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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만찬’과 살과 피 (창 2:7, 고전 1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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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과 피로 엮는 인간의 몸, 그 자체는 단돈 1만원에 불과하다. 작은 세숫비누 7개를 만들 수 있는 지방분과 조그만 공간을 칠할 정도의 석회, 13kg의 코크스와 맞먹는 탄소, 성냥 2천2백 개비 분량의 인, 2,5cm짜리 못을 만들 수 있는 철, 그리고 한 스푼 정도의 유황과 30g 정도의 비철 금속이 전부라고 한다면 인간의 몸 그 자체는 형편없이 값이 나가지 않음을 안다. 여기에 조용히 생각해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왜 인간의 몸을 비싼 금속으로 감아 만들지 않았을 가?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사람의 눈에는 사파이어나 에메랄드로 만들고 앞니는 니켈이나 스테인리스나 강철로, 어금니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었다면 늙어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건데? 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가슴뼈 갈비뼈는 백금으로 만들고 골반 뼈는 루비나 황금으로 만들었다면 우리의 육신의 몸은 수십억 호가(呼價)가 될 것이 아닌 가 생각을 갖기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빈손의 사람에 대한 생각과 함께 헛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할 때 깨지기 쉽고 얼마가지 않고 썩고 없어질 것과 값이 나가지 않는 물질로 만드시는 이유는 생명의 가치가 삶에 있기에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이치를 깨닫게 하려 함인 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흙을 빚어 만드시고 만든 흙 사람에게 당신의 생명의 입김을 불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만을 만든 이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을 가동하게 하기위하여 60개조나 되는 세포와 130억 개의 신경 세포를 만들어 잔디처럼 깔고 230만개나 되는 땀구멍을 골고루 몸뚱이에 깔아 배치해 두었다.

  그러면서 세포의 수보다 더 많은 100조나 되는 세균을 몸에 두어 형제와 같은 항렬(行列)의 같은 ‘세포’와 ‘세균’을 동시에 두어 흥미진진한 물리적 충돌과정과 화학적 변화과정, 동화(同化)과정, 융합과정을 하게 한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신체구조와 살아있는 생명의 삶의 과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생명을 유지하도록 몸뚱이를 만들면서 수천가지의 질병과 싸울 수 있도록 배치해 두어 어떻게 잘 견디고 참아 내는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지 좋고 나쁨의 희, 노, 애, 락, 의 사실 들을 통한 이유에서 자연의 4계절에 맞추어 나무의 열매가 익어 가도록 사람의 삶의 과정을 살피어 보게 한다. 이것은 살아가는 생명의 공통과 그 자체의 모습임을 알게 한다.

  이러한 몸의 구조와 기능을 살피면서 성서는 몸에 대하여 동체(同體)와 사지, 및 그 부속기관을 총칭하는 말로서 인간의 신체적, 시간적, 공간적, 촉각적 전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성서는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여러 가지 각도에서 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몸의 용어는 히브리어로 ‘바사르’인데 127회나 사용하고 있고 동물과 인간의 육신을 가리킨다. 즉 혈연관계나 하나님과 대조되는 존재로서 인간이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환유어(換喩語)로 사용됨을 아는 것이다. 신약에서 몸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낱말은 ‘소마’이다.

  이 말은 살았든 죽었든 인간이나 짐승의 몸에 대해 사용된다. 또한 이 말은 은유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음도 알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특별한 기독교적인 의미로서 “주의 만찬”에 관한 원시적 전승들을 보자. 그 명백한 전승이 신약의 오늘 본문이다. 이것이 성찬의식에서 떼는 떡 덩어리가 주의 ‘소마’ 또는 ‘주의 몸’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포도주를 가리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라고 말씀하심에 유의한다. 이 ‘주의 만찬’ 전승은 공관복음에서도 거의 동일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음을 안다. 공관복음의 세 복음서에 모두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막14:22, 마26:26, 눅22:19)에 기록하고 있다.

  바울 신학에서의 몸은 죄의 몸으로서, 구속된 몸,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죽지 않는 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몸으로서의 교회’ 이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알게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한 성서의 말씀에 접하게 한다. 예로서 떡을 사용하는 공동체를 가리키면서 ‘많은 우리가 한 몸이라’고 설명한 점에 유의한다. 바울이 ‘죽지 않는 몸’에 관하여서 몸의 불멸에 관한 기독교교리를 제시하기 위해서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내세의 영적 삶은 믿었으나 몸은 영원의 장애물로 생각한 점을 고려한다. 그래서 육체적 부활을 혐오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히브리적 인간관을 갖고 몸이 없는 인간 존재는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내세의 삶에는 부활한 몸의 부활을 신앙고백으로 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와 중세시대의 성찬식은 교회의 핵심적 전례에 적용되고 그 유카리스트란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잔에 대하여 선언한 감사에서 유래하게 되었음을 본다. 최후의 만찬을 다루는 4개의 기사는 마26:26-29, 막14:22-25, 눅22:15-20, 그리고 본문 등이다. 이들 4기사들 중에서 마태는 마가에 의존한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양상을 제공하는 반면에 누가는 다른 세 기사와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내용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찬식 제정에 대한 신약의 기사 안에 나타난 주된 문제는 누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누가에 대한 공인본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는 유월절 식사를 언급한 것에 주목한다. 만찬에서의 예수의 말씀과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학자들 마다 개별적으로 특별한 측면을 강조해 왔고 식사의 배경은 그 식사가 다른 유사한 유대교의 종교적 식사들과 관련 있음을 시사해준다. 유대교의 식사는 떡과 잔에 대한 엄숙한 축사가 있고 끝에 사회자에 의한 감사의 기도가 따르게 된다. 이 식사가 가지는 특징에는 그리스도의 도래 할 죽음과의 관련이 있게 된다. 떡을 뗌과 포도주를 부음은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이다. 이것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위로 하셨다. ‘내 피로 세우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에 강조점을 알아야 한다.

  ‘받으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는 명령과 더불어 예수께서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한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이다. 영적인 음식과 음료 즉 빵과 포도주는 이에 대한 대표적 상징들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식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잔치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받는 떡과 포도주는 영혼의 윤택을 위하여 주어진 그의 살과 피를 나타낸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26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종말적인 해석이해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들이 만찬에서 말씀한 환경을 보다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엔터테인먼트 해 준다.

  이 엔터테인먼트는 사도 바울의 언어를 조명해 주며 초대 기독교공동체가 재림에 대한 열성어린 소망과 더불어 그 전례를 계속 갖게 된 환대(歡待)가 된 것이다. 떡(빵)의 상징은 살의 육체를 말해 성찬 시에 떡을 나누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살이다’라고 한다. 몸의 육신(肉身)은 살덩어리이다. 우리말로 ‘살’은 동물체를 이루고 있는 조직의 한 가지로서 피부 아래 있어 근육과 더불어 뼈를 싸고 있는 연한 부분을 말한다. 육신의 살덩어리에만 눈(eye)이 있다. 그 눈을 살 눈(肉眼)이라 한다. 뼈에는 눈이 없다. 피에도 눈이 없다. 다만 지나친 욕심과 의욕과 투지로 눈동자에 시뻘겋게 불이 붙었을 때에 한하여 피 눈(혈안血眼)이 된다고 말한다.

  옛 우리 조상들이 살이 많으면 덕스럽다고 해서 육덕(肉德)이라 했다. 육신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살결이 좋다고 했다. 살의 느낌을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느낌으로 말한다. 요즘은 살의 느낌을 피부의 접촉으로 feeling이라고 한다. 사람은 살의 정으로 육정(肉情)이라 하고 살의 욕심으로 육욕(肉慾), 살의 즐거움으로 육락(肉樂)이라고 해서 그 표현을 보면 그 살대로 갇히고 처박히고 뒹굴고 떨고 몸부림치며 허우적거리고 느끼며 춤추며 늘어지며 비뚤거리고 흔드는 표현을 살로서 표현함에 있음을 안다. 살의 우리말의 의미를 가지면 더욱 많은 성찬에 임하는 느낌이 있게 하고 그리스도의 살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한다.

  피는 동물체의 몸 안을 돌며 영향 물과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붉은 빛의 액체이며 혈연, 혈통의 뜻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뜻한다. 피는 색깔이 있다. 피는 온도가 있다. 정상적인 피는 뜨겁다. 피는 맛이 있다. 혈액 중의 산과 알칼리 균형이 깨지면 산성이 되고 맛이 없다. 온전한 피는 균형이 깨지면 나쁜 피가 된다. 그러므로 피는 격이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 성례전은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의 수단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화해의 높은 품격임을 알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성분은 흙으로만 만들어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김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죄로 물든 사람 모두는 창조자와의 관계회복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에 예의 주시함을 요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 참예자들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 몸 안에서 피를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한 공동체의 몸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육신의 피와 살을 넘어 살아있는 생명의 영원한 길임을 안다. 종교개혁 이후의 성찬식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으로 ‘주의 만찬’을 가지며 기독교예배의 중심행위로 은총의 수단으로 행사되어 왔으며 성례전 안에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가 있음을 믿었다. 이것이 곧 영혼의 윤택, 영원함의 건강이다. 성찬의 의미는 ‘주의 만찬’의 엔터테인먼트로서 ‘살과 피’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삶에 신앙고백의 의미를 항상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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