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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4) :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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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주기도문

여러분의 기도 중에 저는 지난 한 주간 제9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번 총회에 많은 안건이 결의되었는데 크게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찬송가가 새로 발간된 21세기 찬송가로 바뀌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주기도문이 새롭게 바꾸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총회에서 지침이 내려오면 새로 바뀐 찬송가와 새 주기도문을 사용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새로운 주기도문을 읽어드렸지만 다시 한 번 읽어드립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물론 이 새 주기도문을 반대하고 현재의 주기도문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총대 다수가 새로운 주기도문에 찬성했습니다. 물론 앞으로 주기도문을 새로 외워야 한다는 불편이 있지만 이 결정은 참 잘 된 것입니다. 더욱 원문에 가깝게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고,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는 표현도 현대식으로 고쳤으니 앞으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더욱 마음속에 잘 새기면서 기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나아가서 21세기 찬송가가 출판되면 내년쯤에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용 성경도 총회의 결정에 따라 개역개정판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주기도문에는 크게 두 가지 간구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한 간구와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위한 간구는 ①'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②'나라이 임하옵시며' ③'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세 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인데 이 또한 세 가지입니다. 무엇 무엇이지요? ①'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③'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오늘은 이 중 첫 번째인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오히려 그 내용이 더 분명해집니다. 영어성경에는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번역하면, "오늘 우리에게 매일의 빵을 주소서"입니다. 사실 원어에 보면 '양식'이 아니라 '빵' 혹은 '떡'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주기도문을 새로 번역하면서도 이 부분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했는데, '오늘날'은 현재 쓰지 않는 옛날 식 말투이므로 '오늘'로 고쳤고 '주옵시고'도 마찬가지로 '주시고'로 바꾸었지만, '일용할 양식'은 원어 그대로 보면 '매일의 빵'이지만 고치지 않고 현재 주기도문처럼 '일용할 양식'으로 두었습니다. 아무리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빵'이라는 말이 아직은 우리 정서에 잘 안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 바꾼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 외워야 하니까 오늘 한 번 따라해 볼까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 한 낱말씩 살펴봅시다. 먼저 첫 번째 나오는 말이 '오늘'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오늘'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바로 살아야 내일도 있습니다. 오늘 감사할 줄 알아야 내일 감사할 제목이 더 주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과거만 운운하고 과거에만 매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거의 기억에만 얽매어 오늘을 제대로 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또 오직 미래만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에 충실하지 않고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주님도 주기도문 바로 뒤인 마 6:34에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도 '오늘' 해야지 옛날에 기도 많이 했으면 뭐하고, 내일부터 기도한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오늘 뿐입니다. 바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십시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허망한 미래만 말하지 말고 오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은 '우리에게'입니다. 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칠 때 너무 무엇을 달라는 간구만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간구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간구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나 감사의 기도, 회개의 기도는 다 빼놓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무엇을 달라는 간구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고 하는 간구만 하면 안 되지만 분명히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에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무엇을 달라는 간구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 하나님을 위한 간구를 하고 그 다음에 나 자신을 위한 우리를 위한 간구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앞에서 먼저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간구를 한 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세 가지를 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우리를 위한 간구, 나 자신을 위한 간구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을 위한 간구를 할 때 꼭 이 순서(하나님을 위한 간구 ➛ 나를 위한 간구)를 지키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체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분명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나 자신인데 '나에게'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기도의 범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한 간구 세 가지를 할 때 모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고 가르칩니다. 즉 기도의 범위를 '나'로만 좁혀서 나만 위해 간구하지 말고, 범위를 더 넓혀갈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간구할 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나고 응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 기도할 때 늘 자신보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중보기도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보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다음으로 살펴볼 낱말은 '일용할'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매일의'라는 뜻인데 양식을 구하되 일주일 치나 한 달 치를 미리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먹을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사건과 연관이 됩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아무렇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칙이 있었습니다. 만나는 매일 아침 이슬이 마른 후 땅 위에 내려졌는데 반드시 일인 당 한 오멜 씩만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오늘 거둔 만나는 절대 내일까지 보관하면 안 됩니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만나는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이 만나가 바로 '일용할 양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만나가 이런 방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첫째, 하늘로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하나님 은혜만 바라보며 사모하며 살라고 이런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둘째로, 만나 사전에 저축은 없습니다. 저축이란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저축을 하게 되면 사람의 심리가 어떻습니까? 여러분 통장에 몇 억 정도 예금이 들어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의지할 것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저축도 없고 아무런 믿을 것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오늘 하루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저장하거나 저축하지 못하게 하고 매일 내리는 만나로 그날그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만나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비록 이 땅위에 살지만 우리의 삶은 결코 이 땅위의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함을 체험한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은 만나처럼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면 한 번에 하루를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미래라는 것도 결국은 오늘 하루하루가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복음성가 가사처럼 인간적인 미래의 계획이 아닌, 바로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사는 법을 배우고, 하루를 살아도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양식

그 다음에 나오는 표현이 '양식'입니다. 한자로 보면 '양식'(糧食) 즉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을 뜻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원어에 보면 음식 전체가 아니라 '빵'이라는 뜻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음식을 구하라고 하지 않고 빵만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빵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 가장 기본이 되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밥을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 밥만 먹습니까? 국도 먹어야 하고, 반찬도 먹어야 하고, 때로는 별식으로 중국음식이나 양식도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왜 포괄적으로 '모든 먹을 것을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꼭 집어서 '빵'만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가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음식만 구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일주일이나 한 달 치 양식이 아니라 바로 오늘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서 축적하고 쌓아놓으려 하지 말고, 그날그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살아가도록 매일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양식도 반찬도 구하고, 별식도 구할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기본이 되는 빵만 구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 부리지 말고, 겸손하게 순박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이 '빵'이라는 낱말이 잘 가르쳐줍니다. 사실 우리는 내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들을 너무 많이 구하면서 삽니다.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많겠습니까? 없어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 물건이 많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있으면 편리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친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니 일어나는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걷기 불편해 차를 몰다 보니 공해가 일어나고, 편리하라고 핸드폰을 사니 오히려 우리 삶이 훨씬 분주하고 정신없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나 핸드폰이 없던 때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사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자동차나 핸드폰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지나친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본질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편리함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지구상 인구의 1/4에 불과한 선진국 사람들은 음식물의 과대섭취로 인해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비만인구의 증가요 다이어트인 반면, 지구상 인구 중 10억은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중 수백만은 식량부족으로 오늘도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전 인류가 먹고 사는 데 충분한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일까요? 선진국에서 소나 돼지, 닭 같은 가축에게 주는 사료곡물의 1~2퍼센트만 절약해도 세계는 기아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선진국 15억 인구가 매일 8칼로리의 식량(쇠고기 0.6그램 정도)만 절약해도 기아로 죽어 가는 5백만 인구의 기초열량(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열량)인 2천 칼로리를 보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밥상에서 쇠고기 1근을 먹으려면 소가 20.5근의 곡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쇠고기 1근을 먹는 것은 후진국에서 다섯 사람의 먹어야 할 음식을 먹어 치우는 셈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쇠고기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가르침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 달 치나 일 년 치, 아니 내가 평생 쓰고도 남을 지나친 양식을 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아닌 지나친 양식을 구할 때, 우리의 욕심이, 분에 넘치는 생활수준과 편리함이 바로 이 순간 지구상 어딘가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의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은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구나." 하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이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먹고 사는 것보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데 있어서도 믿는 사람들의 태도는 불신자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잠언 30:7~9을 읽어 드립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잠언을 지은 아굴은 오직 필요한 양식만 구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배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고, 너무 배고프면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만큼 구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11에서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천막을 지으며 번 돈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니 늘 재정적으로 넉넉할 리 없었습니다. 바울도 물론 다른 사도들처럼 성도들이 주는 돈으로 편안하게 선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12절에 나온 것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은 13절에 나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통해 무엇을 배우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일뿐 아니라 내 모든 생활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이나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내게 능력주시는 자인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활이든 선교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배우기 위해 사도 바울은 스스로 궁핍할 줄도 아는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부자 되기 바랍니다. 또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아니, 조금 전에는 너무 부유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왜 딴소리냐" 하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의 핵심은 돈이 많으냐 적으냐, 먹을 것이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세에 대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고 의지하십시오. "에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먹고 사는 것은 다 똑같지 뭐."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먹고 사는 것조차 수준이 달라야 합니다. 똑같이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더라도 믿는 사람은 수준이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은 그 돈에 의지하지만 믿는 사람은 그 돈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지 내가 의지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권력을 가지더라도 같은 자리에 올라도 완전히 수준이 달라야 합니다. 약 10년 전부터 제가 거래하는 안경점이 있습니다. 사장부부는 젊은 집사님들인데 제가 갈 때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희가 이 사업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서 선교 사업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 그 안경점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일까요? 물론 목사라고 안경 값을 싸게 해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분들이 돈을 벌어도 왜 버는지 목적이 다르고 수준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여러분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 복 받는 삶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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