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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창 12:1-8, 행 1:6-11, 눅 9: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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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아담과 이브는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창3:24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어 보냈다”고 했습니다. 창3:25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에덴동산을 떠난 것이 인간 역사의 시작입니다. 어떤 분이 그린 성화를 보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이 한 손으로는 아내 이브의 손을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눈물을 닦으면 에덴동산을 떠나는데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잃고 쫓겨나 찾아가게 되는 땅은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실락원(失樂園)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실락원의 역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복락원(復樂園)입니다. 그런데 복락원의 역사도 역시 떠남으로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떠나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의 보좌를 떠나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야말로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엄청난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복락원의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구속의 대업을 이루신 것도 역시 떠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눅9:31에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별세”라고 하는 말이 우리 성경에 “출애굽”이라고 되어 있는 말로 “엑소더스” 즉 “탈출”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외국 영화 가운데 “영광의 탈출”이라는 제목이 있었는데 원제목은 “엑소더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이 일련의 구속사역을 “떠남”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눅24:51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셨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를 떠나 세상에 오신 주님은 이제 다시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십니다. 이렇게 하여 구속의 대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2.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살펴 볼 것이 “떠남”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려고 할 때 맨 먼저 주신 명령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떠나야 했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나중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모으고 그들에게 들려 준 고별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으로 땅이 비옥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우상숭배의 본 고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떠나라고 한 것은 단지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리적인 장소보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영적 위치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양성경에서 말하는 대로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우상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바로 신앙의 입문입니다. 회개의 문을 거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 즉 믿음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를 그곳에서 불러내신 목적을 말씀해 줍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먼저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떠나면 복을 주겠다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게 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떠났으나 그 땅을 유업으로 얻고, 하늘의 별과 같은 수많은 후손을 약속받고,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떠난 아브라함은 정말 이 지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3.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까? 우리 속된 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라고 복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하는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단지 나 한 몸 이 세상에서 잘살라고 복을 주십니까?

오늘 구약 본문에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이 되라고 복을 주셨단 말씀입니다. 개역 한글판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참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오늘 행1:8에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 말씀이 구약의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신다는 말씀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모시는 일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보다, 그리고 그런 기도에 앞서 할 기도는 “주여 임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모시면 “모두(all)”요 주님 모시지 못하면 온 세상을 다 가져도 “아무것도 아님(nothing)”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되고”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목적은 전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저 말씀이나 사도행전에 있는 이 말씀이나 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적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복주시고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오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모든 복은 나로 하여금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명을 팽개치고 나만의 삶을 누린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 받을 것이요, 하나님은 비록 주셨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빼앗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백 여 년을 지나면서 나중에는 노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종절멸의 위기에 빠지게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도대체 이 무슨 운명입니까? 인간의 종노릇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을 연단시키셔서 사명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성숙했을 때 그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 즉 “엑소더스”입니다. “대 탈출”이요 “떠남”입니다. 이런 떠남의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사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우여곡절이 많기는 했지만 여호와 신앙은 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상에 주어졌고 또 보존되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성경 말씀대로 태어나셨습니다. 이와 같이 떠나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의 사명자가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었습니다.

4. 이제 우리 서부교회도 이제껏 살던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 우리를 반세기동안 살던 이곳에서 떠나라고 하십니까?

지난 4년여 동안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 되어 전적인 헌신을 통하여 새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때로는 기대에 부풀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엄청난 시련 앞에 좌절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이웃 교회서 지켜보는 이들,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비판의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그때 우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묵묵히 속으로 애태우며 감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숨어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도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렇게 지나오는 동안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더 겸손해졌고, 더 낮아지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라는 노래처럼 교회에서 오직 주님만이 높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아름다운 새 성전의 입당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입에는 함박웃음이 피었고, “이것이 꿈이냐!”라고 자기 살을 꼬집기도 했던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일을 보면서 이제 우리들은 “내가 했다. 네가 했다”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도다”라고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원수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과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고 시인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토록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크게 조심해야 할 것이 건물 자랑입니다. “우리 것이 더 낫다” 이런 생각이나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건물 신드롬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새 성전을 내세워 전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큰 일을 이루어주신 것은 사명을 더욱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새로 잘 지어진 그것이 이 지역에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반세기를 살아온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시하여 주신 새 성전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먼저, 지난날의 안일한 삶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사명에 더 충성해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의 자리를 떠나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관심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무관심, 사역에 대한 무관심, 주님의 간절하신 뜻에 대한 무관심의 자리를 떠나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의 자리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열정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명실 공히 우리가 복이 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가 예루살렘이든지 유대 땅이든지 사마리아, 아니면 땅 끝이라도 그리스도의 복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사명 공동체의 다짐을 가지고 새 성전으로 가야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새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떠나십시다. 그리고 주님이 지시하신 땅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십시다. 그리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앞서 가시면서 우리 길을 더욱 평탄하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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