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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넘치는 교회, 사랑을 전하는 성도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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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3장 34,35절
제목 : 사랑이 넘치는 교회, 사랑을 전하는 성도 

1. 신자의 표

예수 믿는 성도의 표, 교회의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주의 잡지인 의 편집장이었던 F. H. Carlo는 “오늘날 …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대번에 그리스도인인 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를 달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팔에 ‘완장’을 두른다든지, ‘오직 한 길’을 의미하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쳐들고 다닌다든지, 십자가를 겉으로 드러나게 차고 다닌다든지 하는, 뭔가 신앙적인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리기 위해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은 보기 드뭅니다만, 자동차 뒤 범퍼나, 자동차 뒤 유리에 생선 모양의 「익투스」 표시, 그리고 요즘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극동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의 주파수 스티커를 붙이는 경우, 혹은 자기 교회 로고를 크게 붙이거나, 아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처럼 성구를 붙이고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 성도들이 팔에 완장을 차거나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쳐들고 다니는 것과, 한국 교회 성도들이 자동차에 기독교와 관련된 것을 붙이고 다니는 것이 성도임을 알리는 진정한 표시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을 붙이고서도 잘못된 언행을 일삼고, 난폭하고 위법한 운전을 한다면 도리어 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없이 그러면서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표시는 무엇일까요?

2. 사랑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사이자 기독교 사상가였던 Francis A. Schaeffer는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 the Christian)」라는 책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꼬리표가 바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라는 신학자 역시 「사랑하는 생활(The Love life)」라는 책에서 이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설명했습니다.

팔에 완장을 둘러서 ‘내가 예수의 제자요’라는 것이나, 차에 글을 새기고 표시를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눈에 잘 띄고,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마크나 표지는 어떤 면에서는 간단하고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표시는 눈에 쉽게 띄는 그림이나 글자가 아니라, 드러나게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면 단 번에 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사랑”이요,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1)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계명

오늘 본문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왜 “사랑하라”가 새 계명이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 너무나 오래된 계명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전해지고 가르쳐져온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 계명이 구약에서부터 있어온 계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번 뿐 아니라, 이전에도 여러 차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로운 계명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셨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심을 통하여, 주인이자 스승인데도 종처럼 섬기심을 통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생명을 버리심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민족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은 많은 한국 지성인의 좌우명이 되다시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실역행은 ‘말이나 행실에 거짓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의돈수(情誼敦修)”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도산의 풀이를 보면, 정의돈수는 ‘사랑하기 공부’입니다. 중국에서 2년간 도산 밑에서 흥사단의 일을 도왔던 춘원(春園)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새로운 동지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우리 민족은 사랑이 부족하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기 공부를 합시다. 무실하기, 역행하기 공부를 하는 양으로 사랑하기 공부를 합시다.”

도산의 말처럼 우리 역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모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예수님이 사신대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대로, 그것만 본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대로 따라서 하면 그만한 사랑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앞부분에 있었던 사건,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을 기억합시다. 사랑이 뭐냐?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자존심 싸움하는 것은 낮아지지 못해서, 종이 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셨는데, 우리가 왜 못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은 다 여러분이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2) 우리 속에 있는 사랑 발전소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로운 계명인 또 다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가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노력, 혹은 마음이나 감정이 땡기는 것으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금방 그 밑바닥이 드러나 버립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좋은 사람은 사랑하기가 쉽지만 미운 사람이나 내 스타일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이고, 때로는 조건이 붙기도 합니다. 이런 것에 익숙한 우리인지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잘 아신 주님께서 주님이 사랑하셨던 그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즉 성령님은 성도 여러분 속에 거하시면서 여러분을 사랑을 실천하게 만드시는 사랑의 발전소인 것입니다. 발전이 중단되거나 부족해지지 않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랑을 행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과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사랑의 발전소로 여러분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약점과 이기심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님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위대한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도 아닌 자신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① 이 말씀은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식사가 끝난 다음 곧바로 체포되실 것이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에는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5)”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때까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제자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서로 질투하는 통에, 진정한 하나 됨,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순간에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서 ‘아직도 너희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들,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주님에게 가장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 괴로워하실 것이 바로 이것은 아닐는지요?

②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잘 모른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잘 모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끼리 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즉 교회 안에 사랑이 넘쳐나지 않으면 진정한 성도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전도에는 귀 기울이지 않아도 성도의 삶을 바라보는 것,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람들, 주님의 교회의 가장 강력하고 큰 특징은 사랑입니다. 성경 공부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제자의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서 알고, 그것을 그대로 같은 성도들 끼리 서로 베풀고 실천할 때, 비로소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여러분이 사랑의 삶을 산다면, 주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알아달라고 선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적이라고 여겨질 만한 옷을 입는다고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때문에 제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기독교적인 의식 때문에 제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그것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할 사람은 바로 교우들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넘치고 성도끼리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기에 가장 쉬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이 좋은 성도이자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분들을 사랑하십시오.

4) 교회 밖,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

이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마지막 교훈을 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중요한 배경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에 팔아넘기기 위하여 나가는 장면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조금만 있으면 제자들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가장 잘못된 배반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기 위하여 나가는 그 뒷모습을 보시고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지금 남아있는 제자들 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배신한 그 가룟 유다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사랑의 범위는 정말 넓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958년 4월 25일, 교환학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이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인자는 체포되었고, 대학가의 높은 여론과 시민의 분노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살자의 부모가 담당 판사에게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탄원서에서는 ‘자식을 죽인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주면 그의 재활까지 책임지겠으며 이런 탄원을 하는 이유는 우리를 멸망의 길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부부처럼 여러분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믿음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배신자, 가장 미운 사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우리가 성도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고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이 넘치는 교회, 사랑을 전하는 성도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는 것, 성도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단 한 가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라든지, ‘모든 성도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큰 덩치,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잘 대해 주라’, ‘귀찮게 하지 마라’,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 정도가 아닙니다. 그를 예수님을 대하듯 하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지금 곁에 있는 성도를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을 말한 그대로 행동하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책임을 지십시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어떤 노부부가 적적하여 아기를 입양해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키우다보니 그 아기에게 빠져들어 노부인은 아기를 안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풀어 헤치고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노부인에게서 젖이 나왔고, 아기는 그 부인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외국 학계에 보고된 실화입니다. 그 노부인의 깊은 사랑이 내분비선을 자극하여 젖이 나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기적을 낳습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과 친구와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손을 잡아 따스한 체온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에 보다 더 힘을 쓰신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면서 성도의 표시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성도인 진정한 표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나 예수님과 관련된 어떠한 것이 없어도, 행동이나 말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에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는 일, 나의 말에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 차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랑이 되게 하는 일, 나의 눈길에 예수의 사랑이 가득 차서 그 눈길 닿는 곳에 사랑이 충만하게 하는 것, 내가 스쳐갈 때에 잠시 일었던 미세한 바람에까지 사랑이 담기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여러분이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표시입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에게부터 이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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