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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처럼 사람 대하기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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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 영화인의 축제 가운데 하나인 제 4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원로 감독인 유현목 감독이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1948년부터 극영화를 제작한 유 감독의 60여년 가까운 영화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은 이범선 씨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오발탄>이 있습니다. <오발탄>은 한국 전쟁 이후 그 아픔을 넘어서지 못하고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현실, 그 힘겨운 현실로 인하여 가족이 해체되어가는 것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철호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부인과 함께 살아가는데, 주인공의 문제는 치통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치통은 사실은 치통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정신이상으로 ‘미친 늙은이’로 그려진 그의 어머니, ‘양공주’가 된 여동생, 강도가 된 남동생, 게다가 만삭인 아내는 곧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즉 그의 치통은 그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와 고통 때문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단순히 치과병원으로만 데려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현목 감독은 이러한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현실을 속깊이 드러내어 관객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이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것보다 그들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현목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들의 그 내면,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러한 모습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과 같습니다.

2. 주님이 사람을 대하신 방법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사역의 많은 시간을 바치셨던 갈릴리 전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신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지도자들과 확연히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이 보신 사람들의 형편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던 주님은 그가 보시고 만나신 무리들에 대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한다고 보셨습니다.

여기서 “고생한다(σκυλλω, 스퀼로)”는 말은 ‘가죽을 벗기다’, ‘째다, 찢다, ~을 난도질 하다, 갈기갈기 썰다’,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크고 작은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만난 무리들은 마치 주인 없는 양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기는 것처럼, 또는 도살장으로 끌려간 양이 도살되는 것처럼 보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신 관점이 소개된 두 번째로 말은 “유리한다”는 것입니다. 이 “유리한다(ριπτω, 립토)”는 말은 ‘내던지다, 팽개치다’라는 뜻입니다. 통상적으로 이 말은 어떤 물건을 던져버리는 것을 뜻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모세가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경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십계명 돌 판을 내던져 깨트린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땅에 던지는 행위는 그것을 완전히 버리거나 철저하게 멸절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무리들을 이렇게 보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을 직접 다스리는 통치자 역시 에돔 사람으로서 외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극심한 가난과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었는데요, 대낮에 4, 5 천 명의 남자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것으로 보면, 당시 실업, 즉 직장이 없어 방황하며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먹지 못함으로 인하여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환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정치와 돈과 명예욕에 빠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무관심했고, 또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자기 사리사욕에 젖어 백성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백성들에게 지기 어려운 율법의 짐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이 그때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형편도 동일합니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위협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속적으로 건드리고 있습니다. 지독한 불경기와 늘어가는 실업률은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이 발생하고, 또 이름을 붙이는 대로 하나의 질병이 되는 다양한 정신질환을 비롯하여 난치병 불치병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은 방황하고, 젊은이들은 소망을 버린 채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을 보셔도 “고생하며 유리한다”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고생과 수고를 다 아시고 가슴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 주님께서 무리들을 보시면서 “고생하며 유리한다” 하신 것은 경제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가 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오신 성자를 볼 수 없음에서 온 영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36세의 어느 주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10년 차에 접어드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두 딸도 탈 없이 자라줬고, 남편하고의 사이도 원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얼마 전부터 심하게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소녀처럼 길거리 낙엽만 봐도 가슴이 저렸고, 자기한테는 남편 말고 다른 애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새로운 사람이 찾아올 것만 같은 생각에 서울역까지 마중을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대낮에도 혼자서 거리를 배회했고, 각종 전시회도 쫓아다녔는데, 이런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전화방 광고문을 읽게 되었고, 호기심에 전화를 걸어 낯선 사내와의 통화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는 “얼굴 한 번 보자”고 끈질기게 졸라대는 남자의 요구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이 글을 올리면서 그 제목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유 없는 방황”이었습니다. 자신의 방황에 대해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사십대의 방황”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사십의 방황은
붙잡는 사람 만날 사람 하나 없지만
바람 부는 날 가슴 시리게 울렁이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친 듯이 가슴이 먼저 빗속의 어딘가를 향해서 젖어든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함께 세월의 연륜 앞에 굴복해 버릴 줄 알았는데
겨울의 스산한 바람에도 온몸엔 마음이 시려 전율이 흐르고

시간을 초월한 마음속의 감성은
어디론가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서
자꾸자꾸 뻗어 오르고 싶어 한다. …
하던 일 접어두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것을

갈수록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의 파도는
더욱 거센 물살을 일으키고
처참히 부서져 깨어질 줄 알면서
여전히 바람의 유혹에 더 없이 무력하기만 한데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더없이 푸른 하늘도
회색빛 높게 떠 흘러가는 쪽빛 구름도
창가에 투명하게 비치는 햇살도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코끝의 라일락 향기도
그 모두가 다 내 품어야 할 유혹임을
끝없는 내 마음의 반란임을


지금 말씀드린 이 여인의 이야기나, 이 이상한 시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러한 방황의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의 영혼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즉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공허요 외로움입니다.

2)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신 주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주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σπλαγχνιζομαι,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말은 ‘내장, 내부기관’에서 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아주 격렬한 감정, 특별히 애정 때문에 몸속의 내장들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내부의 장이 꼬이거나 속이 뒤틀리듯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성과 촌에서 만난 사람들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셨고, 그로 인하여 무척이나 민망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요? 그들이 너무 너무 불쌍해서 창자가 끊어질 것 같고, 속이 뒤틀리고 뒤집어질 것 같이 아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가지고 높아보여도 주님과 그 복음을 모르는 것 때문에 그들이 정말 불쌍히 여겨지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립니까? 혹시 여러분은 그들이 가진 것 때문에 기가 죽고, 배운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높은 자리 때문에 쫄지는 않습니까? 또 이 혼탁한 세상과 입에 담기 부끄러운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 종종 감당키 어려운 사람들을 대할 때 분노하고 저주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것과,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사랑으로 불쌍히 여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민망히 여기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 세상과 사람들을 대할 태도입니다!

3) 주님의 그 다음 태도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심으로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축복,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의 민망한 마음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일을 같이 할 일군, 주님의 일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그것 때문에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무엇보다 영적인 문제 가운데 빠져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 무리들을 주님의 심장으로 바라 볼 사람, 주님처럼 그들과 함께 아파할 사람, 그리고 주님처럼 그들을 살피고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치유할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혼자서 모든 사람의 문제를 다 해결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충성된 사람들의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이루려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군들을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소망과 사랑을 주는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는가? 나의 일을 맡아 이들을 섬길 사람은 없는가?” 주님의 가슴, 주님의 심장을 갖고서 주님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는 이들을 민망히 여길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면 제때 베어야지 그대로 두면 썩어들어 갑니다. 과일도 제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는데, 그 상태로 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질 것입니다. 이들을 위한 주님의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빛을 주어 어둠에서 빛으로 이들에게 생명을 주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일군을 찾으십니다. 모두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무엇이 되든지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군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저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질 자 없을까?” 여러분은 이 부르심이 들립니까? 이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 주님처럼 사람을 대하기

모 대학 교수가 ‘눈’에 관한 책을 출간했습니다. 인간의 눈을 통해 인식과 사유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책입니다. 그에 따르면 눈은 우리의 모든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하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한 감옥이다 … 언제나 부분만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모든 인식 작용의 한계다. 그리고 부분만 파악하면서 그것을 전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식 작용의 모순이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 이면,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리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던 주님께서 당신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당신의 마음으로 무리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섬길 일군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과 복음 안에서 누리를 축복과 풍성한 삶을 전할 일군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찾으시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군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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