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3) (눅 6:41)

  • 잡초 잡초
  • 251
  • 0

첨부 1


성도의 공동생활과 형제교정 3 

I. 본문 해설

본문이 속해 있는 말씀들은 천국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평범한 죄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삶의 표준들을 제시해 주셨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었다. 천국백성의 삶의 표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심으로써 태만한 자들에게는 겸손함 가운데 그 명령에 순종하게 하고, 그렇게 살고자 애쓰는 자에게는 하나님 안에 있는 구체적인 순종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순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주님은 형제교정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지침 하나를 가르쳐 주시는데, 형제의 작은 결점을 보는 대신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는 말씀이다. 형제교정은 영적 자선이다. 올바른 가르침과 생각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서 오는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점점 더 온전한 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형제교정은 커녕 또 다른 죄를 짓게 되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형제교정의 위험성은 아래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II. 형제를 교정하는 자의 위험

A. 다른 사람의 결점을 봄
결점이나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형제교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의 결점을 주목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이지 못한 편견에 휩싸이기 쉽다는 것이고, 그 편견에 따라 일방적인 판단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선입관 없이 사람을 보기란 참 어렵다. 어떤 종류이든 첫 인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좌우하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일종의 편견들로 인해 참으로 좋은 점과 참으로 나쁜 점들을 보지 못하게 되고, 공정하게 판단 내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몇 해 전 안과진찰을 위해 눈 속에 특수한 약을 투여한 적이 있다. 그 약은 변함없이 자신의 색깔들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을 모두 빨갛게 보이게 하였다. 이처럼 타인의 결점을 발견할 때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위험성은 편견을 가지고 형제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며, 그렇게 하는 만큼 그를 정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그 사람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B. 사랑을 유지하기 어려움
형제교정에 있어서 또 한 가지의 위험성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사랑은 잘못된 사랑일 수도 있고, 진실한 사랑일 수도 있는데, 전자는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으로 인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김으로써 생겨나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서 영혼과 지정의가 명정하여져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쳐야 할 형제의 결점이나 허물은 추한 것이다. 추함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어 있는데, 그 결점들을 발견해 나가면 나갈수록 그 형제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권태감이, 추함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본성인 것이다. 이처럼 형제교정은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게 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보편적 원리와 상반된 사실을 명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지침들을 주셨기에 가능한 명령인 것이다. 온 지체, 온 교회가 은혜의 감화 하에서 온전해져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과 그분의 하신 일을 감당하도록 만들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형제교정을 명하셨다. 그러나 형제의 추함을 발견하고 도리어 미워하게 된다면, 이는 형제교정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닌 오히려 교회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된다.

C. 자신의 처지를 잊게 됨
형제교정을 함에 있어서 또 하나의 위험성은 자신도 예수님 앞에 얼마나 불결한 죄인인지를 잊어버리고 형제의 결점을 본다는 것이다. 은혜 안에 살지 않으면서도 은혜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마치 깊은 은혜 가운데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처럼 자신 안에 있는 커다란 죄는 보지 못한 채 형제 속에 있는 작은 죄를 보고 미워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형제를 교정해 주지 않을 때에는 자신은 죄에 빠진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넘치는 분노 속에서 그 일을 행하기 쉽다. 따라서 형제교정은 하나님 앞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결점과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 곧 자기교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형제를 교정하면서 자신도 함께 온전해 져야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더 온전해 지는 것이 바로 형제 교정의 원리이다.


III. 형제를 교정하며 온전해지는 길

A. 자신을 돌아 봄
1. 교정하기 전
형제의 결점을 숙고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에게는 그러한 결점이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도 반드시 그러한 결점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혈기로써 이를 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형제의 허물에 대해 공정히 다룰 수 있는 마음과 그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형제와 동일한 모습의 결점과 허물은 아니지만 동일한 뿌리 속에서 나온 죄악들이 자신 속에도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될 것이며, 자신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는 우리는 그 형제를 긍휼이 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며, 그를 정죄하는 폭력적인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2. 교정하는 도중
하나님이 나를 다루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를 먼저 생각하라. 우리 삶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의 발자취이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던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함을 맛본 자들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과 그런 우리를 다시 사랑해 주심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는 우리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될 수 없다.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쓰러진 그곳에서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고백하게 된다. 신앙의 연륜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자랑할 유일한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악하고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내 자신이 나를 포기하셨을 때에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다루신 것처럼 형제에 대해서도 이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끼리 서로 싸우며 정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신 그 긍휼과 끝없는 사랑을 생각한다면, 그것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의 간증: 내 자신 안에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죄와 곤고함으로 인해 절망의 시기를 지날 때, 양 무리를 이끌고 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끌고 가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처지, 알 수 없는 정죄감, 깊은 절망 가운데 들려주신 이 음성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이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너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린아이처럼 붙들고 지금까지 왔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다루신다. 자신만 그렇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도 동일한 사랑으로 다루신다. 주님의 교정의 도구가 될 때에는 이러한 주님과 같은 마음, 주님을 대신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 마음은 형제교정 시간 내내 변함없이 계속되어야 할 마음이다. 형제교정을 받는 자보다 형제교정을 하는 자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교정한 후
교정 한 후에도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형제가 고침을 받은 것처럼 자기 자신도 교정받은 것을 하나님 앞에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 번 뉘우쳤지만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형제 교정은 이루어졌는데, 우리 자신은 예전의 그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B. 자신에 대해 공정해짐
형제 교정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공정해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다.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의 동요 속에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비춰보면서 객관적이며 공정하게 나 자신을 다루어야 한다. 형제 앞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세우는 것이며,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을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형제의 허물을 보면서도 자신은 올바르게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공정히 바라보는 이것은 형제교정을 하면서도 그를 정죄하는 오류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C. 교정의 동기가 사랑이게 함: 은혜의 필요
교정의 동기가 사랑이 되게 해야 한다. 교정의 동기는 인간 안에 있는 자연적 선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까리따스의 사랑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선택적으로 사랑하고, 편애하는 것은 자연적 선의이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은 자기 사랑이 동기가 된 편애가 아니라 그 중심축 자체를 하나님으로 옮긴 사랑이다.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서 고치고 바꾼 것이 진정한 형제 교정인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우리의 자연적 선의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만이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육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까리따스의 사랑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자연적 선의는 허물을 가진 형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나 까리따스의 사랑은 죄와 죄에 빠진 형제를 나누게 함으로써 그를 온전히 사랑하게 만든다. 그 형제를 향한 사랑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형상이기 때문에, 형제에게 있는 죄는 그를 더 긍휼히 여기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목숨까지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항상 그 사랑으로 충만하여 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형제는 교정하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전심으로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이 일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자신이 먼저 예수께 붙어있는 자가 되고, 날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날마다 추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날마다 죄를 미워하고 날마다 선을 좇는 자기를 바치는 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며, 이것을 통해 주님의 교회는 온전해져가는 것이다. 형제교정은 이를 위함이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