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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 그 새 이름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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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그 새 이름 
창세기 32:22-32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What is your name? 
미국 와서 자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직업”을 주로 물었는데, 미국 와 보니 “이름”이더군요.

미국 사람들은 이름 암기에 탁월합니다. 미국인 교수들은 두 번 정도 출석 부르면, 30명가량의 학생들 이름을 다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나는 지난 학기에 겨우 7명이 수강한 과목을 강의했는데, 학기말까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Starbucks에 가면 이름을 꼭 묻습니다. 나는 주로 Americano를 마시는데, "Jim"이라고 대답합니다. 귀찮기도 해서 그러는데, 사실 “짐”이란 왕이 자기를 부를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왕” 아닙니까?

한번은 다른 체인점에 갔더니 그런 게 없다고 합니다. 아니, 이 가게는 그런 게 없어? “내가 뭘 달라고 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Africano"를 달라고 했댑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 자존감(自尊感)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볼 때 자기 이름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 자존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름 찾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한번 자기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우리나라에서 1945년부터 2005년까지 30년 간격으로 가장 흔한 남녀 이름을 소개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제공(release)한 자료입니다.

오늘 주제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름 바꾸기는 “중생”에 해당합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름”만 아니라 “삶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전과 다른 삶입니다.

이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로 “중생”합니다.
하나는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중생합니다.
예수님 없이 살던 삶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신 삶으로 중생합니다.
이전과 이후를 뚜렷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AD와 BC를 나누는 것과 같이 “획기적인 사건”으로서의 중생입니다.

두 번째는 “날마다 중생”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개역)

성도들의 진정한 힘은 “자기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힌 삶이라는 자각”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도들을 무력감에서 일어나게 하고, 우울증을 떨치고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새 이름은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한번” 주어져야 합니다.
또한 새 이름은 날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새 이름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짓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얍복강 가에서였습니다.

본래 상대가 되지 않는 경기였습니다. 일방적으로 우세한 천사는 야곱에게 결정타를 가했습니다. 환도뼈를 부러뜨린 것입니다.“환도(環刀)뼈”란 환도(휜 칼)처럼 생긴 “대퇴골”을 부르는 말이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허벅지”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손을 풀지 않았습니다. 물고 늘어지는 작전입니다. 이미 온 몸은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야곱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1. 인생에는 이기지는 못하지만 지지 않을 수 있는 게임(경기, 경영, 기타)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아울러 적어도 그렇게는 해야 하는 경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3. 게다가 반드시 최소한 그정도는 해야 하는 경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야곱의 경우 “형과의 화해”입니다. 형제 간의 화해는 최소한 “비기기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비기기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겼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6. 하나님을 상대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날이 새려고 하니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나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절대로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야곱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에 관련된 질문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제대로 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냥 아무거라도 해 주세요.
      어떻게라도 해 주세요.

그런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문제를 바로 아뢰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 의지하면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개역)

우리는 무엇을 빌어야 할지, 무엇이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쓸데 없는 것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구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니다.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이 귀합니다. 학생도 ‘바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공부에 성공합니다.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쓰니까 시간을 많이 보내고도 성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주여, 저의 학업에 지혜를 주셔서 좋은 질문을 주시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비즈니스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현재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스래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새 이름! 그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혹은 “하나님께서 이긴 사람” 그런 뜻입니다. 둘 중에 하나, 혹은 둘 다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뵌 사람”입니다.

단어놀이(word play)를 염두에 두었다면, 이스라엘을 “이쉬+로+엘”로 풀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천사”와 씨름을 했지만,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천사”와 “하나님”을 때때로 번갈아 언급합니다. 천사를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여기서 그 자리 이름 “브니엘”이 났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했던 얍복강 강변을 “브니엘”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은 그 자리에서 그는 “새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브니엘은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어 “브니”에다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엘”이 더해져서 생긴 이름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죽었습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살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손으로 만졌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산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궤를 실은 소달구지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웃사가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신 것입니다.

웃사가 법궤를 만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가 놀랐는지 크게 뛰어 법궤가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했습니다. 그건 정말 “이유 있는 실수”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잡은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야곱은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뵙고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까지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비슷한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왕 앞에 나아가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왕이 부르면 갔습니다. 물론 몸을 수색당하지요.

그러나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에스더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에스더는 왕후였는데도 왕에게 나아갈 때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왕이 불렀을 경우는 모르지만 부르지 않았다면 왕에게 나갈 때 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습니다. 다행히 홀을 내어밀면, 조심스럽게 그 끝을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홀을 내어밀지 않으면 곁에 선 군사들이 왕 앞에 나타난 그 사람을 잡아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그랬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거짓말장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이쉬”+“로”+“엘”로 풀어, 그 뜻이 “하나님을 만나 뵌 사람”이라고 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 의미에 있어서 천지차이입니다.

금문인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야곱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야곱의 방식대로 살아선 성공이 없습니다.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야곱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스라엘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으로 살던 것은 지나간 때가 족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      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 개역

이제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어땠습니까?

그는 형 에서와 ‘화해’하였습니다. 화해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20년 전에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야곱이 그의 축복을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를 축복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야곱이 그것을 빼앗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나이가 들어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애용했습니다. 형의 옷을 입고, 팔에는 짐승의 가죽을 둘렀습니다. 털이 없던 야곱이 에서처럼 “변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분노는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형과 화해에 성공했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축복을 얻어낸 결과였습니다. 물론 그 앞에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또, 밧단아람에서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결혼하고 재산을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얍복강가의 씨름은 마지막 순서였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벧엘-밧단아람-얍복강가 등 세 차례의 축복이 있은 다음에야 형과 화해를 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얍복강 가에서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형을 만나기 위해 두 가지로 진영을 짰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뵙기 전에 짠 진영과 하나님을 만난 후에 짠 진영이 다릅니다.

예물 1  암염소 200
예물 2 수염소 20
예물 3 암양 200
예물 4 수양 20
예물 5 젖 나는 약대 30와 새끼들
예물 6 암소 40
예물 7 황소 10
예물 8 암나귀 20
예물 9 암나귀 새끼 10

종자-양-소-약대 1
종자-양-소-약대 2

두 아내, 두 여종, 열 한 아들
얍복강
야곱

에서 진영
사백 명 군사
에서

야곱 진영
야곱
여종과 자식들
빌하, 단, 납달리
실바, 갓, 아셀 
레아와 자식들
레아,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라헬과 요셉
라헬, 요셉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은 “맨 앞에” 섰습니다. 선봉에 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오늘 우리는 결정적인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특별한 작정으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40일 작정 기도를 시작한 성도도 있습니다.

적당하게 살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내게 무엇을 구하느냐?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야곱으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해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 통과하자마자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역경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좌절시키기 위한 시험이 아닙니다.
그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제게 축복해 주시기 전에는 이 손을 절대로 풀 수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기기라도 해야 합니다. 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비비기라도 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말입니다.
      모 아니면 도! 그런 생각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맡깁니다.
      그래서 “네가 이겼다!” 하는 판정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서 금문인은

      공부에서도 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업에서도 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본전이라도 건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서 최선을 다해 나갑시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 드린 모든 금문인들은 “야곱”이라는 옛날 이름을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속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자존심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겁을 먹지 않습니다.
      문제 앞에 당당하게 섭니다.
      식구들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축복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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