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울의 재기 (행 18:1~11)

  • 잡초 잡초
  • 457
  • 0

첨부 1


우리들 각자 자신이 추진하는 일들이 계속 되어지는 것은 삶의 기쁨이요, 행복인데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이였던 아덴에서 그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심히 낙심되었고 몸도 극도로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바울은 상당히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에 괴로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서 아주 달라지는 내용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 그 내용을 성경에서 함께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아덴에서 겪었던 바울이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덴에서는 이것과 반대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은 이야기는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서 헬라 철학의 전공자인 이들 앞에서는 철학적 대결을 해야 그래도 내가 유식하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라고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철학적으로 대결한 것이 지난번 사도행전 본문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을 자인하는 말이 오늘 여기 고린도전서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고린도에 와서는 말과 지혜에 아름다운 수식어를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말하려면 수식어를 수없이 써야 합니다. 아주 깊이 있고 논리적인 수식어를 연역적, 귀납적으로 꿰뚫어나가야 그게 철학적인 말이 됩니다. 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수식어를 쓰면서 설교했지만 이제는 아름답게만 꾸미는 말로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겪은 마음고생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그냥 전하겠다. 이것만 내가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지할 때, 그의 마음은 심히 약하여져서 담대해야 될 사람이 “심히 떨었노라”, 그러니까 벌써 성령의 능력은 내 영적인 속에서 약해졌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말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다.”라는 결론을 가지고 이제 이렇게 완전히 복음적 사도의 변신을 한 겁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모습과 고린도에서의 모습은 아주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내용을 보면 아덴에서 경험했던 것에 거의 반영하는 말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낙심한 상태에서 찾아온 고린도는 매우 활발한 도시입니다. 그 당시에 75만의 인구가 살고 있던 항구도시입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런 도시에는 두 가지가 많게 됩니다. 하나는 돈입니다. 거래가 많으니까 경제가 활성화되지만 돈으로 인해 또한 죄가 많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도시일수록 신전이 많은 것이 헬라 대도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 앗시지 신전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신전이 있는 지역을 찾아간 것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은 마음이나 몸의 상태를 보아서는 ‘내가 또 실패하면 어쩌나’하고 도저히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열심히 하다가 한번 딱 꺾여서 침체가 되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치료하는 전문 상담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번아웃(Burnout)이라고 말합니다. 탈진이 되어서 목회하기가 아주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가다가 좌절, 절망 같은 뭔가에 꺾여질 때가 있습니다. ‘어휴, 나는 이거 못하겠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이 망가져버리는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거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전문가들이 상담치료를 하면 또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그런 경우를 만났습니다. 그랬는데 이 치료를 누가 하느냐? ‘안되겠다! 아덴에서의 경험 때문에 큰 사역자 하나가 좌절할지도 모른다!’ 해서 하나님이 바울 챙기기에 나섭니다.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몇 가지 위로의 사건을 고린도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낙심한 바울을 치료해서 다시 재기시키는 역사가 고린도 역사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가,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낙심이 될 때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동역자의 만남은 정말 구세주와 같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똑같습니다. 어느 교회가 영적 능력이 사라져서 망가지는 그런 교회가 될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 하나를 잘 만남으로 교회가 치료가 되어 놀라운 영적 능력의 사역이 되기도 하고, 침체된 나라가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정말 진주와 같이 빛이 나는 나라로 발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도 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침체되었다가 어느 동역자를 만남으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남은 중요한데, 아덴에서 실망한 바울을 하나님이 고린도에서 다시 챙겨서 일으키는 작업으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역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어느 날 “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아라!”라고 해서 고린도로 쫓겨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도 유대인 아닙니까? 추방명령에 의해 쫓겨나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직업이 장막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에 간 바울이 잘 생각한 것인지 잘못 생각한 것인지 ‘내가 어디 취직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생활할게 없으니 마음이 낙심이 되어 ‘어휴, 이거 잘못하면 굶어 죽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취직을 하려고 일을 찾다 보니까 텐트 만드는 천막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 나는 이것의 기술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을 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네, 그러십시오. 같이 일합시다.” 그래서 바울과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학교를 다닌 전문가이며 헬라철학을 전공한 헬라어, 유대어 언어학자입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의 72명 중에 한 사람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최고로 출세한 사람인데도 천막 만드는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생활 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공부를 했던지 제사장들도 자녀들에게 손기술 하나를 가르칩니다. 안 가르치는 자는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 임무로 하는 것 외에 뭐든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 하나씩 습득하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손만 움직이면 충분히 먹고 사는 것이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슨 기술이 있으셨습니까? 목수 기술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데 기술자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굉장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그러면 됐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후원을 할 테니까 바울 선생님은 그 일만 열심히 하십시오.” 그래서 이 만남이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 선생은 이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으며 바울에게 얼마나 큰 충성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서 무엇을 내놓았습니까?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이 바울을 위해서는 우리가 생명을 내놓고 일하자!”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좀 문안하라. 그들은 나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 하면 내가 그들 때문에 고린도에 가서 용기를 얻었고 다시 사역자로 재기를 했고 지금까지 그들이 텐트 공장을 해서 벌은 돈을 나의 선교비로 다 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복음의 사역자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목숨을 바칠 것만큼 나에게 충성을 했다.” 이 만남이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절망적 분위기가 이들을 만남으로 용기가 나고, 경제적, 심적 도움까지도 받았습니다. 사실 바울과 아굴라의 관계는 피차 행복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후원받아서 선교를 많이 할 수 있었으니까 행복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났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행복인 것입니다. 만남 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잘 만나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악연이라는 말과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악연으로 만나서 ‘어휴, 안 만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나는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또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에 두 번 실패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부인이 도망을 가서 실패를 했고, 또 결혼을 했는데 이번은 부인이 도망을 안가서 실패했답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자체가 행복이요, 힘이요, 용기입니다. 사람이 제일 행복을 느끼는 때가 언제입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는 피차 인정했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선교의 제1의 공로자입니다. 목숨이라도 내놓고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이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자기 생명을 바칠 곳을 찾는 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섬겨도 괜찮은 어떤 주인을 만나기를 바라고 만났을 때는 생명을 바쳐가면서 싸워주고 일합니다. 이런 문화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내가 리더의 역할에 서는 것보다도 훌륭하지만 리더를 도와주는 것을 더 행복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회장 누가 되느냐, 우두머리 누가 되느냐 싸움은 우리보다 십분의 일도 안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섰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것에 더 행복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몸 바쳐 충성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있으면 가장 열심히 합니다. 오늘 여기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하는 일을 보고 목이라도 내놓은 정도로 뭐든지 희생해서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곳에도 따라가서 또 도와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마지막에 로마로 갈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 하는 것을 듣고 먼저 로마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돕다가 바울을 돕는다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주의 종을 만나 그가 하는 일을 위해 내가 몸을 바치는 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라고 판단하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고, 아덴에서 겪었던 실망을 고린도에서 위로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오늘 말씀에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예수님 전도와 마찬가지로 회당을 중심해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당에서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회당에서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고린도에는 그 당시에 약 9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회당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이라고 열심히 가서 전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하느냐?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인 유스도의 집을 예비해 두셔서 그 집에서 오늘 말씀대로 1년 6개월 동안 살았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게 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핍박 가운데 유대인의 핍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을 제일 많이 도와준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핍박했고, 가장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부나 어떤 기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는 대한민국에서는 안 통합니다. 기독교가 가장 앞서가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선진국은 정부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합의해서 사회사업을 정부와 함께 추진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양로원을 하나 세우겠습니다. 정부가 반 내고 우리 교회가 반 내서 합시다.” “노인 아파트를 하나 건축하는데 우리 교회가 100만 달러 내겠습니다. 정부가 100만 달러 내십시오.” 정부가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아, 그럽시다. 반씩 내서 우리 합시다.” 안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사회사업은 같이 하자고 해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교회 핍박의 문제가 뭡니까? 믿는 자끼리 복음 전파의 방해자 노릇을 서로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다. 믿는 자끼리 방해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됨으로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고, 유스도를 만나 이방인이지만 그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고, 그 다음으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지금 회당 출입을 금지 당한 바울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저주적인 발언을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유대인이 아닌 회당 전도를 그만하겠다. 이방 전도에 문을 열겠노라.”라고 선언했는데 뜻밖에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세례를 받는 큰 열매를 얻게 되니 바울이 이 만남을 통해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마음의 상처와 어려움이 고린도에 와서 몇 사람을 만남으로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에 빠질 때 그냥 두십니다. 왜 그냥 두시느냐 하면 그것을 겪고 난 다음에라야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내 영 가운데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넘친 곳에 위로가 넘치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이 회당장은 상당히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러 가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회당에서 쫓겨나서 실망하고 있는 바울한테 회당장이 와서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온 집안 식구들이 세례를 받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해본 목회자는 누구나 똑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 인도하러 나가보면 개척교회니까 몇 사람 나와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떤 뜻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 문을 쓱 열고 들어올 때는 그 사람이 누구였던지 간에 목사의 마음에는 너무너무 예쁘고 너무너무 반가워서 가서 그냥 꽉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란 말입니다. ‘어머나! 저 사람이 어떻게 교회로?’ 흥분해가지고 나갈 때는 ‘내가 뭐 줄 것 좀 없나?’ 이건 개척교회를 해본 목사만이 느끼는 심정입니다. 제가 부목사님들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교사의 경험과 개척교회의 경험을 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훌륭하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큰 교회에서 왔다 갔다 하면 이런 것을 모릅니다. 교인들이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보면 영혼 하나가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개척 교회하라고 하면 자신 있습니다. 거기에 은사도 받았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다섯 교회를 개척했는데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이 너무너무 잘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인 한명씩 한명씩 전도하는 것은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나 그것이나 내 마음속 기쁨은 같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나 때문에 교회 하나가 생기고 한사람 두 사람씩 전도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또, 개척교회가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갈보리 교회 올 때 얼마나 염려했는지 교인이 줄면 난 어떡하나? 그때는 볼 것도 없습니다. “어휴, 저 이 목사는 실력도 없어!” 이렇게 되면 목사는 의기소침해서 목회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는 교인 줄 염려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시작했으니까 일 년에 수백 퍼센트 교인이 증가됩니다. 열 사람만 나와도 1,000퍼센트, 두 사람만 나와도 100퍼센트 이렇게 되니까 거기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한명 왔으면 그게 증가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인이 100명 모이면 이것은 황무지에서 얻은 흑진주 같은 교인들입니다. 너무 예쁘고 너무 감사하고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온 기쁨이 말도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개척교회로 지금 세우는 거 아닙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만났고, 유스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바울이 더 신이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에 가서 환상을 선물로 받습니다. 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환상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겁니다. 고린도에 와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챙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에 빠져있는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걸 믿고 하면 됩니다.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가짜 환상을 볼 때가 많습니다. 또, 그냥 꿈 한번 꾼 것을 자기 맘대로 연결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말 추리소설을 쓰는데 유명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체험한 신비적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메섹에서 빛이 비추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음성 들었고, 빛 봤습니다. 유럽 넘어갈 때도 마게도냐에서 환상 가운데 유럽 사람들이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환상을 보고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에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부르니까 옥토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려버리는 환상을 봤습니다. 오늘 네번째로 고린도에서의 환상! 나중에는 입신을 경험해서 삼층천에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마지막에는 밀레노 섬에서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는 독사뱀에 물렸으나 아무 해도 받지 아니해서 토인들이 바울을 보고 “이는 신이라!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다 언제냐? 꼭 필요한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고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느냐? 너희를 책임질 것이다.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거기에 대한 믿음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가 왜 이 모양이야?’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성령을 근심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인도를 주시는데도 그것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없으면, 성령도 그런 사람과는 일을 하기 싫어집니다.

이제 고린도의 바울은 이와 같은 몇 가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십자가 외는 말할 것도 없고 알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제일 교인이 많은 교회를 바울이 세우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환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는 상대가 누구이던지 상관없이 두려워말고 말하세요.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내가 말해봤자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을 사람이다.” 내가 그냥 결정을 해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도 안 나타납니다. 내 믿음이 거기 밖에 안 가는데 ‘내가 아무리 기도해봤자 저 사람이 예수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다.’ 먼저 내 마음에 결론을 하고 말을 하니 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말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심히 떨리는 약함을 가지고 의기소침해서 실망하고 낙담한 상태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에게 하나님은 준비하셨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유스도의 집을 주셨습니다. 회당장을 보내시고, 나중에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개인적 생활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가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 받을 때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내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 오늘 예배 나오신 온 교우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선교 이정표와 그의 순례 과정을 저희들이 보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바울의 선교에 나타났는가?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을 저희들이 잘 해석함으로 그것이 내 개인적인 삶이나 교회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쁨과 행복이 있어지게 하시옵소서. 지금 현재 이 설교를 듣는 형제들 가운데 바울의 아덴과 같은 역사가 있다면 고린도와 같은 역사를 곧 준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