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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만져 고치시는 분 (사 57:14-19,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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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함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느끼고 계십니까? 이것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옛 신앙의 선배들의 교훈을 전수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입니다.

과거의 고고학적 기록이나 교리나 도덕적 가르침을 통해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삶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공허를 채우실 이는 오직 하나님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노이로제 증상은 ‘공허감’입니다. 사람들은 내면에서 공허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피상적이고 목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가슴엔 다만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공백이 있다”고 파스칼은 지적했습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기도하기를 “오 주여,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쉬기까지 우리에게는 휴식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공허를 느낀다면 하나님께 그 괴로운 공허를 채워 달라고 기도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에 참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공허를 채워줄 유일한 존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s, 1623-1662)은 1654년 11월 23일, 22.30-0.30시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비망록’에 적었습니다.

“불, 불,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철학자나 배운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확실함, 확실함,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단지 복음이 가르치는 길에서만 그는 발견되어질 수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숙고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인간의 지식이 공허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강남에 사시는데, 그 집사님 아파트 바로 앞에 아주 널리 알려진 초대형 교회가 있습니다. 이 초대형 교회의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아주 박식하게 보이고, 베스트 셀러와 상식, 영어를 잘 사용하시면서 소위 명설교를 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그 집사님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저는 그 집사님이 당연히 그 교회에 출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멀리 떨어진 다른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왜 집 앞에 좋은 교회를 두고 멀리 다른 교회를 가십니까?” 집사님의 대답은 “저는 그런 교양 강좌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책을 많이 읽지만 설교 시간에는 세상의 책에는 없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좀 듣고 싶습니다.” 이 집사님은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이지만 정식 대학을 나오지 않은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훨씬 감동적으로 듣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목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집사님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제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학자인 척, 배운 사람인척, 교양있는 척, 고상한 척 하는 일이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자리에 왜 앉아 계십니까? 저의 강의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저의 인생 철학을 들으려 오셨습니까? 제 말 재주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성가대의 찬양을 감상하러 오셨습니까? 스테인드 글래스를 보러오셨습니까? 오르간 음악을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는 절대 안됩니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말 재주, 인간의 건축물, 인간의 음악, 이 모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유치하고 찰나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배 중의 모든 것, 교회의 모든 활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인간의 논리적 정신에게 열리는 것이 아니고, ‘섬세한 느낌’과 ‘깊은 느낌’의 정신에게 열립니다.

파스칼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이성이 아니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단편 277f.).

사람은 마음 속에서 자기 내면으로부터 열리고 하나님과 접촉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과 접촉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성령을 받으셔야 합니다. 말라 비틀어진 우리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실 분은 성령님 한 분입니다. 이 성령님과 접촉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접촉해야 합니다.


1. 예수님을 만나면 복을 받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만져주시면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어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안수하며 축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아이들을 이끌어 갈 생각을 안합니다. 제자들도 아이들이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께 가려고 하지 않는 몇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지식으로 일을 처리 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뭘 그런걸 가지고 신앙, 예수님 운운 하고 있느냐? 그거 내 지식으로 하면 되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자기 방식대로만, 인간적으로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포기형이 있습니다. 포기형은 단순히 절망적인 형태가 아니라,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일 많이 봤어. 다 그런거지.’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전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 일을 다 알고 초월한 듯, 신앙이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포자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좌절을 신앙과 교양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문제 있는 사람들을 대려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데려가는 이유가 ‘만져주심을 바라고’ 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만져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래야 합니다. 예수님과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의지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을 의지하든지 세상의 재산이나 지위나 권력에 의지하든지 어디든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고는 참 복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 필요하면 우리 아버지께 나가서 돈을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2. 예수님과 접촉하면 병이 나음을 받습니다.

둘째, 예수님과 접촉하면 병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만지시면 소경이 눈을 뜹니다.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지고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극심한 육체적 교통 속에서도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으로 우리의 몸을 만지시면 육체의 병이 낫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들이 고침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항상 일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을 때, 몸이 약할 때, 몸에 대해서 예민해 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고난이 올 때, 이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이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내게는 이런 고난이 찾아오나? 이 고난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많은 질문이 생깁니다. 삶에 대한 예민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생존의 문제가 생길 때,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암에 걸려서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아 보십시오. 이때 원초적으로, 근본적으로, 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게 됩니다.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 ‘하나님, 나를 살려 주세요!’ 본능적으로 부르짓는 것, 동물적으로 부르짓는 것 모두가 다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꼭 병이 낫겠다고 집착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응답하셔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나가서 부르짖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만난 것은 아닙니다. 몇대째 믿었다고 하나님 만난 것도 아니고, 심한 병에 걸려서 기도 조금 했다고 만난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의인인 욥도 그가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난을 당하고 이 모든 고난의 절정에 달해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수많은 선행을 베풀었으며, 모든 재산과 모든 자식을 잃고, 온 몸에 죽을 병을 걸렸으며, 아내과 모든 인간 관계가 끊어지고, 죽기 직전에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소경과 문둥병자와 모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애와 병과 상처를 손으로 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어 삶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우리의 아픈 곳을 만지십니다. 우리의 아픈 마음을 만지십니다. 그리고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면 최고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원래는 병 낫기 위해 주님께 갔지만, 병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나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고칩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이 우리를


3.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상처가 고침받습니다.

셋째,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상처가 고침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 속에서 만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의 영혼을 고칩니다. 치유는 만남과 접촉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서 몸의 만짐과 함께 내면적인 만짐을 통해 나의 내면의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모든 상함과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야곱의 우물 가에서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려오십시오”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당신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당신의 남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해서 ‘거짓말 마라, 거짓말쟁이’ 라는 말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여인의 마음을 읽으시고 동의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당신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사람도 당신의 남편은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을 죄많은 여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많이 결혼한 것을 순전히 이 여인의 잘못만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이 여인이 성적인 쾌락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결혼을 했다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면 한 가지 이유가 아닐 것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을 많이 받은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 여러 번 사별을 하였거나 이혼을 통해서 이별을 경험했고 이것이 다섯번이나 반복되자 그녀의 삶은 아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고통은 얼마나 컷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의 여섯째 결혼은 그녀에게 더 이상 큰 보호가 되거나 안정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남편도 진정한 남편으로 볼 수 없는 처지에서 그녀의 삶에 대한 갈증은 일생 동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리어 “남편이 없다는 당신 말이 맞습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가지 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남편과도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었다는 점입니다.

수치와 무력감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한 여인, 삶의 의욕을 잃은 한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삶의 무의미를 탈피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나고 그녀의 상처들이 치료받았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행한 모든 것을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만나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자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깊은 상처들이 치료 받습니다.


4. 예수님을 만나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넷째로 예수님을 만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나인 성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장사 지내는 장례 행렬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면서 장례 행렬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다시 살아나서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눅 7장).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시면 죽을 사람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결 같이 극도의 고통 속에서 해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해결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아무 저항없이 그냥 받아들여서 고난을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못박히신 그분의 못박힌 손이 우리를 살립니다.


5. 우리는 모든 현실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모든 현실을 주님께로 데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고통, 마음의 상처 등 개인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차원들,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가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당시의 지도자들로부터 공허한 소리라고 핀잔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외교는 외교일 뿐, 군사적 문제는 군사적 문제일 뿐 신앙적인 일이 아니다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는 종교적 하나님일 뿐 정치 문제는 정치로 풀고, 외교 문제는 외교로 풀고, 군사 문제는 군사 전략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아사야와 예레미야가 예언한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 땅에 실현해야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 57장 19절은 말씀하십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사 57:19).

예레미야는 선포합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라”(렘 33:6).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며 부르짓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치료를 선물로 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육체와 마음을 고치시고 현실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주님과 같이’라는 제목의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Fine)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D.C.)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병을 고쳤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으며, 새 삶을 얻었습니다. 현실을 새롭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 예수님과의 만남은 생명의 만남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3.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새 삶을 줍니다.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 삶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의 고쳐주심을 선포할 믿음을 주시고, 세상 모든 현실을 고칠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자 예수님의 능력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 이런 능력이 충만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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