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마음 속의 지성소 (시 6:1-10, 마 6:1-6)

  • 잡초 잡초
  • 334
  • 0

첨부 1


위선의 기원

오늘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행위’ 다른말로 표현하면 ‘위선적인 행위’에 대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토록 심각하게 경고하신 위선이 무엇입니까? 위선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실 위선을 하겠다고 계획을 세워서 의도적으로 위선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선은 어디서 생깁니까? 위선은 인간의 성장 발달 과정에서 생깁니다.


인간의 발달은 사회화 과정

인간의 발달은 사회 속에서 진행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유치한 단계에서 성숙의 단계로 발달해 가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사회적 현실에 어떻게 잘 적응해가는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회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기를 형성해간다고 하는 것은 모든 심리학자들이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가면(페르조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진 나를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이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조나(persona)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본래의 나 자신보다도 보여지는 나의 모습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자아가 자신의 페르조나에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시킬 때 의식은 내면의 세계와 분리되고 마음의 조화는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회적 자아가 너무 강조될 때, 위선이 생깁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을 진정한 나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안동교회에서는 [2006년]지난 6월 세 번의 토요일에 ‘남자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남성 컨퍼런스’를 개최했습니다. 인간의 인생 전기를 남자의 관점에서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회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는 단계인 중년기에 이르러는 단순히 사회에 적응하는 것으로만 발달의 기준으로 볼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래서 중년이 되면 밖에서 보여지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 밖으로 추구하는 외적인 모습이 정말로 내가 되어가고자 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중년의 과제는 참된 나를 찾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기를 지나온 사람이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링컨은 ‘사람이 나이 사십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기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중년의 과제를 중년에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중년의 과제는 사실은 청년의 때에 미리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노년기에는 중년의 과제가 필요없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인생의 후배들의 삶을 다시 한번 이해하고, 자신의 노년 단계에 필요한 일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현재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연령대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인생 전체를 한번씩 생각해 보는 기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위선은 모든 사람의 문제

여러분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쓰는 ‘사회적 가면의 문제’와 ‘경건의 문제’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바리새인은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위선의 문제는 바리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마태복음 6장에서 다루는 중요한 세 가지 테마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경건의 연습입니다. 외경 토비트서에는 기도와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공동번역 토비트 12:8-9)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세 가지 경건의 연습을 위선으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경건이 거짓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거짓 경건과 참된 경건의 차이점
거짓 경건과 참된 경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자랑의 나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

거짓 경건은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드러내고, 무슨 일을 하면 광고해주기를 바라고, 감사장, 감사패 받기를 좋아합니다. 거짓 경건은 자아를 중시하고 자기 의를 드러냅니다.

선행이 즉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즉각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아무개는 이렇게 헌금을 많이 할 정도로 신앙이 좋다고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자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를 나타냅니다.


2. 허무, 기쁨

사람이 거짓 경건을 통해서 자기 의에 익숙해지면 허무가 옵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세상의 보상을 바라면 하나님의 보상이 없습니다. 세상의 보상은 허무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없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이 없으므로 기쁨이 없습니다. 내면의 기쁨이 없으면 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업의 성공, 자식 입학 성공, 건강 등 세상 수준의 보상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내면에 하나님 나라, 예수의 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하나님의 보상이 옵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기쁨과 충만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받으면 세상적인 보상, 즉 칭찬, 감사패, 성공이 없는데도 기쁩니다.


3.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임재

이것을 경험해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확신이 섭니다. 거짓 경건은 현재 하나님의 존재를 불확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은밀한 신앙의 맛을 체험해 가면 하나님의 존재가 확증이 됩니다. 우리의 실존의 닻이 하나님 안에 내리게 됩니다.

4. 계산적, 관계적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매우 의도적이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외적인 보상을 계산하는데 민감합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얼마나 칭찬, 인정, 표를 받을 수 있으까 하는 계산. 인정 칭찬에 굶주립니다. 그래서 인기, 명예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내면에서의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사람의 인기에 영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양의 크고 작음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양의 크고 작음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양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은밀한 가운데 행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가시적 결과에 높은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가시적 결과로부터 자유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면서 만족하고 결과에 대해서 담담합니다.

5. 기분, 삶의 스타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분위기와 기분에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필요한 곳에는 언제나 단순히 성실히 한 마음을 가지고 섬깁니다.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성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순간적, 찰나적이고, 특별한 기회에만 착용하는 가면/마스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체질화된 삶의 스타일입니다.

6. 무감각, 사랑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타인의 처지에 무감각합니다. 도움의 기회를 자기를 위해서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부드러움, 인내, 사랑이 있습니다. 늘 서서 기다림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개인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공동체 분열시킵니다. 그대신 자기 편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공동체를 묶고, 치유하고 인도하는 리더십입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체질화된 사람입니다.

7. 타인에게 적용, 자신에게 적용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그 적용의 방향성에 있어서 이 기준을 스스로 남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그 적용의 방향성에 있어서 이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율법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판단을 통해서 우리가 시인해야 할 점은 우리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자연적인 우리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나가야 합니다.

위선과 진실의 판단 기준:
사람 앞에서 행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가?

그러면 위선과 진실의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장은 그 답을 줍니다.

모든 선한 행위가 사람 앞에서 행해지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람 앞에서 행해지면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행해지면 사람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위

무엇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스러운 보여짐

우리가 예배 중에 진실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 속에서 새가족들 새 신자들 불신자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진실된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의도적인 연극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냥 저절로 보여지는 행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위선이란 내면의 나, 나의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마치 연극하듯이 보여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위선이란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의도하는 진정한 목적과 겉으로 드러난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제 행위가 위선이 되는 것은 겉은 이웃/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 의도와 목적은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도가 위선이 될 수 있는 것은 겉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그 의도와 목적은 자신의 경건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데 있습니다.

금식이 위선이 될 수 있는 것은 겉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훈련에 있는 것인데, 그 의도와 목적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목적을 개인적으로 인간적 명예욕을 위해서 이용하고 있습니다.

경건 훈련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을 진정으로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을 진정을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적이 변하여 오로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경건의 훈련과 연습이 때로는 직업적인 도구가 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경건의 훈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런 훈련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과시용으로 보여져서 ‘아 저사람들은 우리와 무언가 다르구만, 저렇게 보통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건의 훈련을 감당할 수 있으니 지도자가 되어야 해!’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영적인 지도자가 되면 반드시 위선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경건의 행위가 직업적인 행위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 읽고, 기도 인도하기 위해서 기도를 연습으로 기도하고, 성도들이 보라고 헌금하고,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도자이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 이런 일들이 모두 위선입니다. 경건이 도구적 행위가 됩니다.

참된 목자는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되어서 말씀에 깊이 빠져들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설교합니다.

참된 목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하나님과의 대화가 너무 기뻐서 자나깨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언제나 하나님께 찬양을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동교회의 대표 기도자들의 신앙이 성숙합니다. 한국교회의 흔히 들을 수 있는 기도가 “보여지게 하소서”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수재민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보여져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소서” 하는 식으로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안동교회 기도 인도자들은 진정 수해를 당한 가정과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는 성숙한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것이 위선적이 아닌 모범적인 진실한 기도입니다. 보여지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사라지고 사람만이 최고의 심판자로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보다도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선의 이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종교 행위가 위선적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계시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종교와 복음을 구별했습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계시 경험이 없는 인간적 종교를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말합니다.

오늘날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없이 되어지는 모든 일은 인간적 종교요, 그 관심사가 오직 사람 밖에 없으므로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의 극복, 하나님을 만남
그러면 우리가 위선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 가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 장소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이르는 방법은 속죄 제사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회개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일 학교를 다니면서 대표 기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듣기에 좋은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기도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대표 기도의 순서를 맡게 되어도 역시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열심히 준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로서 경건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선의 길에서 진실의 문으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계기가 무엇입니까? 위선의 길에서 진실의 문으로 들어서는 계기는 ‘회개와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를 하고 나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과 회개는 동시적 사건입니다.

회개는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때 나의 죄를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6편은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1-2).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경건은 용서를 피상적 차원에서 구한다. ‘나는 안 그런데 사탄의 유혹으로 이것 저것을 잘못했어요.’ 조건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회개는 이런 회개가 아닙니다. 자신의 인간성 자체를 회개합니다.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해 주세요!’

‘저는 아직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인간입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

몇 가지 얄팍한 죄의 항목이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참 용서는 사건 하나 하나에 대한 용서가 아닙니다. 나라는 죄인된 인간 전체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인된 실체를 자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집사가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이 여집사님은 방언도하고 거듭남의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는 완벽하리만큼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시골의 시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십니다. 그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소화가 불량이고, 머리가 아픕니다. 생활의 리듬이 다 깨집니다. 마치 시어머니 마귀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이 이 여집사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집사님, 당신의 선한 모습은 허상입니다. 시어머니가 올라 오셨을 때, 나타나는 당신의 모습이 당신의 실체입니다. 그 모습이 진정한 모습인 것을 깨끗이 시인할 때 마음 속 지성소의 문이 열려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면의 지성소

참 회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된 실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면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내면의 지성소’가 형성됩니다. 회개와 겸손이 내면의 지성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에 치중하지 말고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가꾸십시오. 본래의 나와 관계를 맺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허구/ 이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 안합니다. 영적인 의사 예수님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영적인 무능,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회개는 개별적인 잘못이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비천한 모습을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우리는 세리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 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없으면 저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여집사님은 기도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와 살아갈 능력이 없어요. 하나님은 해 주실 수 있지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나를 받아 주세요.”

한 장로님이 공중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장로 부인이 더 이상은 같이 못살겠다고 이불을 챙겨서 밖으로 나갑니다. “여보, 지금 어디로 가? 왜 여기서 나와 살지 않고…” “당신은 교회에서는 천사고, 집에서는 악마니까, 나는 천사하고 살려고, 교회에 가요!’

나의 비천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비천함을 인정할 때, 이 비천함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말구유입니다. 예수님은 헤롯 궁에 오시지 않고 미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말구유에 오십니다. 내 마음이 낮아져서 말구유를 준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 낮아짐이 말구유가 하나님은 만나는 지성소입니다.

‘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집사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껍데기 가면을 자랑하기 전에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목사이기전에 상처를 많이 입은 인간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저는 유혹에 매우 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 이것은 진실한 절규입니다.

‘저는 인간으로서 정말로 부족한 사람입니다.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저는 죄인입니다. 도저히 제대로 섬길 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입니다. 저를 도와 주세요.’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자기의 설계/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게서 일하도록 촉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능을 체험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도움을 바래야 참된 기도입니다. 내 계획을 자꾸 버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하여 ‘내면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내면의 지성소는 마음의 골방인데 이 골방은 닫기만 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입니다. 심지어는 사회적인 자아로부터도 비밀스런 곳입니다. 가장 비밀스런 방인데도 하나님과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시139편는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문을 닫고 있어도 우리를 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골방은 우리에게 유익한 곳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없고 오직 진실된 나 자신과 하나님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시편 139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지성소는 진정한 자기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곳입니다. 지성소는 은밀한 하나님의 통제소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통제소가 아닙니다.

지성소란 성전의 가장 깊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는 오직 대제사장과 하나님만 함께 있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이 임재 앞에 엎드려 있는 곳입니다.

우리 마음의 지성소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진실된 나 자신이 하나님 한 분 앞에만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는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의 명예나 체면이나 소유나 권력이나 그 어떤 세상 것도 의미를 잃어버리는 곳입니다.

이 지성소를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