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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경건의 공동체입니다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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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은 민속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이런 명절을 맞이하면 그리스도인들인 경우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문제라든지 불신자 식구들과 만나 어울려 지내야 할 일들 많은 유혹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주부들이 많다고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을 해보니까 명절증후군들은 며느리만 걸리는 것이 아니고 요즘은 시어머니들도 명절증후군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명절을중심으로 불신자 식구와 친척들을 만나는 시간은 일년에 고작해야 두세번에 불과합니다. 오늘날같이 점점 삭막한 세상 속에서 이런 가족친척들간의 만남의 풍속은 상당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만남을 의미있게 갖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서 바르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명절이나 어떤 고난이나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오히려 명절과 같은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경건의 능력을 발하는 기회로 여겨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믿고 새사람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도 보면 예수님믿기 이전과 비교하여 우리의 신분 우리의 지위 인격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속에는 미성숙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야고보기자가 생활하던 초대교회도 완전히 변화되지 못한 미성숙한 삶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삶의 경건이 실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다루어갈 때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와 어려움을 쉬쉬하면서 속으로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직면하면서 바로 삶으로 실천하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경건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말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19-20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여기 말과 관련하여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통 보면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말을 잘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면서 “듣는자가 복있는 사람이다”말씀하셨습니다. 이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듣는 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들을때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듣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잘들으려면 내 생각을 접고 들으려고 하는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55:8-9)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하면서 듣습니다. 아멘이란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동의합니다”의미입니다. 시대마다 부흥이 일어났던 때의 한결같은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먼저 교회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말씀을 먼저 듣는 자리 그 기회를 잘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먼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경건한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들을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습니까?
남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남의 말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멈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듣습니다.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공감”하면서 듣습니다. 슬픈 말은 함께 슬퍼하면서 듣습니다. 기쁜 말은 함께 기뻐하면서 듣습니다. 아픔과 고통의 말은 함께 아파하면서 그 말을 듣습니다. 때론 고개를 끄덕이면서 때로는 맞장구를 쳐주면서 때로는 눈을 마주치면서 그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명절같은 날에도 내가 많은 말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은 말을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왜 말을 더디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보통 말을 빨리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보통 분노도 빨리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말을 빨리하면 실수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빨리 한다는 것은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그 입술을 제어하는 사람이 지혜가 있습니다. 잠언10:19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잠언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언제 말이 빨라지고 말이 많아집니까?
내 속에 분이 찰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하기도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합니다. 말과 나의 분노와 관련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아마 우리들 중에는 급한 분노에 의해서 실수할 말들 해가 될 말들을 막 쏱아놓고 난 뒤에 후회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생활에서 우리가 말의 실수와 상처로 인해서 공동체가 하나되지 못하고 지체들끼리 연합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분노를 품고 감정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그것이 아무리 의로운 말이라고 해도 벌서 독기를 품고 있으면 그 말은 의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혹시 지금 내삶에 있어서 분노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이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하는 사람의 경우에 그 원인이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 분노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 우리는 분노할까요?

어떤분들은 태어날 때 기질적으로 예민하여 분노를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삶의 과정이 너무 많은 상처로 인해서 항상 신경질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수용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의가 강한 완전주의 성격 때문에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의 의가 많아서 분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하는 삶은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합니다.성경은 우리가 아무리 의로 인한 분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구약에 모세를 통해서 볼 수 잇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 다투게 됩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지면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하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툽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여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이 악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느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차라리 형제들이 죽을때에 함께 죽으면 좋을 뻔 하였다’라고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만 목이 마르고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더 힘이 들고 더 마음 고생이 많습니다. 이런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라. 그리고 너는 회중의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네가 그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명령대로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석 앞에 모으고 말을 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외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는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칩니다.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령하하라고 햇는데 모세는 지팡이를 갖고 반석을 향해 두 번 치면서 명령한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이 불순종으로 인해서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였다‘책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벌로 가나안땅을 밟지 못하는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린아이같이 감정에 포로가 되지 않고 그 감정을 믿음으로 다스릴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말에 덕을 세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여러분들의 언어로 만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격려와 덕을 세우는 한 주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나눔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27절에 소개합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경건의 모습은 나눔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핵심은 약자를 위해 나누는 경건입니다. 그 주요 대상자가 바로 고아와 과부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스스로 삶을 영위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자들입니다. 부모의 도움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할 자인데 홀로 삶과 생활을 꾸려가야 할 자들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이런 어려운 사람들 약자들을 배려하고 돕고 나누는 사람들입니다.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오셧을때 우선적인 관심은 바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는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본보여주신 것입니다.

초대예루살렘교회를 보면 부흥의 새로운 변화를 봅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되는 예루살렘교회를 보면 엄청난 부흥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그들 속에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우선적인 모습이 물질의 변화에서 봅니다. 자기의 재산들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의 것으로 공유할 줄 아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5절에 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합니다. 그때 누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까? 바로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초대교회가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의 부흥은 단지 성령님께서 역사하심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감동되어진 사람들의 삶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도 개인적으로 나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물질과 소유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말고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조건없이 주어야 합니다. 조건없이 나의 호주머니를 열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너는 구제할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십니다.

나눔의 삶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일 급선무가 무엇일까요?
문제는 우리 속에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 삶에 문제는 욕심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1장14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에 욕심이 있으면 돈에 시험을 받습니다. 정욕의 욕심이 있으면 여자문제시험에 빠집니다. 명예에 시험이 있으면 명예의 시험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에 적당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욕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욕구를 품고 살아가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먹고 싶은 욕구가 있고 자고 싶은 욕구가 있고 섹스의 욕구가 있고 명예의 욕구가 있습니다. 알고 싶은 지식의 욕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스러운 욕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욕구가 도를 넘어서 욕구를 탐하게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개인적으로 이 길을 가면서 신학교 다닐때 때로는 지금도 책에 대한 욕심,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많이 누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가는 신앙의 기초가 아니라 나를 나타내고 나의 어떤 부분의 탐심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하여서 전에는 다독을 했지만 요즘은 정독을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기도와 묵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책을 사랑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것들이 나에게 들어오면서 나가 굉장히 괴롭습니다. 알고 있고 깨달은 것들을 자꾸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뭔가 아는척하고 난척하는 유혹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것을 내세우려고 하는 교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쌓는 것과 버리는 것,입력과 출력,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이 알고 깨닫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내공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이 깨달을수록 마음은 단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많이 알수록 마음은 점점 어린아이같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문제는 마음이 단순하지 않고 마음이 무언가 가득차있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마음에 세상욕망들이 가득차 있으면 그것들의 기운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에서 가장 경계하는 욕심이 무엇입니까?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욕심을 품게 되면 우리 신앙은 병들게 합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돈의 유혹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돈에 욕심을 갖으면 죄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요즘 매일같이 정치하는 분들이 돈비리 때문에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돈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목사님도 모든 성도들도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의 경건을 실천하는 자로서 살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기자는 야고보서 4장 13절이하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도시에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라고 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내일 일을 알 수 잇습니까?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합니다.우리의 생명이 안개입니다.

아침에 피어나는 안개가 있으면 시야가 가리워져서 운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침해가 솟아나면 순식간에 안개가 없어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이 안개와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생명은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이땅을 떠날 때 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먹고 입고 자고 어느 정도 쓸 돈이 있으면 자족하면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함께 나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명절 같은 때에는 좀 어렵고 힘들어도 더 어렵고 힘든 이웃 친척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번 여러분의 삶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꼭 선물이 아니더라도 만든 음식 준비한 조그마한 정성들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의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27절 하반절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자기를 지켜라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세속에 물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잇는 세상은 분명히 부패한 세상입니다. 어두운 세상입니다.그 세상의 욕심대로 세상의 유행대로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버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몸으로 살라고 하시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곧 세상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잇는 것들을 본받고 가까이하고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정결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사명감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십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소금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카톨릭신학자 중에 카톨릭의 개혁을 외치는 유명한 신학자 중에 한스 쿵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역자들 사제들 목사들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파송된 성직자라고 한다면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그리고 오늘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데 누가 세상에서 정결한 경건의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사명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서 정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는 사명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소금의 사명이 있는 사람은 내가 가는 곳마다 부패한 곳이 정결하게 됩니다. 빛의 사명이 있는 사람은 내가 가는 곳마다 어두운 곳이 밝아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이 맛을 내고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되어야 합니다. 초가 자기를 녹여야 주위를 밝힙니다 .소금도 스스로 녹아야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하기 원하고 맛을 내기 원한다면 좀 손해보고 희생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것은 바로 생명을 내주시면서 희생하셧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누가 질 수 있습니까? 정말 강한 사람만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결하게 거룩하게 무장되어서 세상에서 멋있게 희생할 수 있는 삶으로 날마다 세워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야고보서4:8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까이하는가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경건을 키우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복음의 능력으로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악습관에 매여서 살면 안됩니다. 이제는 새로운 말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 나누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세상에 정결함으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경건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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