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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강해(10) : 나라와 권세와 영광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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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권세와 영광”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입니다. 송영부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구절이 원래 성경에 포함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성경 본문을 확정해야 합니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괄호가 쳐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이 구절이 주요 성경 사본에 빠져 있고 소수 성경 사본에만 나타나 있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원래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인쇄술이나 책 만드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을 성경 사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본들 중 아주 정확하고 유력한 사본들에서 이 송영부가 빠져 있고, 연대적으로 좀 후기의 사본들에서 이 송영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송영부는 예수님의 직접적 말씀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응답의 찬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위대한 주기도문의 여섯 가지 간구를 마치고 나자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고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 한 것입니다.

이는 시편이 그렇습니다. 시편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간구과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어느 때까지 입니까?’ 하고 부르짖지만 그 마지막은 ‘할렐루야’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송영으로 맺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준 주기도문의 마지막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마지막 송영부를 주기도문의 마무리 송영으로 고백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응답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찬송가나 성경 앞 뒷장에 실려 있는 주기도문 모범에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되어 있어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없는 단어 ‘대개’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낭송하면서도 ‘대개’라는 뜻을 모르고 반복할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란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일의 큰 원칙으로 보건데’라는 뜻입니다. 이 말 뜻도 어렵지요? 헬라어 원문으로는 ‘호티’인데 그 뜻은 ‘왜냐하면’이라는 논리적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입니다. 영어에서는 f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래 1950년대에 한글 개역판으로 번역하면서 이 ‘대개’라는 단어가 마치 ‘대충’, ‘대체로’ 등의 부정적인 어감처럼 들린다 하여 빼버렸지만 찬송가에는 교회 전통적 고백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결국 ‘대개’를 포한한 마지막 송영부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첫째,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찬양이며, 둘째, ‘주님은 마땅히 우리의 기도와 찬양을 받으실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라와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처럼 통치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국가를 말합니다.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지만 영원히 지속된 나라가 없습니다. 고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징기스칸, 나폴레옹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몇 백 년을 지속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는 영원하다는 고백입니다. 다니엘 서에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 나라를 파하는 공중에 뜨인 돌에 비유합니다.

느브갓네살이라는 바벨론 왕이 꿈을 꿉니다. 왕이 꿈속에서 큰 신상을 보는데 그 우상의 머리가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 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고, 그 발은 철과 진흙입니다. 이 두려운 신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뜨인 돌 하나가 날아들더니 그 우상을 쳐서 산산 조각을 내버리더니 그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상을 구성하고 있는 정금과 은과 놋과 철과 진흙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세상 나라들입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 등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영원히 지속하지 못할 세상 나라들입니다. 이 우상을 깨뜨리고 태산을 이루는 뜨인 돌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다니엘은 그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세상 나라는 잠깐입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우리는 ‘나라가 하나님께 영원히 있옵나이다’ 라는 주기도문의 송영을 통해 이 모든 나라의 궁극적인 통치자는 우리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 몸은 비록 세상 나라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과 도덕을 지키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헌법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어느 나라에 속한 사람인지 소속을 분명히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으실 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초대교회 교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기에도 많은 박해들이 있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편의 기자들처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1,4)하며 영원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자는 세상 나라의 위력에 굴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의 절망에 함께 절망하지 않습니다. 최후까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들입니다. 세상 나라는 사라져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도래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권세와

권세는 두나미스 곧 ‘파워’입니다. 파워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모든 파워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은 하나님만이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린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역대기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권세가 주님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28:18)고 선언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예수님을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엡2:21-22).

여러분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 권세를 더 무서워하고, 어둠의 주관자나 악의 영을 더 무서워합니까? 이 고백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사람은 존 낙스입니다. 당시 영국의 여왕은 메리 여왕이었습니다. 이 여왕은 ‘피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종교개혁 세력을 박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메리 여왕이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모든 군대보다 존 녹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 존 낙스 한 사람이 이렇게 위대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세가 가장 위대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세는 군림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권세가 아닙니다. 그 권세는 낮아짐의 권세요 섬김에서 나오는 권세입니다. 우리는 마치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각처에서 그리스도인이 높은 자리에 차지하는 것이 권세 있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권세와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남을 누르는 권세는 자기 자신만 자유롭게 하지 다른 사람은 그 밑에 굴종해야 합니다. 실상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선 사람 또한 불안합니다.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살립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높여줍니다. 마치 바다와 같은 권세입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흘러가지만 결국은 그 물이 모여 큰 대양을 이룹니다. 바다는 위엄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낮아짐의 결과 얻어진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첫부분에 나온 팔복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권세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권세 있는 자이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천국을 약속합니다. 위로와 땅을 약속합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도 낮아지시는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피조물처럼 되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더 높이고 찬양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세는 군림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권세가 아니라 섬기고 낮아지는 겸손한 권세입니다.

영광이

모든 영광도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이 영광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시가행진을 하며 군중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것과 같은 승리의 영광입니다. 세상에 많은 신이 있고, 세상에 많은 군왕과 세력들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인 승리의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승리의 영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영예의 영광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그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불행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인간이 취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은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탑을 쌓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인간의 이름을 빛내자는 의도입니다. 옛날에는 인간 왕이나 황제가 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현대는 어떤 개인의 영광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 집단 자체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자신의 이성, 경험, 윤리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인간은 신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은 우주라는 자연의 일부이며 그 앞에서 일부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폭력이나 군림이 아닙니다. 섬김입니다.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신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면 진짜 주인께서 오실 때 내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주기도문의 기도를 통해서 인간들은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칼빈은 예정론으로 유명합니다.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미리 결정했다는 교리입니다. 이 예정론을 주장하게 된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입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전지하고 전능하신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우리의 구원도 미리 알고 계시며 미리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정을 못한다면 그 신은 전능한 영광의 신이 아니라 부족한 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예정론 앞에서 인간은 자기주장이나 논리나 자기 의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선택하심 앞에 단지 찬양하고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칼빈의 일화 중에 예정론과 관련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칼빈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칼빈의 예정론은 받아들이겠는데 유기론(遺棄論), 즉 하나님께서 미리 버림 받을 자를 택정하셨다는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배된다고 하여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임종을 앞 둔 칼빈에게 가서 유기론은 취소하는 게 좋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때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도 어쩔 수 없다. 성경에 그렇게 씌여 있다.” 칼빈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기주장이나 경험보다 늘 성서를 앞세웠습니다.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인정이요, 신의 영광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이 앞서가는 시대에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지구는 돌아가고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저에게도 이 주기도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첫 기도가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가서 한 선배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여름에 교회 청년부에서 주관하는 수련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철원 한탄강가의 대한수도원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두 손을 들고 ‘주여’ 소리치며 기도하는데 왠지 광신도들처럼 느껴져 교회 프로그램에 좀처럼 동화될 수 없었습니다. 수련회 내내 몰래 빠져나와 한탄강에서 발을 담그며 놀았지 좀처럼 마음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 마지막 날이 되니까 갑자기 허전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내려간다면 소중한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왔는데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밤 모두 자는데 저는 강가로 나가서 철야기도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곳곳에 있는 바위 위에서 밤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밤 기도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뒤에서 무언가 달려들 것 같고 머리가 쭈빗하고 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는 분 가까이 가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하는 기도라 기도를 어떻게 할 줄 몰랐습니다. 한 1-2분 기도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가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새도록 주기도문만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시든지 무슨 일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 삶이 그때 기도했던 주기도문 대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최고 관심은 하나님 나라며 그의 영광입니다. 저는 항상 제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생각합니다. 제가 기도할 때 가장 잘 되는 기도가 하나님 ‘저를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옵소서.’ ‘저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 살아계심을 보여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마지막의 이 송영부는 앞에서 드렸던 여섯 가지 간구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기도가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권세가 또한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영광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또한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말씀하십니다.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자기 기도의 능력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도의 시작과 마무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항상 가득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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