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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미친다 (삼하 14: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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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4장 21-33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미친다

인생에는 경험과 연륜이 필요합니다.
젊었을때에는 젊음과 패기를 말하지만, 나이에서 오는 연륜을 무시할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생각과 측정으로 앞을 내다보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경험에서 묻어나온 결코 생각만으로는 알수없는 그 무언가가 바로 연륜입니다.
패스트푸드가 당장 먹기 편하고, 빨리 해결할수 있지만, 슬로우 푸드가 느려도 오히려 더 인체에 유익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뜨겁고 열정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신앙에 비길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오랜 기다림을 주시는 이유는 기다림이 있어야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가슴으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다림이 있어야만 체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모두가 메말라 있습니까?
왜 굳어진 가슴이 되었습니까?
패스트푸드 시대의 영성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은 흐르는데 표면만 흘러 버립니다.
물이 흡수되어야 생명이 자라나는데 표피만 적시고 가버리는 영성이기 때문에, 기다림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가슴이 굳어졌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할 때 밥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뜸을 들여야 됩니다,
뜸이 뭔지 아시지요?
평소에 밥을 안 해 본 사람들이 등산 가서 밥이 되었나 안되었나 솥뚜껑을 계속 열어보다가 결국 삼층밥을 먹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밥 짓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뜸이라는 것이 있지 아니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밥 할 때 깨닫습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기는 약한 불에 오랫동안 구어야 한다, 이것이 불문율입니다.
그런데 급하게 뜨거운 불에 고기를 굽는다면 겉은 타버리고 안은 생고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성장과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기다려주어야 성장하고 기다려주어야 성숙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기다려주는 사람입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 까지의 시를 보면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참 지독한 기다림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란은 봄에 핍니다.
봄에 모란이 피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모란이 다 떨어지면 포기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기다린대요.
그 다음에 모란이 뚝뚝 떨어져 땅에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렸어요.
그러면 포기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기다린대요.
거기다가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다 사라져버렸으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기다린대요. 뭘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대요.
기다리는 사람, 이 시를 외우면서 신앙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지독한 기다림,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다림, 전혀 기댈 것이 없을 때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기다림, 모란이 피기까지……

이 기다림, 아브라함의 기다림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기다림 길고긴 세월 그 기다림의 신앙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까!
당장의 열정과 뜨거움만으로 해결할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신앙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믿음의 기다림이 있으면 자라납니다.

광복절 특사 영화가 있었습니다.
한 죄수가 열심히 감옥에서 견뎌냈습니다.
감옥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은 가 나가기만 하면 내 애인 경순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기다릴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경순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탈옥하기로 결정합니다.
기다림이 없으니 사람이 미치더라는 겁니다.
이 죄수가 석방되는 날이 언젭니까!
내일입니다.
하루만 견디면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갈수 있습니다.
광복절 특사로 내일 나가는데 하루를 못버티고, 못기다리다가 탈옥하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성급함이 생명을 단축시킬수 있습니다.

오늘 압살롬을 보면 기다림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와 화해를 했다고 해도 제대로된 화해가 아닙니다.
자기 잘못이 뭡니까!
자기 형을 죽였습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왕이라고 해도 이게 쉽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쉽게 용납이 안되죠.
아무리 아들이 많아도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자기집안의 장남이 죽었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최근에 고향교회 후배의 아기가 3층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했습니다.
지난 주일날 자기 홈페이지에 기도제목을 올려놨으니 기도부탁드린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구나 급한 마음에 전화를 해봤더니 22개월된 아기가 중태에 빠졌다는 겁니다.
의사는 거의 힘들다고하면서 준비는 하라고 전했다는 겁니다.
이 부모들에게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세와 상황이 계속해서 전해져 왔습니다.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고, 다시한번 혈압이 떨어지면 성장이 멈추거나 뇌사의 가능성이 있다.
오늘 밤 심장박수와 혈압을 유지시켜 주세요.
기도의 제목들이 때로는 몇시간마다 때로는 하루 한통씩 문자로 날라왔습니다.
이 기도의 제목을 받을때마다 아이를 위한 기도가 쉬지않고 나왔습니다.
아이도, 부모도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리고 일주일을 버티다 아이는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이 부모들이 이 아이를 쉽게 잊을수 있을까요?
이 부모들의 홈페이지에 갔더니 아이에 대한 사진이 얼마나 많은지, 아이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컷을까 또 그 상심이란 또 얼마나 컷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말로 표현되겠습니까!
어린 부모들이지만, 그 부모들의 사랑은 어리기 때문에 작은 사랑이겠습니까!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했을 겁니다.
다른것은 용서가 되고, 용납이 되지만,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쉽게 용납이 되겠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셋째 아들이 죽였다는 것에 아마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일로 압살롬은 2년이 넘도록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요압은 이런 사태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나라 안팍에 해가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압살롬과 다윗을 화해시킬 방안을 마련합니다.
요압은 능숙한 여배우를 불러서 왕을 위한 연극을 준비합니다.
이 여인이 왕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나가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지역마다 법정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해결되기 어려운 최후의 경우에만 왕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최후의 법관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이 올라왔다는 것에 대해 법의 정의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필사적인 상황에 적용될 법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법보다 솔로몬의 지혜같은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법으로 해결될 문제는 자기에게 오기전 이미 해결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떤 애절한 사연이 올라왔을까 귀를 기울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싸우다가 한 아들을 죽였다는 겁니다.
법에 의하면 죽인 아들은 또 다시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집안의 대가 끊어지는데 어떻게 왕께서 특별 사면을 해주시면 안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과 상황에 다윗은 현명한 판단을 합니다.
여인의 놀랄만한 연기에 다윗은 살려줄것이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여인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계속해서 요청해오자,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이 사건은 실제 사건이 아닌 다윗과 압살롬을 가리켜 만들어낸 이야기인것을 다윗이 알지만, 자신의 맹세로 인해 지킬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압살롬을 데려와서 만나게 되지만, 예전같은 관계를 유지할수 없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좀 시간이 지났다고 금방 용서가 안되겠죠.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수도 있고, 좀더 상황이 바뀌어져야 해결될수 있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다윗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자기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인기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완벽한 육체적 아름다움에 시민들은 매료되었고, 그가 한번 머리를 흔드는 날이면 수많은 여성은 쓰러집니다.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습니까!
이렇게 백성은 자신을 다 사랑하는데 아버지는 왜 나에게 이러냐?
지금 내가 어떤 존재냐?
왕 1순위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내게 이럴수 있느냐?
밖에 나가서 여론 조사를 해 봐라.
내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다. 아버지만 날 모르네,
이런 내게 이럴수 있느냐?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를 못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자신이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면 못참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을 이해를 못하죠.
그런 이면에는 자기가 제일 잘났는데 나보다 못난 사람이 어떻게 나를 거절할수 있냐 그런 자만감이 있는 겁니다.
자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절당하는 것을 못참는 겁니다.

지금 압살롬이 이런 경우지 않나 생각합니다.
무시당하고는 못사는 겁니다.
내가 누군데 니가 나를 무시하냐? 그런겁니다.
지금 다윗이 옛날 그 다윗이냐?
내가 지금은 최고다. 내 인기를 봐라. 내 빽그라운드를 봐라. 내 외모를 봐라. 다들 내가 최고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무시하냐?
다윗왕이 무시하는것도 참기 어려운데 더 답답한 것은 요압입니다.
요압 니가 나를 불렀으면 어떻게든 해결 봐야 되는거 아니냐?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
내가 지금 감금되어 있는데 찾아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답답한 마음에 요압을 불렀는데 요압이 안옵니다.
거절당하니까 화가 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니까짓게 뭔데 또 나를 무시하냐?
내가 지금 가택연금 당한게 우습냐?
인기가 최고조에 이른 자기를 이렇게 가택연금 당하게 한 것도 억울한데 요압도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용납이 안되는 겁니다.
아마도 요압은 압살롬을 데려온 일만으로도 자신의 임무는 다했다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차기 왕이 될 사람이 외국에 있다가 볼모로 잡히든지 하면 위험할수 있는데 이렇게 데려온것 만으로도 자기의 임무는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굳이 다윗과 압살롬의 골치아픈 관계에 다시금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좀더 시간을 가져야한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에 대해 과신하고 있던 압살롬으로서는 이런 기다림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기다릴수가 없는 겁니다.
이만큼 기다렸는데 뭘 더 기다리냐? 못기다린다.
그래서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요압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요압의 밭에다 불을 질러서 요압의 전재산을 타 태워버립니다.
그러니, 요압이 안찾아올수 없도록 만든거죠.

그후 요압의 중재로 압살롬과 다윗은 만나고, 화해의 제스츄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성급한 만남이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말 그대로 화해의 만남이라기 보다는 서로의 증오와 아픔을 확인하는 만남입니다.
5년만의 길고긴 만남이었음에도 이 만남은 기쁨의 만남이 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만날 수 밖에 없어서 만나긴 해도 섭섭함이 화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고, 자기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 있는 것을 왜 확인할수 없었겠습니까!
오히려 압살롬의 증오를 더 불러 일으키는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압살롬은 겉으로는 만나지만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4년동안 다윗과 압살롬은 더더욱 멀어지고, 다윗으로서는 악몽같은 상황을 맞이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좀더 기다렸다면 어땠을까요?
다윗이 정말 압살롬을 미워했을까요?

우리는 너무나 다윗의 탄식을 잘 압니다.
나중에 압살롬이 죽고 난 다음 다윗의 울음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그러면서 펑펑 울고,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미워하거나, 싫어한게 아닙니다.
아직까지 자기 마음에 남아있는 장남 암논에 대한 아픔이 있으니까 쉽게 용납이 안된것이지, 압살롬을 미워한게 아닌 것입니다.
압살롬은 조금만 참았으면 하는 마음이 필요했습니다.
자기에게 자동적으로 올 권력을 좀더 기다렸다면 순순히 압살롬에게 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여론은 압살롬에게 기울고 있었고, 자기가 차기 왕위 1순위였기에 어느 누가 봐도 명실상부한 차기 왕이였습니다.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올 것인데 압살롬은 참지를 못합니다.

삼국지를 보면 유비는 참아도 너무 참습니다.
당장 이 곳을 쳐야 하는 이유와 명분이 확실해도 더 큰 계획을 세우고 또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쫓겨야 하기도 하고, 자기 세력이 너무 약해지기도 하는데 유비는 끝까지 기다립니다.
유비는 기다림의 천재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결국 유비에게 천하를 통일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압살롬은 이 기다림을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기다림을 배워야 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더 기다림의 신앙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10년동안의 광야생활을 통해 신앙이 완성되고, 믿음이 성장했던 것처럼 압살롬에게도 조금더 기다림의 신앙을 배웠어야 했던 것입니다.
조금더 기다림의 신앙을 배웠더라면, 다윗같은 정치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습니까!
다윗과 나단 사이에서 몰래 솔로몬이 왕위를 주기로 했다손 치더라도 누가 봐도 손색없는 왕세자감으로 성장했다면 될 사람은 되지 않았겠습니까!

구약에 얼마나 이런 역전이 많습니까!
원래는 장남이 받아야 하는데 구약에 장남을 뒤집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야곱의 아들만 해도 르우벤이라는 똑똑한 아들이 있어도 요셉이 실제 장자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야곱도 마찬가지죠.
형 에서가 있어도 동생 야곱이 뒤집지 않습니까!
압살롬이라고 못되라는 법이 없는 겁니다.
거기다 자기는 확실한 명분을 지녔는데 좀더 준비를 착실히 하고, 뽑지 않을수 없도록 준비되었다면 얼마든지 될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기를 놓치고서 성급하게 일을 처신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압살롬은 성급하게 구테타를 일으켜서 자기에게 올 권력 먼저 얻습니다.
자기가 구테타를 얻어서 이길 정도였다면 나중에 가서는 더 쉽게 간단히 얻을수 있을 왕위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급하게 구테타를 일으켜서 명예롭지 못한 왕권을 세웁니다.
거기다 다윗을 죽일수 있는 계략을 듣고도 다른 모략꾼이 후새의 말을 듣고 죽일수 있는 기회를 놓칩니다.
전부다 깊이 생각하고, 처신했다면 얼마든지 구테타를 완성시킬수 있었던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하는 일마다 조금한 한발짝 성급합니다.
그리고, 그 성급함은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윗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위대한 왕으로 성장할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한 민족을 구원시킬수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처럼 기다림의 시간은 열정과 패기만으로 할수 없는 새로운 깊이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통해서 위대해졌습니까!
아브라함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순간순간 찾아오는 시간을 기다림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도 21년간의 지루한 종살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씨름하는 야곱으로 성장했습니다.
요셉도 청년시절 노예로 잡혀서 13년동안의 기나긴 노예생활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패기와 열정만이 아닌 기다림의 시간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고, 그들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압살롬도 어떻게 보면 이 기회를 통해서 위대함으로 나아갈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을 참지 못했을때 그는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만 더 준 아들로 기억될뿐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정치를 보면서 우리가 답답한게 있지 않습니까!
썩어빠진 정치인 다 없어지고 언제 링컨 같은 대통령이 나오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미국식으로 16대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미국식으로 따지면 9번째 대통령입니다.
아직 성에 안차죠. 답답하죠.
우리나라 대통령들 마음에 안든다 해도 남미나 중동에 있는 대통령들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라는 책을 보면 미국 대통령도 답답한 대통령들 무지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얼마나 웃긴 대통령이 많았는지 시대 착오적 대통령이 수두룩 합니다. 
밴자민 해리슨이라는 대통령은 대통령이 사회성이 부족합니다.
말이 안되죠. 그런데 그런 대통령도 있더라구요.
프랭클린 피어슨이란 대통령은 외모 잘생긴 것 밖에 없었고 퇴임할 때 백악관 물건 훔치다가 들켰던 대통령도 있습니다.
쿨리지라는 대통령은 아무런 활동도 안하고, 말도 안하더니, 대통령으로서 해야할 일도 안하고 퇴임한 대통령도 있더라구요.
수준미달이죠.
미국도 이런 수준낮은 대통령이 너절하게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마흔 몇 명 중에서 골라 봐야 몇 명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도 희망이 있죠.

우리나라 민주주의적 대통령 노태우대통령 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진짜로 치면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부터였지 않았을까 생각도 되죠.
얼마든지 우리 나라도 국제적인 감각이 있는 대통령이 나올수 있습니다.
서서히 되는 것입니다.
한번에 되는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고비를 넘기고 나서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김영랑 시인이 기다리던 것처럼 기다림이 한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영적승리를 거두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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