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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말하게 하시는 은혜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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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먼저 이 이적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1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북방의 이방 땅으로 가서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방으로 여행하시면서 아무도 모르게 쉬시기를 원하셨는데 숨어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이방여인으로 수로보니게 족속 사람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는데,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한 소문은 이방 세계까지 널이 퍼져 있었습니다.  두로나 시돈이란 도시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갈릴리와 교류가 활발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급속하게 퍼져나간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을 쉽게 가나안 여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여인의 호소가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고, 얼마나 애절하게 소리를 치는지 그곳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도 여러 번 듣기에 민망하였습니다.  너무 간절하고 애절하여 제자들이 거들어 주었습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 보내주십시오.”  한 말씀이라도 해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단호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우리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며.  이스라엘에도 고침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여자,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은 그렇게 물러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하였을까 상상해보면 어린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고, 얼마나 큰 믿음의 여인인지 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기에 심한 말씀도 하시고 있습니다.  여인이 감당하지도 못하는데, 심각하고 모욕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자녀의 떡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이방여인이라고 해도 좀 심한 말씀이었고, 자존심 상할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딸의 병을 고치고 고치지 못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존감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생명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면 자신이 감수해야 하는 어떠한 희생도 멸시도 기뿐 마음으로 감수하고, 오로지 딸의 병만 낳을 수 있다면 그것이 무슨 모욕이며, 멸시라고 할 것입니까?  어머니가 말합니다.  “주님,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에게서 참된 성도를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여자보다 더 간절해야 하고,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하고 낮아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이방 땅에서 능력을 행하시고, 다시 갈릴리에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로라는 도시를 떠나서 시돈이란 항구를 거치고 데가볼리라는 10개의 도시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을 지나서 갈릴리로 들어오셨습니다.  데가볼리라는 말은 데카폴리스라는 말인데, 데가라는 말과 볼리라는 말이 합해진 것인데, ‘데가’라는 말은 열, 10이라는 말이고 ‘볼리’라는  말은 도시라는 말입니다.  갈릴리 북방에 열 개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갈릴리 바닷가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이적의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을 드러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37절의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라는 말은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이 날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심히 놀랐다는 말은 이루 측량할 수 없었다는 말이요, 충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 순간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놀라고 있었다는 말인데, 놀람의 상태가 계속되었다는 미완료의 문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날 주님의 치유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좋았다,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신 이사야35:5-6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35:5-6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적인 구원을 이루시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보낸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라고 했습니다.  마11:4-5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이사야35:5-6의 말씀과 같이 메시아로 오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가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메시아다”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기록한 것은 이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방인의 구원의 때가 도래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후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믿었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사건이 있은 후에 그 결과를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 4:53)고 했습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37절의 말씀은 이번 이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사건을 좀 자세히 설명해봅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들 데리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안수한다, 손을 얹어달라는  말은 고쳐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사람을 위하여 간청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나가서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당신의 침을 손에 뱉어서 그 사람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열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을 이르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더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이적은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적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 사건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그들은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적으로 소개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 로마와 헬라 사회에 유행하던 마술사들과 이적치유사들과 비슷한 행동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침이나 진흙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에바다”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병자의 혀를 만지고, 당시 이적사들이 하는 것처럼 병자의 귀에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치유하시고, 단순한 행동으로 치유하실 수도 있는데, 행동이 많고, 무엇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은밀하게 뒤로 데리고 가서 고쳐주신 것이 이적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사람,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은혜요,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이었기에 우리 무슨 토를 달고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행동이요, 그 사람만이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은총을 깨달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엄청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있어 본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진정 듣는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둔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귀는 잘 듣고 입은 잘 말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잘 보는데,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13:14-17에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35절의 말씀을 잘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고 했습니다.  귀 먹고 말을 더듬던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리면서 말이 분명하여졌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도 듣고 말하게 하십니다. 

  원래 말 못하는 장애인을 청각장애인으로 귀먹은 것이 원인이 되어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을 농아라고 하고 흔히 벙어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난청이라고 하는데, 난청의 정도가 다양해서 가벼운 것은 감기가 들었을 때 귀가 좀 먹먹한 정도에서부터 귀 밑에서 큰 소리를 쳐야 알아듣는 정도까지가 있습니다.  좀 더 심한 경우,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난청을 농자, 즉 귀머리거리라고 합니다.    난청의 정도를 숫자로 나타낼 때에, 데시벨(db)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정상인은 0 db이며 난청의 정도가 커질수록 숫자가 높아져 귀머거리는 80db 이상이 됩니다.  청력검사에서 90db 이상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도의 난청을 농(聾)이라고 부릅니다.  농아는 그의 어머니가 모체가 임신 중에 풍진을 앓거나 극약을 복용하여 생기는 선천성 농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3-4세 때에 뇌막염이나 성홍열 등의 병을 앓아 말을 배울 때에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되는 후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한 살이 넘어가는데, 엄마, 아빠라는 말도 따라 하지 못하면 속히 이비인후과에 가서 청력 검사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 아이는 말이 늦다는 말을 하는데, 바로 그 때에 병원을 찾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지만, 말리면 말릴수록 더 증거하여, 자기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 귀가 열렸고, 혀가 풀려 말하게 되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평생 듣지 못하였고, 말하지 못하던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어디 가서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듣고 깨달은 말씀이 있다고 하면 누가 나가서 말하지 말라고 해도 증거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병이나 고치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영적인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병이나 고치려고 찾아오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적을 행하신 후에도 이렇게 경계하여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막5: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막1:45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제사장에게 보내시면서 엄히 명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드러내놓고 동리에 들어가시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병을 고치지 위하여 몰려나왔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왕하7장에 보면 사마리아성을 아람군대가 포위하고 있던 때에 굶어죽을 수밖에 없던 나병환자 4명이 성문 밖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성문에서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살았는데, 성 안에서는 사람이 굶어죽는데, 누구에게 먹을 것을 주겠습니까?  그래서 4명의 나환자들은 결단하였습니다.  여기서 죽으나 아람 군대에게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아람 군대의 진영에 가서 항복하면 좀 먹을 것을 줄 것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질 무렵에 아람군대의 진영에 가보았는데, 모든 군량미며, 전쟁 물자를 그 자리에 두고 군인들은 하나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람 진영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살펴보았지만, 아람 군인들은 한 사람도 없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람 군대로 하여금 큰 군대의 병거소리와 군마의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듣게 하셔서 나 살리라고 도망치게 하신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정말 먹을 것을 싫도록 먹고 가져왔습니다.

  한참 이렇게 자기들만을 위하여 먹고 식량을 자기들의 거처로 옮기다가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왕하7:9입니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 많은 분들이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오늘은 이미 저녁이 되었으니, 오늘은 말고, 내일 가서 알려주자고 하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너무나 많은 일을 하였으니, 내일 첫 시간에 알려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알려주나, 내일 알려주나 아람 군인들이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 받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은 내일로 미룰 수 없는 구원의 소식이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소식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은 정말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침묵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목소리 높여서 찬양하고 간증하여 주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복음전파하라는 말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님의 지상명령이요, 유언과 같습니다.

  행4:19-20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이 있고, 말하지 아니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순종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만큼 귀한 신앙은 없습니다.  아무리 헌금을 잘 드리고, 아무리 찬양을 잘하고,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직분에 충성하여도 받은바 은혜를 간증하고 한 영혼이라고 더 살리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절반의 충성이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미흡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받은바 은혜가 있습니다.  금년 가을에는 3040 맞춤전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생명축제가 있습니다.  심령부흥회도 있습니다.  큰 은혜받고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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