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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떨기나무 같은 성도 (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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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상관없이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역사하실 줄 믿고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씩 바꿔 나가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시니 우리는 결코 분노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주장하신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거나 인생길에 큰 장애물이 나타나면 불행을 느끼고 화를 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어 봐야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태도는 상황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행복을 찾고 인생을 누리기로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런 선택을 할 때 기분이 훨씬 좋아질뿐더러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분투와 고통을 모두 아십니다. 그러나 하루는 행복에 겨워 살다가 다음 날 조그만 문제가 생겼다고 낙심하고 절망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온전히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번에 하루씩 삽시다. 우리는 의지라는 재능이 있기에 오늘을 온전히 살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루라도 얼굴을 찡그리고 지내기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가족과 친구, 건강, 일, 예배, 인생의 모든 부분을 즐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인생을 살다 보면 나쁜 일도 일어나고 상황이 우리 뜻대로 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때일수록 행복을 누리기로 선택하는 과정이 더욱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명자로 부르시기 위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초자연적으로 임재하시는 극적 장면입니다. 호렙산에서의 하루, 평소와 다름없는 일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내가 불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분은 내가 상상한 인간적 기준의 시간을 넘어서 당신이 정하신 정확한 시간에 전혀 예고 없이 오십니다. 내가 쓰러지고 낙망하여 인간적 야망을 모두 포기한 바로 그 시간, 하나님의 새로운 시각에 맞추어 살 것을 요구하시며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대도시 복판이 아니라 내가 간과하고 무시하는 삶의 일터에서 내 가슴을 밀치고 오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는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이 시대에 떨기나무 같은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일하는 성도
  본문 1절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모세는 일회적으로가 아닌 습관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양무리를 돌봤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기에 앞서 40년간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지속적인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애굽 총리로 등용하기 위하여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가사일을 돌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충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양을 때리거나 소홀히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양을 때리는 사람은 사람을 때립니다. 양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합니다. 양을 사랑하는 모세의 모습을 40년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연이나 순간이 아닌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양무리를 가장 비옥한 목초지로 인도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적당주의자가 아닌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사나운 목자가 아니라 부지런하고 사랑이 넘치는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광야학교'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음으로 혈기와 교만의 물은 다 빠지고 겸손과 사랑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릭 리들은 1964년 파리 올림픽에서 100미터 달리기의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날짜가 주일에 잡혔습니다. 그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금메달을 포기하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명한 금메달 후보이다 보니까 왕까지 나서서 경기에 참여하기를 권고하고 왕자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에릭 리들은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했지만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고 결국 다른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00미터 선수로서 자신의 주종목을 놓친 그가 목요일에 있는 400미터 계주에 나갔는데 거기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어떻게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가 물었더니 "100미터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미터는 하나님이 뛰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나무꾼 두 친구가 나무를 패는데 한 친구는 쉬지 않고 나무를 팼습니다. 다른 친구는 시간마다 꼬박꼬박 쉬었습니다. 쉬지 않은 친구는 꼬박꼬박 쉬는 친구들 보며 '내가 쟤보다 훨씬 나무를 많이 팼을 거야.'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꼬박꼬박 쉰 친구가 더 많은 나무를 팼습니다. 쉴 때마다 도끼의 날을 갈았기 때문입니다. 무딘 도끼로 나무를 패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됐습니다. 안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거리의 신호등을 보면 파란 불은 가라는 신호이고, 빨간 불은 서라는 신호입니다. 달력에 주일이 무슨 색으로 표시돼 있습니까? 빨간 색입니다. 빨간 불은 반드시 서야 합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가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신호를 위반하면 죽습니다. 주일을 어겼다가는 다 죽는 것입니다.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일에 나가서 일하면 천만 원을 버는데 주일을 지키느라 백만 원만 번다고 해도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주일은 지켜도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되는 날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가장 무섭게 경고하신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리고, 구원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고, 양육을 받고, 하루종일 구원을 위해 시간을 드리는 그것이 안식입니다. 주일을 생명처럼 지키면서 열심히 일하는 성도가 됩시다. 양무리를 잘 치는 모세처럼 여러분의 생업과 사명을 잘 감당하는 떨기나무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쓰임 받는 성도
  본문 2절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 '가시덤불'(thron bush)을 가리킵니다. 이 나무는 주위의 고상하고 당당한 소나무나 잣나무와는 대조적으로 앙상하고 아주 볼품 없이 생긴 나무로서 노예로 전락하여 곤핍하고 메마른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현생활을 상징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에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은 이스라엘 위에 머물러 있던 모든 고통의 멍에를 끊고 해방의 기쁨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하는 계시 사건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불꽃이 떨기나무로부터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임을 암시합니다. 모세는 낙심 가운데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이제 때가 차매 그에게 위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초자연적 현상 가운데 모세의 시선을 주목시키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이제 그만! 우리에게 버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복 뿐 아니라 남의 기쁨과 복까지도 빼앗는 사람입니다.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우리가 그 일을 소홀히 하면 남의 복을 빼앗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남의 흠과 잘못을 비판하기는 정말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더러 남을 세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승리의 말을 해 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십니다. 칭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는 우리에게 자기 잇속을 잘 차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기주의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산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전혀 관심이 없고 불쌍한 사람을 도울 시간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유익한지가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주의는 오히려 우리는 비참한 삶으로 내몹니다. 아무리 많은 이익을 챙겨도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큰 기쁨을 맛보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잊읍시다. 남이 나를 위해 뭘 해줄까 계산하지 말고 내가 남을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주의적 존재가 아니라 베푸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베풀며 사는 법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진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남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베푼 그대로 하나님이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남의 필요를 채워 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미국의 존 필립스라는 사람이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교회를 비방하고 주의 종을 교회에서 쫓아내고 자신도 교회에서 떠났던 일본계 미국인 마쓰시코의 가문에서는 200년 동안 거지가 306명, 강도가 63명, 살인자가 7명, 강간자가 26명, 저능아가 203명, 실업자가 73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최악의 불행이고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쓰임 받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떨기나무 같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과 가족들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서 금그릇처럼 그리고 기둥처럼 크고 아름답게 쓰임 받는 최고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거룩한 성도
  본문 4-5절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일꾼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의지와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의 고귀한 특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름을 거듭 부르심으로써 상황의 긴박성과 사명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초자연적 불꽃 가운데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직감하였습니다.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지극히 초라한 자신에 대한 겸손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과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바로 그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누구나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허물과 죄로 오염된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설 수 없기에 거룩히 씻김을 받은 후에야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의 재능과 자존심을 과감히 버리고 겸손히 순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거나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어 위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긍정적인 변화이든, 부정적인 변화이든 삶의 어떤 변화 속에 있을 때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많은 변화가 오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복음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말하고 있는 대로, 사람들은 "안정의 섬"을 찾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전도는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드레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에게 전도하였습니다. 빌립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즉시 전도하였습니다. 세리 마태는 다른 세리들을 위해 전도저녁만찬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들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실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도의 최상의 전략은 이미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효과를 가장 많이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회마다 사람마다 각각 전도대상과 전략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적으로 전도대상자를 정하는 데는 개인전도와 달리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즉 신학적인 문제, 관계적인 장애, 감정적인 장애, 삶의 스타일의 장애, 그리고 문화적인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문화적인 장애를 생각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최대의 결실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처음 방문자들이 올 때, 종교적인 질문의 해답을 얻고자 오지 않고 문화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서 "이 교회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하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에는 그들과 같은 노인들이 있는가 살펴보게 됩니다. 군인들은 군인들을 찾고, 학생들은 학생들을 찾고, 아기들을 가진 젊은 부부들은 같은 나이 또래의 아기들을 가진 젊은 부부들이 있는가 찾아봅니다. 만일 처음 방문한 경우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으면 다음 주에 다시 교회를 찾아옵니다. 물론 교회는 같은 종류의 사람들만 모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전도할 때에 같은 나이에 같은 입장과 같은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사람들의 교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죄악의 신을 벗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합시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태워버립시다. 이 시대의 모세가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합시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떨기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과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 일하는 성도, 쓰임 받는 성도, 거룩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립시다. 생명을 구원하는 '기쁨의 날'을 향하여 불꽃처럼 기도하고 전도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모세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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