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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요 3: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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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영생(Eternal Life)에 대한 경험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영생을 소유한다는 것은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추상적일 수 없듯이 영생 또한 각자의 체험이 아니라고 해서 어떤 고상한 이상론과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중생을 경험한 자의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은 영적으로 현실적 감각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체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의 영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시편 90편 2절에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영생이 있다는 소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이나 남녀노유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세상에 오고 오는 인생들에게 예수는 저들의 생애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생명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사건은 마침내 그의 이야기(his story), 바로 역사(history)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세계역사는 예수를 중심하고 기원전(B.C), 주후(A.D)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주전(B.C)의 불신앙의 삶이 있고 주후(A.D) 곧 신앙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를 중심하고 인간 개인의 역사와 인류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떠나서는 역사를 만들거나 역사를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구속사이고 구속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Ⅰ.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외아들입니다. 외아들이란 말은 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한 아들(A son of God)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그 아들(The son of God)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 성부, 그 성자, 그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할 때 각위 위에 정관사가 붙은 것을 보면 이름은 단수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엘로힘'( )이라고 할 때도 하나님은 복수인데 일하는 이는 단수입니다. "창조하시니라"하므로 한 사람이 하는 것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개념으로 부모로부터의 출생 개념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성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는 오직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3위의 개념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 세계의 그 무엇에도 비유될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3위 하나님을 각각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여 대문자 'God'을 사용했습니다. 3분의 1의 God이 아닙니다. 3분의 1(moment)도 아닙니다. 3분의 1의 모양(modus)도 아닙니다.
이 3위 하나님은 모두 인격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절대적으로 일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성부에게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이면서도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질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본체이시며 그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지 먼저 지음 받은 자가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지음 받은 것과 먼저 나신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이요 만물이 그에게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도 과거 미완료이므로 태초 이전에 계시다가 계속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생 시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절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욥기 38장 7절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천사보다 뛰어나시고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의 부활로 입증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창세 전에 계신 영원한 아들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 5절에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요 5:24).

아들 외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합니다(요 5:23).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그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요 5:21-2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성육신하신 것입니다(빌 2:6).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출 33:20-21).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셔서 그의 말씀과 능력의 손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Ⅱ. 오직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는 것 입니다.

본문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정죄의 선고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계속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무죄하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독생 성자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집행유예가 아닙니다. 이미 그의 불신앙만으로 정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이름입니다. 그 뜻은 구약의 '여호수아'에서 나온 구원입니다. 이 사실을 가브리엘은 다시 예수 탄생시에 확인하여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님의 호칭을 예수로 통칭하고 있습니다.

Ⅲ. 오직 예수만이 사랑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

본문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씀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이 확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에로스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이성적이고 정욕적으로 보편화된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스톨케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가족간의 애정, 동족간의 혈통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스톨케 사랑은 육으로 난 것입니다. 스톨케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스톨케 사랑 가지고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눅 14:25-27). 스톨케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오해하였습니다(마 20:20-22).
하나님의 사랑은 필레오적인 사랑은 아닙니다. 즉 우정관계의 사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을 행하실 때 주권적인 행사를 하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갈보리 십자가에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죄 있는 자처럼 넘겨주셨다는 말입니다. 피로 값 주고 자기 백성들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택자 구원에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에 무게를 두지 말고 믿는 자의 구원에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살릴 자를 살리고 나면 죽을 자만이 남는 것은 당연한 원리입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그 어떠한 중립적인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흑백논리만이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조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불변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필연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최우선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목적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타율주의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오고 오는 세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져 온 공개적인 사랑입니다.

Ⅳ. 오직 예수만을 승리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요한복음 2장 1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신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9절에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증했습니다.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과 영생을 보장하는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Ⅴ. 오직 예수만을 임박한 심판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종말신앙).

본문 3장 17-18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7절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심판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사사들 이상의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히 2:17).
예수님의 심판은 좌우로 치우침이나 불공평함이 전혀 없는 공의롭고도 의로운 심판입니다(요 5:30).
예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서 주를 맞이하는 자들과 죽었다가 부활하게 될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을 얻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 성자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사랑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결코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아닙니다. 예수는 여성 해방운동가로 착각해서도 안 되고 민중 운동가로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는 가난을 취미로 삼는 안일한 사람의 편도 아닙니다.
예수는 운명론에 맡겨 살아가는 무책임한 인생의 편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 땅에 정치의 새바람을 몰고 새로운 신당을 꿈꾸었던 자도 아닙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 18:36).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신 독생 성자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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