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롬 8:3-4)

  • 잡초 잡초
  • 584
  • 0

첨부 1


율법이 할 수 없는 것(롬8:3-4)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한 없이 잘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자식을 낳았고 자식을 기뻐했고 자식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다 보면 그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데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위하는 것일까? 재물을 많이 안겨주는 것이 될 수는 있지만 이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출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부산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 한 집사님의 내외분이 학교선생님들이셨는데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로는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중에서 나온 한 신앙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역경의 열매란 신앙인들 중에는 성공적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의 간증이야기 입니다. 그 역경의 열매의 한명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산 경남지역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부자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학교선생이었지만 너무 삶을 가볍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에 비하면 선생님 월급은 정말 별 것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급을 타면 저금한 번 하지 않고 쓰기 바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다 모이라는 것입니다. 자손들 앞에 유산상속을 건강할 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산상속이라는 말에 흥분되어 머빌딩이니 땅이니 별장이니 하며 행여 손주들 몫을 못 받을까 하며 학교도 가지 못하게 하고 모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준비한 유산봉투를 예배하고 기도하고 진지하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봉투안에 어떤 유산이 있을까 상상하는 자녀들에게 집에 가서 열어보라는 것입니다. 흥분된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던 저들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물려준 유산은 부동산도 수표도 아닌 그 자손들에게 딱 맞는 붓글씨로 정성스럽게 쓰여진 성경구절이 적은 종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유산으로 믿음을 말씀을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 장로님들은 너무 마음이 상하여 유산봉투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아버지에게 한참을 찾아뵙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산 모두를 사회사업과 복음사역에 쏟겠다하는 아버지가 미웠던 것입니다.
그 후로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고 있던 저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지금은 부족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위하는 것일까요? 사실부터는 자식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해보지만 자식의 인생에 있어 부모에게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도 모든 것을 자식에게 해 주고 싶은데 나중을 보면 해 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요구를 하며 많은 것을 줄 것 같지만 율법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질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완전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율법은 오해를 받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율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며 우리를 죽이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율법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사라에게 죄인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만 율법은 죽어서도 죽은 줄 모르고 사망에 매여서도 사망에 매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율법은 인생에게 사망에 매여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보니 율법이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율법이 나를 죄인 만들고 율법이 나를 사망의 올무에 갇히게 하는 것을 말입니다. 아마도 율법이 사람이라면 억울 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알려주었을 뿐인데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알려주었을 뿐인데 죄를 짓게 한 주범으로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줄로 모르고 죽어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죽은 사람이요 그대로 있다가는 또 하나의 사망이 다가 올 것이요 알려 주었을 뿐인데 사망의 올무에 갇히게 한 주범으로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있는데 왜 죽었음을 알려주어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인가 억지를 부려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모르고 살게 두지 왜 죄인임을 알려주어 이처럼 괴롭게 하는 것인가 억지를 부려봅니다. 그러나 암 환자가 있는데 암이 있음을 알려주지 않고 그냥 소화만 되지 않을 뿐이라 위로한다하여 그것이 해답이겠습니까? 환자를 진찰한 의사가 당신은 암이요 알려주었다해서 누구도 내게 의사가 암을 주었다 오해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면서도 할 수 없는 것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며 합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 율법이 줄 수 없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인줄 모르고 죄인된 사람에게 죄인됨을 알려 그 죄를 해결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용서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죽어 있음에도 죽어 있는 줄 모르는 사람에게 죽어 있음을 알려주어 생명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려 주지만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가 어떤 것인가 알려주지만 오히려 그 율법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도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주목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그리 할 수 없는 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율법의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데 그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바 완전하고 흠이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율법이 그리할 수 없다는 것인가 육신이 연약하여 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그 율법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향하여 너는 죄인이야 죄인임을 알려주면서 너는 죽은 자야 하며 사망에 매여 있는 자임을 알려주면서 나 율법을 통과하여 저쪽 생명의 길로 들어서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육신이 연약하여 그것을 통과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육신이 율법앞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보려고 많이 애써보지만 결국 율법앞에서 연약한 육신은 무능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신으로 하여금 체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육신으로 하여금 무능한 자를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은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당해낼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어느정도였습니까 처음 법앞에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은 단 하나의 법앞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저에게 허락되었지만 금지된 단 하나의 법마져 지킬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입니다. 율법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약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해도 육신이 너무 연약하여 그 약을 소화시킬 수없다면 그 약은 연약한 육신에게는 독약이 되는 것입니다. 의사도 수술을 앞두고 그 환자가 수술한 우에 회복할 만한 체력이 있는가 검사한 후에 칼을 댑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회복할 능력이 없다면 의사도 칼을 대지 않습니다. 율법이 문제가 있어 우리를 죄인임을 알려만 주고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문제가 있어 우리를 사망에 매여 있음을 알려만 주고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으로 온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죄하거나 죽이는 법이 아닙니다. 그 율법안에도 용서받는 길이 있고 사망에서 자유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단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힘이 육신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있거나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삶의 원리가 떠 오릅니다.

부부에게 문제가 생겼을때에는 일방적으로 남편이나 아내에게 문제가 있거나 나빠서가 아닙니다. 처음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처음에는 그렇게도 사랑하며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람하고만 있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랑스럽던 사람이 그에게 모든 것을 걸어도 된다 느꼈던 사람이 왜 갑자기 힘들어 졌습니까? 이러할때 거의 일방적인 경우도 없습니다. 물론 상대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꼭 그가 나빠서라기보다는 내가 연약하여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연약하여 내게 문제가 있구나 이것이 인정될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여깁니다. 왜입니까?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행하신다는 것입니까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시며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 하는지 벌써 성도님들은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 말입니다. 왜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임을 율법을 통해서 안 사람들에게 용서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망에 매여 있음을 안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던 생명의 성령의 법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율법처럼 연약한 육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알게 하고 복음을 통해 용서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사망이 있음을 알게하고 복음을 통해 생명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연약한 육신에게 율법처럼 무엇을 요구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동참게 하는 복음입니다.

창18:22-33 에 나오는 소돔성 멸망의 계획을 알려줍니다. 불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하함에게 알려주신 바 된 이야기였습니다. 소돔의 죄질이 심판의 기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아브라함에게 이 소식을 미리 알려주셨을까요? 단순히 심판이 목적이면 그냥 심판하시면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용서였습니다. 소돔성도 용서하고픈 하나님이 아브라하에게 알려주어 용서의 조건을 총족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시작합니다. 의인 50 45 40 35 30 20 아브라함은 조금씩 내려가며 기도를 중단해버립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마지막선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정말 데려가시는 것이 목적이면 하나님이 그냥 데려 가시면 되는데 왜 알려 주십니까 하나님은 용서가 본질입니다.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은 15년을 연장시켜 주십니다.

민수기에서 보더라도 광야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모세는 기도합니다. 이들대신 자신을 지옥에 보내달라는 용서를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못 이기는 척하고 용서합니다. 우리도 값없이 용서받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값이 없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심판이 마땅합니다. 죄와 사망의 기준에 이미 넘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용서입니다. 그러나 용서의 조건의 충족되지 않으면 용서가 없습니다.

3절 말씀이 바로 용서의 조건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성육신의 사건 하나님의 사람이 되심입니다. 아들로 오십니다. 3절에서 죄라는 말이 세번나옵니다. 죄를 인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죄를 정하사 지금 이 말씀은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목적과 신분과 성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를 인하여 입니다. 이 말이 레위기 안에서만 50번이 나옵니다. 죄를 인하여 죄때문에 양이 죽어야 하고 죄를 인하여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지만 바로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육신 곧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말해줍니다. 예수가 죄 때문에 오셔야 했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속죄의 보혈을 흘려 속죄의 제물이 되시려고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그 죄는 우리의 죄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를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고백하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입니다. 빌2:6-7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육신의 모양으로의 헬라어는 원문이 같습니다. [엔호모이오마티]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육신의 모양으로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지만 성육신하셨지만 죄 있는 우리와 똑 같은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똑같이가 아니라 똑 같은 모양으로입니다. 무엇입니까 같은 모양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을 갖고 세상에 오셨지만 죄는 없이 오신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하지 않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하셨습니다. 왜 제가 이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부처님과 같이 4대 성인중에 한 사람으로 여기는 듯한 종교다원주의사상이 믿음 영성이 약해진 교회 기독교안에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히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과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합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보다는 죄 있는 인간의 신분으로 오시어 용서의 조건 율법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입니다. 죄는 없으신 것입니다.또 하나 무엇입니까 죄를 정하사 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 있다 법적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양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죄를 안수를 통해 전가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죄 있는 모양이 되었습니까? 내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은 율법처럼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으로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내 죄로 인해 내가 죽어야 할 구원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에 참여만 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합니다. 하셨나니가 아니라 과거가 아니라 하실 것이고도 아닙니다. 미래형도 아닙니다. 하시며 입니다. 현재형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죄를 정하사 예수의 죽으시는 모습속에서 내 죄가 전가되었음을 용서 받은 내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

4절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 합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앞에서 무너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들로 오시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놀랍게 복음을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하며 성령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갔다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대로 순종할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참으로 육신이 연약하여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안된다는데 성령님은 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되는데 성령이 우리속에서 역사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연약한 육신안에서가 아닙니다. 복음 그리고 성령안에서입니다.이런말 아시지요 기는 놈 위에 걷는 놈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다음에는 나는 놈위에 붙어다니는 놈이라 말을 말입니다. 우리는 날개가 없기에 그냥은 날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습니다. 나는 존재에 붙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같이 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지금도 여전히 연약합니다. 복음을 영접했지만 우리 힘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원하는 수준까지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 붙어 있으면 가는 것입니다. 같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혼자 할 수 없는 것 함께 하십니다. 절대 혼자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안에서 오늘도 우리는 율법을 충복시키어나가는 것이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 성화라 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율법을 다 치워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충족시켜 성화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율법앞에 있는 것이 아니면 구원받은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성화를 이루어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예수로 성화되어 가장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오늘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를 살게하는 성령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 아멘 -
(유재명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