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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입성 (마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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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과 입성 후 첫 번째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흔히 ‘종려주일’로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가 성육신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입성 후 이 한 주간을 특별히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곤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1).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2-3). 이 말씀은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주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일단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다가 누가 시비 걸면 그제야 용도를 밝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듯 보이는 이런 명령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는 당신님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감추어 오셨으나,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이제는 공식적으로 드러낼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심과 만유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시며, 약속되었던 메시아로서 입성하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신성은 원래부터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왕이 아니셨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의 인성까지도 왕좌에 앉으실 준비를 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분의 인성까지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성경은 기록합니다(28:18).

예수님의 명령 속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먼저 는 예수님의 전지하심입니다. 예수님은 가보지도 않은 건너 마을에, 어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나귀들이 묶여 있는 상황을 훤히 아셨습니다.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항의할 어떤 사람의 반응과 그의 생각까지도 미리 아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만유의 주인 되심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전지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시고 관리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농장을 만든 주인이 마구간이 어디에 있으며 그 안에 나귀가 얼마나 있는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 자체가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암시합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올 때, 항의할 사람은 아마도 나귀 주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어떤 사람’(anyone, NIV)이라고만 하시고, 당신께서 쓰실 것을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셨습니다. 청지기의 관리 하에 두었던 것에 대한 주권을 지금 행사하신 것입니다. 참 주인이시기에 그분의 명령은 결코 원칙과 절차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호칭이 ‘주님’일 것입니다. 이 호칭은 기본적으로 그 분의 ‘주인 되심’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편의상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집, 내 인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향하여 ‘주(主)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내 가족의 참 주인이시며, 내 소유의 참 주인이시며, 내 인생의 참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내 책임 하에 맡겨두신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뜻대로 쓰실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주님’이라고 하지만, 정작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주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왠 상관이냐’, ‘내 인생 내 뜻대로 살고 싶으니 간섭하지 말라’, ‘왜 내 것을 바치라 하느냐’하고 반항합니다. 참 주인이 누구신지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한 것입니다. 신명기 8:17-18절은 비록 내 능력과 힘으로 재물을 얻었어도 재물 얻을 능을 주신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라면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소유뿐만 아니라 내 생명조차도 언제든 드릴 수 있는 자세가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마구잡이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 단체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혹은 종교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심지어 헌금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이 말을 엉뚱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굶주리실 때도 많았고 머리 둘 곳에 없이 사셨지만 한 번도 ‘주가 쓰시겠다’는 말로 음식이나 숙소를 강요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립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말씀을 남발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루살렘 입성을 둔 이 시점에서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한 번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는 왜 나귀를 쓰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4-5). 예수님은 지금 개인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왕의 자격으로 공식적인 입성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했습니다.

6-11절을 보면,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와서 겉옷을 걸쳐놓자 예수께서 타셨습니다. 큰 무리들이 겉옷과 꺾은 나뭇가지들을 길에 깔았습니다. 앞서 가는 무리들과 뒤 따르는 무리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온 도시가 소동하며 “이는 누구뇨”하고 물었고,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했습니다. 나귀 주인과 무리들의 반응은 당시에 예수님을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로 영접했던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백마와 황금 마차 대신 나귀 새끼를 타셨고, 양탄자 길이 아니라 때 묻은 겉옷과 나뭇가지가 깔린 길을 통해 입성하셨습니다. 왕의 입성식으로는 매우 초라합니다. 이는 왕이 변변치 않기 때문이 아니라 겸손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셨지만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창한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찬양과 자원하여 벗어드린 초라한 겉옷을 기뻐하셨습니다. 아무리 초라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일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날의 왕의 입성식은 그분의 신분에 합당했기 보다는 그 분의 성품에 합당했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가 물질주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화려하고 거창하고 웅장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예배당도 멋있고 웅장하게 화려하게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 될 줄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모든 황금과 웅장한 것들과 화려한 것들을 모아도 결코 그 분의 신분에 걸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라면,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 겸손하신 왕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신분에 걸맞은 것을 준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그 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서, 그렇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14절은 입성하신 후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하고 꾸짖으셨습니다. 흔히 이 사건을 ‘성전 청결’로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만, 그 이름은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정돈하시기보다 더 어지럽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전은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토설하고 제물을 드림으로 그 죄를 용서받는 곳입니다. 주님과 다시 관계성을 회복하고 그 분께 담대히 기도하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의 역할을 성취하실 분이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완전한 제물이시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을 통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자비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기존에 있던 성전의 기능은 점차 소멸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안 지성소를 가렸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A.D. 70년에는 성전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이제 참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나가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만 성전 자체는 소멸될지라도 그것이 예표하고 있는 동안은 참 성전이신 우리 주님을 바르게 예표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물질주의로 세속화되어 있음에 분노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어야 했는데, 정확한 분량을 내기 위해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두로 동전으로 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나 헬라 동전을 가진 자들은 동전을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제사하기 위해서는 흠 없는 제물을 구입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 성전 안에 두도록 허락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막대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성전을 찾아온 여행객이 가져온 제물들은 불합격 시키고, 여행객이 시장에 내다판 불합격품을 다시 사들여 합격품으로 비싼 값에 되팔았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전혀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못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어떤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의 연합체입니다. 그 성전 안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전 된 주님의 공동체는 참 성전이신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들이 공동체에 들어와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통해 죄 용서를 받고 자비를 얻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식어지고, 그 마음이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다면, 주님의 꾸지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의 왕이신 주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그분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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