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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2): "사랑은?"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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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
추석에 가족들이나 친지, 친구들과 만날 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있답니다.
"너, 아직도 놀고 있니?"
"너, 제발 철 좀 들어라."
"아니, 너 아직도 결혼 안 했어? 결혼 언제 할거니?"
"애는 언제 낳을 거니?"
"오래간만에 보니 많이 늙었네."
"야, 너 못 보던 새에 살 많이 쪘구나."
"아무개는 장사해서 돈 많이 벌었다더라."

이렇게 외모와 관련된 말이나 결혼, 경제 능력에 대한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런 조사에 공감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나 친구들이 "야, 너 머리 많이 세었네" 하면 기분이 안 좋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외모에 대해서 불만인데 굳이 들추어 내 더 큰 스트레스를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추석 때 시댁이나 처가댁에 갈 때마다 부부싸움을 일으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 부모만 부모야."
왜 당신 친부모 형제만 챙기냐는, 그런 불평일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자기 피붙이에 대해서 더 애착이 가겠지요.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이런 일로 인하여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랍 사람들에게는 이런 속담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입에서 나가는 말은 세 개의 대문을 통과한 후에 나가야만 한다. 
첫째, 이 말은 진실한 말인가?
둘째, 이 말은 친절한 말인가?
셋째, 이 말은 꼭 해야 할 말인가?" 

이번 추석에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 속담을 꼭 기억하십시오.
일가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진실한 말 만 하세요.
상대방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친절한 말 만 하세요.
그리고 쓸데없는 말, 해서는 안 될 말은 일절 하지 마세요.
말 한 마디 때문에 즐거운 추석 기분이 다 구겨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14가지 속성에 관하여>
오늘 우리는 고전 13장 말씀의 두 번째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랑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스토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죽자 사자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지요. 
가끔 뉴스를 들어보면 어떤 연예인을 짝사랑해서 수없이 전화를 해대고
편지를 쓰고 집에 찾아가고 심지어 납치까지 시도하는 스토커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4-7절은 사랑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이런 것이다 하고 추상적인 명사로 정의하는(define)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구체적 행위를 하나 하나 그대로 기술하고(describe)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하나 하나 뜯어보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적인 특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의 기분에 따라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그런 변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서 조건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우리 인격의 습관과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무엇 무엇 때문에 내 감정의 변화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구분했습니다. 
미성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이유와 조건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성숙한 사랑은 언제나 이유와 조건을 뛰어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다시 본문 4-7절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보면 바울 사도는 사랑에 대해서 모두 14가지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2가지는 긍정적으로, 8가지는 부정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4가지는 다시 굉장히 긍정적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①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인내한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사랑의 속성을 말할 때 제일 먼저 'patience,' 인내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왜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사람의 성질대로 했더라면 온 인류는 수천 수 만 번도 더 심판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벧후 3: 9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참고 또 참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제일 가는 속성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랑한다면 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②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시인은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 눈빛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길거리를 다닐 때 눈에 살기가 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눈길도 마주치기가 싫고 두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눈매가 선한 사람이 있습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내 안심이 되고 내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서점에 자주 들리는 편입니다.
이제 고등학교 갓 졸업했을 한참 어린 나이의 직원들 가운데에는
반드시 친절한 사람과 불친절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직원은 물어도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가 불만인지 입을 꼭 닫고 신경이 날카로워 보입니다.
그런 직원들을 대할 때마다 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집니다.

여러분,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거리에서나 항상 친절하십시오.
온유(溫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친절이 이 세상을 환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이제 이와 같이 두 가지 사랑의 긍정적인 속성을 말한 뒤
바울은 8가지 속성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태도와 정반대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소문난 칠공주」라는 드라마에 보면 자매 중에 미칠이가 언니인 설칠이를 시기합니다.
그래서 설칠이의 남자 친구를 유혹해서 결혼까지 합니다.
사극을 보면 왕을 사이에 두고 왕비들끼리 투기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는 것에 배 아파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3: 3에서 시기와 다툼은 아직 육에
속하여서 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에 속하여서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④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세례 준 목사님들을 자랑했고, 신령한 은사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고전 1장에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다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 29-31).

우리가 아무리 세상 것을 자랑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나보다 더 큰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자랑은 상대적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 이룬 것 자랑하지 말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신 주님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콧대가 높아서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냈습니다(고전 4: 6 참조).
교만해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시비를 걸었습니다(고전 9: 2; 고후 11: 5 참조).
엄청난 음행을 저지르고서도 교만해져서 낯이 두꺼워졌습니다(고전 5: 1-2 참조).
그리하여 교만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고함을 지르고 교만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조그만 권세, 조그만 세상 자랑을 가지고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사랑은 겸손합니다.
마음을 높이지 않고 낮춥니다.

⑥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후배들 가운데 아주 예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2-3년 후배인데도 마치 친구를 다루듯이 대하는 사람을 보면 아주 불쾌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부부 사이일수록, 친구일수록 더 깍듯이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부모 자식 관계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의를 잘 지킵니다.

⑦ 사랑은 먼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 24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에
그리스도인도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아직 믿음이 약한 형제 자매를
넘어뜨릴 수 있다면 그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음주와 흡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거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웃을 실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내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 주장하거나 나만 정당하게
대접을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기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⑧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약 1: 19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약 1: 20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불의와 죄에 대한 항거로서 나오는 거룩한 분노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폭발로서 나오는 분노는 절제해야 합니다.

성을 잘 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뒤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을 내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다음 뒤끝이 없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은 비록 내 기분이 잡치더라도 분노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성내지 않습니다. 

⑨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원한을 품지 않으며"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내가 충분히 보복하거나 벌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악한 생각들을 멀리하고 선한 생각을 가까이 합니다. 

⑩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을 품은 사람은 불의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불의와 허위로 가득 찬 일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입을 막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제 바울은 이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이 하고 있는 행동과 정반대 되는 8가지
사랑의 속성을 설명한 뒤 사랑의 긍정적인 의미 4가지를 아주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⑪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모든 것을 참아줍니다.
상대방의 잘못이나 약점을 다 눈감아 주고 참습니다.
이런 계산법(數式)이 있지요.
"5 - 3 = 2." 오해해서 세 발자국만 떨어져 보면 이해가 되고,
"2 + 2 = 4," 이해에서 이해를 더하면 사랑이 된다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은 이해하고 이해해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참고 덮어주는 데 있습니다.

⑫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참된 사랑은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 한 분에게 있음을 알기에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⑬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하여 인간의 역사가
선과 정의의 방향으로 나갈 것을 믿기에 모든 것을 바랍니다. 
지금 비록 불의와 악이 판을 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의의 최후 승리를 바라며 낙심하지 않습니다.

⑭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기에 담대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의의 최후 승리를
믿었기에 어떤 수치와 환난도 이겨냈습니다.     

이제 바울이 설명한 사랑의 14가지 속성을 보건대
진정한 'AGAPE 사랑'은 세상의 이기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사랑은 이 사랑에 크게 못 미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주는 사랑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아가페 사랑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 위하여 아낌없이 주신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타납니다. 
요 1서 4: 9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아가페 사랑에 이와 같이 주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의 진수가 나타났습니다.

<눈 먼 사랑 이야기 한 토막>
이제 제가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 한 편을 말씀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대만에 사는 어떤 중년 남자가 왼쪽 눈에 각막염이 걸려 각막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각막을 양도해주어서 수술을 잘 받고 그 눈의 시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남자의 부인이 자기의 왼쪽 눈을 남편에게 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해서 연애 결혼한 것이 아니라
양가 아버지들끼리 서로 약속한 대로 어쩔 수 없이 살게 된 사이였습니다. 

더욱이 부인은 온통 우박 맞은 잿더미 모양의 곰보에다 들창코였습니다. 
남편은 자기 뜻과 상관없이 억지로 한 결혼인 데다가 부인이 박색이었기
때문에 살 가운 사랑을 전혀 나누지 못한 가운데 부부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얼굴은 못생겨도 마음 하나는 비단결같이 고왔습니다. 
남편이 짜증을 부릴 때면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불평을 다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남매를 낳아서 길렀지만 남편은 아내를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해서 그 흔한 부부동반 모임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대만 육군 사관학교의 수영교관이었기 때문에 관사에 살 수 있었지만
아내의 얼굴을 상사나 동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단 한번도 관사에 살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함께 살아도 얼굴도 못생기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기 아내가 늘 불만이었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박만 받던 아내가 자기의 왼쪽 눈을 아무 조건 없이 남편 위해 바쳤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묻습니다. 
"왜, 왜 이런 짓을 했소!" 
"당신은 …. 당신은 제 소중한 남편인걸요."

사랑은 우리 인격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와 같습니다. 
사랑은 강물 같은 것입니다. 
흐르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아도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듯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소리 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이런 깊은 사랑을 다 나눌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너무 많이 사랑함도
죄일 수 있다면
죄인이게 하소서."
― 이해인 수녀의 시에서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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