 지내야 하는 나라가 수두룩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 점심식사 후에 남긴 음식이 수북합니다. 욕심을 부리고 퍼 담았다가 남겨 버리는 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검소한 삶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먹다 남긴 음식이 수북한 것을 보면 부끄럽습니다. 교회에서 음식 남기지 않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아이들에게도 밥상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먹을 만치 덜어 먹도록 가르치십시오.

절약하고 아껴 쓰는 것이 좋습니다. 부스러기도 모으면 덩어리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둘째, 부스러기는 제 2 의 기적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도 유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스러기는 믿음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작더라도 믿음의 부스러기로부터 출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믿음의 사람들을 앞세워 일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부스러기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부스러기이지만 가진 전부를 주님께 내어 놓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부스러기를 들어 덩어리로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 년간 살았습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 만나입니다. 이 만나는 이른 아침에 진 밖으로 나가면 싸락눈 내린 것처럼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거둬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어 솥에 쪄서 떡을 해 먹었습니다. 만나는 그렇게 매일 내렸습니다. 안식일에는 그 전날 두 배가 내렸습니다. 남자만 60 만 명이었고 키우는 가축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족히 먹을 만치 내렸으니 그 매일 내리는 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40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주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령한 음식으로 먹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훈련을 했습니다. 여느 음식은 땅에서 취하나 만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신비를 체험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돌보고 먹이신다는 철저한 고백을 받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부스러기로 역사하십니다. 부스러기 신앙은 겨자씨 믿음입니다.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광대하게 나타나시는 기적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사모한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부스러기를 주워 담는 사람은 부스러기처럼 작아지는 것입니다. 부스러기처럼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겸손한 사람을 찾아 은혜 베풀기를 즐겨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작은 사람을 들어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매월 마지막 주일에 부스러기 저금통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루에 100 원짜리 동전 3 개씩 모아서 한 달에 만원을 만드는 저금통입니다. 이 부스러기가 모여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스러기 동전 모으기는 부스러기 신앙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생각하는 작은 마음이 점점 늘어나 기적의 부스러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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