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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쉼을 얻으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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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쉼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바쁘게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학교공부하고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고, 청소년들은 진학 준비에 바쁘고, 어른들은 일하느라 바쁩니다."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합니다. 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피곤할까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면역기능이 약해져서 각종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노력합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무엇보다도 잠을 충분히 자야 합니다. 그러나 잠을 푹 자면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험생들 사이에는 사당오락 (四當五落) 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네 시간 자면 시험에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노 대통령은 하루에 5시간 내지 6시간 정도 잠을 잔다고 합니다. 대통령 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밖에 못자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쉬는 데 잠처럼 좋은 것은 달리 없는데, 잠을 적게 잔다는 것은 휴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본래부터 수고하면서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살적에도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수고로움이 없었습니다. 아담은 스트레스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인생에게 수고로운 삶이 주어진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이같이 선언하셨습니다.

“17)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수고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사람은 누구나 다 수고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하기를 “22)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솔로몬도 인생의 수고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생의 수고로움을 벗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천국은 수고를 그치고 쉴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은 안식하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는 인생들을 쉼과 안식에로 초대하시다니 얼마나 고마운 분이십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엿새에 걸쳐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일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시느라 피곤하셔서 안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 사역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이를 기뻐하시며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들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매주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시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 계명이 네 번째로 중요한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계명이 바로 안식일에 대한 계명입니다.

“8)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지금으로부터 3400여 년 전에,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고 일하지 말고 쉬라고 율법으로 정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인만 쉬는 것이 아니고 남종이나 여종도 쉬게 했습니다. 어른만 쉬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나 딸도 쉬게 했습니다. 나그네도 쉬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가축도 쉬게 했습니다. 저는 안식일 규례를 읽을 때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이 참 행복한 민족이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대로 갈수록 귀족 사회였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심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한 주에 하루를 꼬박 꼬박 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달력을 셈해 보니까 금년도 주일과 명절, 국경일을 다 포함해서 공휴일이 66일입니다. 요즘은 토요일 휴무제도가 생겨서 토요일을 쉬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은 보편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는 공휴일이 얼마나 되는가 하면

안식일 52일에다가 유월절과 무교절 명절에 8일, 칠칠절에 하루, 초막절에 7일, 설날에 해당하는 7월 1일에 하루, 대속죄일에 하루를 쉬었습니다. 이를 합하면 공휴일이 70일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매월 첫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켰습니다. 따라서 70일에다 12일을 더하면 82일이 됩니다. 달의 첫날과 안식일이 겹치는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80일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을 2일 동안 지켰고, 유다 마카베오가 수리아군을 격퇴하고 성전을 다시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수전절을 8일 동안 지켰습니다. 따라서 이 모두를 더하면 92일이나 됩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독특한 규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농사를 짓되, 육년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소산을 거두고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야 합니다. 포도원이나 감람원도 손대지 말고 칠년 마다 한 해 동안 묵혀 두어야 합니다(출 23:10-11).

땅을 일 년 동안 묵혀 두려면 일을 할 수 없으니 자연히 곡간에 쌓아둔 곡식을 먹으면서 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년에 농사를 짓지 않으면 양식 걱정을 하였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육년에 풍년이 들게 하셔서 2년 치의 양식을 거두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은혜롭게 대우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 9절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성도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릴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삶은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안식일을 지킨 것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공로가 된다면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가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다만 영원한 안식을 생각나게 하고 동경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곧 구원을 의미하는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인간의 삶에 안식이 사라진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사망이 인생들에게 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독성이 얼마나 지독한지 죄에 감염된 인간들은 그 영이 죽었고 몸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는 인간성을 부패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밖에 없으며, 그 악한 생각이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이르기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고 했습니다. 평강이 없다 함은 마음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도 마음에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습니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갖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사람들은 소유가 많으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는 법입니다(전 5:10).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병의 처방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죄가 그 원인입니다. 죄가 있는 한 마음의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서 평강을 제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안식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 마음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과 같습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를 회개할 때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성막에서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짐승의 피로써 드린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드리실 완전한 속죄 제사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에는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 사함 받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마음에 안식과 쉼을 누리면서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때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농부들이 트랙터나 경운기를 이용해서 밭을 갈지만, 과거에는 소나 말에게 쟁기를 끌게 해서 밭을 갈았습니다. 이 때 한 마리로는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으므로 여러 마리의 짐승을 멍에로 연결시켜서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흔히 두 마리로 하여금 하나의 멍에를 지게 하는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멍에가 가볍고 튼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멍에가 무거우면 소나 말이 멍에를 지느라 지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멍에가 잘 맞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멍에를 멘 곳에 가죽이 벗겨져서 아파서 일을 잘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멍에를 맨 짐승은 크기나 힘이 비슷해야 합니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소와 작고 약한 소를 같은 멍에로 엮어 놓으면 균형이 맞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혹은, 크고 힘센 소가 더 많이 수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더러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큰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과 연약한 우리가 함께 멍에를 지면 힘이 세신 예수님께서 멍에를 다 지시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멍에를 다 져 주시므로 우리에게는 그 멍에가 쉽고 짐은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일은 주님과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앞으로 가시면 나도 앞으로 가고, 주님께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시면 나도 따라서 오른편으로 돌고, 주님께서 멈추시면 나도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무거운 짐도 너끈히 질 수 있고,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쉽게 해 치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오히려 멍에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지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는, 생명이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보호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것은 양을 먹이고 지키는 것이 목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순종은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은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오늘 밤에는 어디서 추위를 피하나 염려하지 않고 목자에게 다 맡깁니다. 양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목자에게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들인 우리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얼마나 자상하신 주님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슨 일로 걱정하고 괴로워하십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성도님들의 사정을 다 아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양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성품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당면한 문제가 너무나 커서 두렵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은 밤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배로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배가 바다 한 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광풍이 불어 물결이 일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므로 웬만한 파도쯤이야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풍랑이 어찌나 거세든지 배 안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도저히 배를 가눌 수가 없는 것이 뒤집힐 것만 같았습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큰 광풍을 만났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해 주심으로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도 마음에 쉼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세상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마음에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의 은총을 의지하며, 주님의 멍에를 함께 지고,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 안에서 늘 안식과 쉼을 누릴 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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