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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 (召命)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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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한국 교회는 은혜만 받으면 신학교로 가는 때였다. 지금도 은혜만 받으면 신학교에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신학교에 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부르심이 있으면 부르심 따라 가야 한다.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정치가가 되어 시민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부르심이라면 은혜 받은 이가 정치가로서의 길을 가야하고 의사가 되어 병든 자를 고치며 사람 살리는 부르심이 있다면 의과 대학을 가야 한다. 부르심 없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인기와 야망의 성취를 위한 꿈만 생각하고 직장을 선택한다면 성공의 정상에서도 맹목과 허무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인생살이와 신앙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르심이다. 이는 한자로 소명(召命)이다.
오늘 베드로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마4:19 "나를 따라오너라."
고기 잡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자기의 삶의 직업 전선에서 부르심을 듣는다. "너는 그 일을 계속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즉 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베드로는 새로운 소명 앞에 섰다. 소명 즉 Calling이라고 읽는 부르심은 반드시 부르시는 분이 계시기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감을 확인하는 부르심이란 이렇다.

첫째,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마4:19上)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땅에서 나의 하는 일이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시작한 것이라면 이것보다 축복 받은 일은 없다.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인생을 살면 삶의 사명감이 없는 것이기에 헛된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기 쉽다. 반드시 해야할 일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부르신 소명에서 나온다.

광주 순복음교회를 부임하고 있는 임종달 목사는 조용기 목사를 통해 국민일보 사장직을 제의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기에 부르심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목회를 하는 것이 사명이 되었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자였다. 그리고 한세대학교 총장이었다. 그는 계속 신문사 사장이나 대학 교수를 할 수도 있었지만 부르심이 교회 개척이기에 교수가 사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에게 혼이 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기에 광주로 내려가 개척을 시작하여 100일간 기도하였다. 10년이 지나 지금 7,500명의 교회를 일구고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있다.

전영찬 교장은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부르심은 목회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창 고등학교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도하였다. 목회는 그에게 있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학교를 맡는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단의 고등학교를 맡아 교육에 헌신하여 오늘날 직업 십계로 유명한 거창 고등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교육에로 부르신 소명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그 음성을 따라 주님을 좇아가는 자들이다. 부르심 없이 즉, 소명 없이 일을 하면 안된다.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 본인도 힘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힘들게 된다.
젊은이들이여! 부르심의 소명을 들어라! 미래를 위해 직장을 위해 이것보다 우선의 일은 없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제자로 살기 위해 부르시는 음성은 꼭 있다. 그 음성을 좇아 나아가자.

둘째, 부르심은 부르시는 분인 주님에게 초첨을 맞추는 것이다. (마4:19下)
내가 성공하여 박수 갈채를 받는다. 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어, 가수가 되어, 인기 스타가 되어 박수 갈채를 받는다. 그러나 그 박수 갈채가 곧 나를 부르신 분을 제대로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박수 갈채가 없어도 부르신 분에게 초점을 맞추면 어떤 면에서 나를 부르신 분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무슨 일을 하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주님이 나의 하는 일을 인정해 주시는지, 주님이 나의 하는 일을 외면하고 계시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마4:19下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주님이 음성을 들려 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소명의 목적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제자 삼기인 것이다. 내가 해야할 일의 종류는 다양하다.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직장을 선택한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2만 가지의 직장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이 사람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부르심 앞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낚는 구원의 목적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나를 부르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인이라면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부르심 받은 나를 제자 되게 하시겠다고 선포하시고 장래를 약속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나 자신을 제한하고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며 움츠러들면 안된다. 나의 형편, 나의 학력, 나의 가문, 나의 능력에 묶여서 나의 할 수 없는 것에 자꾸 시선을 두면 안된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이지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주님의 세우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듯 주님의 할 수 있음의 약속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히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다. 주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결격 사유가 많은 나를 언제든지 온전케 빚어 주신다.
오늘날 선교의 명령은 마28:19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되게 하시는 주님을 보고 일어서자.
나는 금년 한 해를 지나면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려 애를 써 보았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얼마나 큰 제안인가? 그 어부가 되기 위해서 나는 세 가지를 생각하였다.

(1) 비젼이다.
너는 된다. 되게 하시는 분 때문에 된다는 확신의 비젼을 갖자. 너는 제자를 삼을 수 있다. 사람을 전도의 그물로 모을 수 있다. 자신을 바라볼 때는 부르심을 받은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다. 악한 파도가 높이 일어나는 죄악의 이 시대에 사람을 낚는 어부의 기술이 전혀 없는 자신을 보며 망설이고 주저하였다. 나는 못한다. 그런데 나를 보지 않고 되게 하시리라는 주님에게 초점을 맞출 때 부르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비젼과 목표가 주어졌다.

(2) 부흥에 대한 갈망이다.
사람 낚는 어부! "너는 할 수 없어. 네가 뭔데 부흥을 일으키느냐?"고 마귀가 나를 공격할 때마다 나는 금년 여름 내내 회복과 부흥에 관한 책을 읽었다. 눈이 아프도록 눈이 빨갛게 되도록 읽었다. 부흥을 통해 사람을 회심시키고 성결케 해야 되는 어부가 되야 함을 확인했다. 성령이 기름을 부어 주시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
이 땅에 회복과 부흥으로 회심하게 된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실천에서 약하다. 쉽게 무너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는 어린 아이같은 신앙으로 머물러 있다. 이들을 성숙시키는 것은 훈련이다. 가르치는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영혼을 사랑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부르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출 때 비젼, 부흥, 제자 훈련 이 세 가지가 나의 마음과 목회와 관심을 모으게 한다. 오목천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세상 속에서 사장, 교사, 공무원, 장사, 의사, 세무사, 엔지니어 등을 하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주님에게 얼마나 초점을 맞추는가가 중요하다. 보수, 대우,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사람 낚는 어부로 살기 위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원종수 권사의 암센터는 더 좋은 대우를 받는 병원으로 가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우리도 삶을 점검하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라. 박지성은 스타 플레이어로서 맥주 광고를 한다. 이는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다. 불신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영표는 스타 플레이어로서 우유 광고를 한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인으로서 부르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춘 삶이다. 어부가 되어 가는 삶이다. 초점을 맞추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떤 것을 좋아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셋째, 부르심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마4:20)
마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의 부르심을 좇아가기 위해 그물을 버려 두었다. 마4:21의 야고보와 요한도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르심이란 버리는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한 차원 높은 삶, 한 차원 다른 삶으로 초대되어 부르신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여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두 동일하게 "곧 버려 두었다."고 하였다. 즉각적인 결단을 한 것이다. 주님의 제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것보다 주님의 요구를 우선으로 앞세우기 위해 버리는 선택을 하는 일이다. 생활의 방법, 삶의 도구, 세상을 사는데 익숙한 것이어도 주님을 좇아가기 위해서 버려야 한다면 내려놓는 것이다. 좇는다는 말은 계속되는 행동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의 동사이다. 이 의미는 좇아가는 일이 어느 기간만이 아니고 평생 동안의 제자의 길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부르심이란 주님과 나의 소중한 것을 바꾸는 일이다. 아예 주님에게 나를 위탁하는 것이다.

빌3:7∼8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 되려 함이니..." 주님보다 더 고상하고 더 귀한 것이 없기에 다 내려놓고 주님만 좇는 것이다. 그 값이 얼마 짜리든지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중앙 아프리카의 조지 애틀리 선교사, 그는 자동 소총을 가지고 다녔다. 맹수들의 습격에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마을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원주민들이 적개심을 품고 습격을 하여 몽둥이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가 죽고 난 후 원주민들은 자동 소총 안에 10발의 실탄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저항 없이 순교하였다. 그는 이 총을 가지고 선교해야 할 사람들에게 쏘았다면 자기는 살고 선교가 막힐까 염려하여 죽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사람 낚는 어부로서 총을 내려놓는 것이 제자 삼는 길이기에 그냥 피 흘려 죽었다. 그 마을 추장은 이 일로 인해 감동을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크리스챤이 되었다. 그들도 예수의 부르심을 입었다.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결단하는 것이다.

윌로우 크릭 처치의 빌 하이빌스 목사, 그의 교회는 히피들이 주종을 이루고 시험에 빠졌다. 새 예배당을 지으려 할 때 부 목사의 탈선과 교회 증진의 가족 문제와 교회의 거짓된 루머로 담임목사가 곤경에 처하였다.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 일 앞에 사탄은 대단하게 공격하였다. 그 때 그 교회의 몇몇 성도가 결단을 하였다. 그들의 집을 담보 잡혀 100만 달러의 건축 자금을 마련해 왔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부르심 앞에 이 깨어있는 성도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위험한 담보물로 내려놓았다. 그래서 교회가 새 일을 시작하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교회가 되었다.

부르심은 주님을 위해 배도, 그물도, 물질도, 심지어 가족까지라도 내려놓는 것이다. 부르심의 위대함, 그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가? 부르신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주님을 좇기 위해 필요하다면 소중한 물질을,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버릴 수 있는가? 성공적인 삶은 부르심이 분명한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선택하고 행동할 때 넘치는 하늘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너는 사람 낚는 어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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