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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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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5 : 21 - 37절           
제목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스펄전 목사의 설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새 한 마리가 교회당 안에 날아 들어왔습니다.
유리로 된 교회천정 채광창으로 날아 올라가려다 부딪쳐 떨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기진맥진 힘이 다 빠져서 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엎드려서 보니 낮은 곳에 열린 창문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들어올 때도 이 낮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높이만 날아오려니 나가는 창문이 보이지 않고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도 이 비유처럼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가면 창문이 열린 것이 보일 것입니다.
산상수훈 중 오늘 본문말씀부터 예수님은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살인, 간음, 맹세, 보복,
      나아가 구제, 기도, 금식, 비판 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주제들을 너희가 지금까지 들은 것보다 
      새롭게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시며 정의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주제들을 새롭게 풀어내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신앙과 윤리관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으로 첫 번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으로
                첫 번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21-22절)
21절에 [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 
여기에 `옛 사람들에게 말한바`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았고, 그 계명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그 계명을 중심으로 율법의 말씀들이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 계명들에 보면 출20:13절 신5:17절에 나오는 제6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계명을 들었는데 그 계명에 의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물론 십계명에 심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해석하고 세부적인 사항을 정리한 율법서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살인하면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야기 한다`라고 하시며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관과는 다르게 이야기 하십니다.
무어라고 말씀십니까?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일반적으로는 화내고 욕했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화 한번 내고 욕 한번 한 것을
    살인한 자와 같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바로 살인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준 육체적인 상처는 대체로 아뭅니다. 
      그러나 마음에 준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여기에 ‘라가’라고 하는 말은 `어리석은 놈``멍청한 놈`과 같은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죄는
육체에 상처를 주는 가시적인 죄와 함께 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법에서도
    누구를 미워했다거나 화냈다고 해서 처벌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외모와 함께 중심을 보시기에,
    중심의 죄들을 낱낱이 보시고 그 죄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보다 내면의 숨은 동기를 더 중요시하시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본원인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살인의 동기는 미운 감정입니다. 요한1서3:15절에
사도 요한은 [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 ] 라고 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동생을 시기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상대방의 장점보다도 약점을 찾아내어 비판하게 됩니다.
살인이란? 단순히 육체의 생명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파괴하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살인 행위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함으로써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기(氣)를 죽이는 것도 살인 행위요,
또 불신과 회의에 찬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믿음을 실족케 하는 것도 살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자는 살인자와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믿음을 심고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착한 것 같아도, 여러분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도 
우리 인간들은 모두 죄의 근성을 그 속에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난 것 말고
    근본적인 죄의 근성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중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산상보훈을 통해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1) 8복을 통해 복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복된 삶을 살아라.
  그 복된 삶이 무엇이냐?
  바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삶 - 어떻게?
                  너희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착한 행실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 바로 세상 속에서
                      즉 인간관계에서 나타나야한다.
그 인간관계의 첫 번째 가르침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 - 너희 속에 살인의 동기가 되는 미워하는 마음을 잘라내라.

그리고 인간관계가 불편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아무리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23-24절 말씀이 나옵니다.
2. 바른 인간관계가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입니까?(23-26절)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그러니 예배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시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원망과 미움을 갖게 하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
      그 사람의 헌신과 헌물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서로간의 수평적 관계에서도 화목하며 사랑하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24절에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 ] 고 하셨습니다.
`먼저 가서` 화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먼저 못 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대신하여 갚아주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제사의식보다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목은 필수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렸다고 그만이 아닙니다.
새의 날개가 두개이듯이 이 두 관계가 병들지 않고 온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보좌로 비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져 세상살이의 맛을 내고,
          빛처럼 비추어 어두움을 물리치는
      화목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세상을,
      교회와 이웃을 화목하게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롬12:10절에 사도 바울도
[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 고 권면합니다.

특히 인간과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가
    선 사과 후 변명입니다.
금방 사과하면 문제없이 해결될 수 있을 일인데도
    사과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려고 하지 않고 또 알고 있어도 미루곤 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사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려워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볼 것을 염려하기도 합니다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보아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의 두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나는 간음에 대해
            얼마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27-32절)
한번 살펴보세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관계의 문제는 싸움 즉 전쟁과 섹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또한 그 근본적인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간음하는 행동만큼이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또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동만을 중시하던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을 정죄하시면서,
행동뿐만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생각이나 동기까지도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음욕을 품지 아니할 수 있느냐?           
루터가 이런 비유를 말합니다.
우리 머리에는 수많은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닙니다.
하지만 새들이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들어 내려와 둥지를 틀려고 하면
    `워이, 워이, 저리 물러가라` 하고 쫓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음란한 생각을 들 때 이를 물리치기보다
    즐기고 싶은 것이 문제입니다.
상상으로 즐기다 보면 점점 욕망이 커져서
    나중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세력에 사로 잡혀   
자신도 원치 않게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성격을 취급하신 후 그것을 다루어야 할 방법까지 제시하십니다.
29-30절에 `너희를 죄짓게 하는 것이 오른눈이나 오른손이라면 빼어 버리고 찍어 버리라`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어떤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나 걸림돌이 된다면
    반드시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육신에서 귀중한 부분인 눈과 손을 택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른 눈과 오른 손을
    왼 눈과 왼 손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생각의 경향을 반영하십니다.
그리고 눈이 성적인 범죄를 유발한다는 책망을 기억합니다.
민15:37-39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방종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모든 것이 성문화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5:3절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

우리는 정욕을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음란한 영화나 음란 비디오, 음란 CD는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면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정욕의 불씨가 있습니다.
이 불씨를 가지고 기름에 가까이 가면 불이 붙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름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계18장에서 세상을 음녀 바벨론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분야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분야는 한 꺼풀만 들추면 음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 캠프스 말할 것도 없습니다. 
Y대학의 M교수는
“사랑은 섹스, 섹스는 쾌락, 즐겨라. 즐거운 섹스를 위해서라면
관음, 노출증 등을 적극 활용하라.
프리섹스와 사이버 섹스가 있기 때문에 이젠 독신자도 외롭지 않다”고
부추겨 말하면서
‘미래에는 수많은 상대와 섹스하게 될 것이므로
      결혼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K대학의 M교수가 설파하는 ‘성애찬론’도 여기에 못지않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이제 선택이다. 결혼에 목매달지 말라.
  오늘날 하늘의 법칙처럼 생각하는 일부일처제는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
  성 지식의 범람과 포르노의 전파로 일부일처제는 이제 종말을 고할 것이다. 
일부일처제든 일부 다처제든 본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 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쓴 책들이 대학가에 깊이 파고들고 있고
    이들의 강의가 또한 인기리에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소위 강력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럴 정도니
    그 파급 효과가 얼마나 될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Y대에서 성기 모형을 백주 대낮에 걸어 놓고
    ‘성문화제’가 열렸다고 합니다.

10년 전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 외롭게 부르짖었지요.
    “바꾸라.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
    경영인들이 혁신적인 사고 전환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누라 까지 바꾸는 스와핑(swapping)이
    인기검색어가 되어 있습니다.
커밍아웃이란(Coming Out) 말 들어 보셨지요.
    우리는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성문화에 우리 자녀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집에서도 그렇고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사이버 음란 문화는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바벨론을 거부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영리하기로 이름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여우는 동물 중에서 머리가 좋다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 여우는 바닷속의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물고기 여러분, 바닷속은 위험하니까 뭍에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고 한답니다.
  큰 고래나 상어가 여러분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육지에 올라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물고기 대표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갑론을박, 좀처럼 회의는 끝나지 않습니다.
여우는 머리가 영리하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바닷속에 사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대립됩니다.
고기들은 오랜 숙의를 거듭한 끝에 여우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물고기 대표는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우님, 우리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물속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저녁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준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물고기가 뭍에 나오면 어떻게 되지?” 어린이들은 금방 알아듣습니다.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여우 밥이 되고 말라죽게 된다고 대답합니다.
“바로 그거야.” 아버지의 교훈은 계속됩니다.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살아야지
      아무리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유태인임을 저버릴 수는 없는 거다”
어린이의 마음속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가슴을 울려주는 감동과 각성이 있게 됩니다.
무서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은 유태인으로서의 신분과 정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을         
어린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들려줄 수 있는 신앙의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교훈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4. 예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살인하지 말라 - 미워하고 욕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와 같다.
간음하지 말라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아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철저히 남 미워하지도 말고 욕하지도 말고
    마음에 음욕도 품지 말고 음란물을 보지도 말라 하시는 구나!
맞습니다. 맞는데
우리 가운데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못 지킨 율법인데
    눈만 뜨면 전신에 음란한 세상인데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가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보다도,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이미 너희들은 다 간음을 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간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을 한 자이기 때문에
노력이 무익하며 앞으로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깨끗치 않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3:20절에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그렇게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가지고도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한 행위로 나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마음을 막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 해서 하늘나라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귀하신 일은 볼 수가 없고
        자기의 잘잘못에만 매여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력하고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대신 이루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서론의 예화 기억하시죠?  낮아져야 합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 베풀어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산상보훈 첫 말씀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욕을 품지 않기 위해
    눈을 뽑아내고 손을 찍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눈을 뽑아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도토리나무에 잎들이 낙엽이 되어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떨어지는 나무 잎이 있습니다.
한 겨울 북풍한설 찬바람이 불어도 끝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떨어집니까?
봄이 와 새싹이 돋나나면 나머지 한 잎마저 다 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성령의 은혜만이
      나를 미움과 욕에서 음욕에서 벗어나게 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교훈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 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맹세에 대해 철저히 강조할까요?(33-37절)
33절 부터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맹세하면서
      자신의 진실함과 결연한 의지를 입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작은 문제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들먹이며 맹세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외식과 거짓이 난무하고
      서로간의 신뢰조차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어떠한 맹세도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맹세 그 자체를 금하신 것은 아니라,
마음에 진실성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맹세를 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레19:12절에
[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아니면 이론 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보다 큰 무엇인가를 빌어서 합리화를 시키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도무지 맹세치 말라`라고 하신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맹세를 전통적으로 거부해온 퀘이커교도(Quakers)와 같이
`어떠한 형태나 형식으로도 맹세를 절대로 금한다`.
그래서 그들은 법원에서 성경위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조차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하는 의미는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신 그 말씀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자랑을 위해서 구하기 위하여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나 저주에 성스러운 칭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세를 하면서 `거짓`을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한 진실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네` `아니오` 라고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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