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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품을 만드는 신앙인의 자세 (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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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을 만드는 신앙인의 자세
느헤미야4:1-6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명품을 좋아합니다. 돈이 있다면 루이비통, 페라가모, 샤넬, 버버리, 구찌 등과 같은 명품을 사려고 합니다. 명품을 찾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트랜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신발을 살 때 발에 맞는 신발을 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삽니다. 신문을 보니까 강남지역 청소년에게는 지갑, 시계, 구두 등 외제 명품 몇 개쯤은 기본이라고 합니다. 또래 친구들끼리 맘에 드는 명품을 사기 위해 '구찌계' '프라다계' 등 각종 계를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는 명품이 좋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카무라 우사기라는 여류작가가 쓴 책입니다. 명품 매니아입니다. 쇼핑의 여왕으로 일본에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줄줄 새는 샤넬 우산을 어깨에 메고 “호호호, 나 우산까지 샤넬을 써요!”하고 우쭐해진다고 합니다. 쇼핑 중독증에 걸려 주민세가 밀려 있고, 의료보험료가 체납되어 병원진료를 거부당하기도 하면서 1년에 2천만 엔 넘게 옷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카드 한도액이 넘으면 롤렉스, 카르티에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빌린 돈으로 다시 명품을 산다고 합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명품을 사들여 우쭐해진 기분을 맛보고 싶기 때문에 명품을 산다고 합니다. 명품족은 명품을 지님으로 '가진 자의 특권의식'을 갖습니다. 그것을 지님으로 신분 상승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남이 쓰지 못하는 것을 쓰고 있다는 일류의식을 갖습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명품으로 만들어 준 것으로 생각하는 심리가 마음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명품 몇 개를 가지고 있다고 인간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명품으로 만드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주어진 시간과 달란트로 우리만의 크고 작은 명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과 루터는 종교 개혁이라는 명품을 이 땅에 남겨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품을, 모세는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명품을, 솔로몬은 성전이라는 명품을, 바울은 유럽 복음화라는 명품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이라는 명품을 남겨 놓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는 전쟁으로 폐허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명품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어진 인생 속에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만든 산물을 명품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느헤미야가 갖은 방해를 극복하며 그의 명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하는데 모두가 박수만 쳐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항상 반대 세력은 있고 장애물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하면 경쟁 회사가 두고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잘 되고 건축하려고 하면 사단이 잘되는 모습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재건 운동에 대하여 처음부터 반대를 하고 방해를 한 산발랏이 계속적으로 느헤미야가 성벽 복원 사업을 감행하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인생 일대의 신앙적 명품을 만들려고 하는 느헤미야에게 두 가지 난관이 다가옵니다. 외적 장애물과 내적 장애물입니다.

첫 번째 난관은 외부적인 난관입니다. 외적 장애물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산발랏이 크게 분노합니다. 이미 그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발표하자 무모한 일이라고 조롱하였고 성벽 재건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역행위라고 위협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성벽을 재건하자 크게 분노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크게 분노했다는 것은 그만큼 감정적으로 크게 상한 것입니다. 유다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산하려 했던 자신의 의도가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분노는 입술이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느헤미야 사역을 비난합니다. 유다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그 비웃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자기 친형제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에서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힘도 없는 유다인들이 어떻게 성을 쌓겠냐는 것입니다. 불타 버린 돌을 흙무더기 속에서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다는 거냐?”고 빈정거립니다. 사실 유다 사람들은 성벽을 재건할 만한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수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방해자들은 현실은 냉철하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보지 못합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데 물매와 돌을 사용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른 막대기를 사용하여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큰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이 “지가 성공한다고 그 몸으로, 그 머리로, 그 실력으로 그 가정환경으로 성공을 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다.” “네 아들 딸이 유학을 간다고? 아니 의사가 된다고 아니 선교사가 된다고 아니 장군이 된다고? 네 자신을 알아라! 네 자신이나 잘 알아!”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시기하는 사람들이 “너희들이 교회를 짓는다고 그 능력으로 그 돈으로 그 신앙으로 어림도 없지”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 때 암몬 사람 도비야가 맛장구를 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설령 건축을 한다해도 하도 엉성하여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이 정도에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로만 하는 것 그것 신경 끄면 됩니다. 들어도 못들은 체 하고 무시해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전략이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조롱과 독설로 끝내지 않습니다. 집요하게 방해를 하지요. 대적들은 심리전으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방해와 위협을 더욱 거세게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반대 세력들이 많아집니다. 연합 전선을 구축합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돈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된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분노합니다. 사방에서 포위합니다. 그리고 연합하여 공개적으로 공격을 시도할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급속히 진전되는 것을 보고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공사를 방해하려고 합니다.
8절 보십시오. 다 함께 예루살렘을 치자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성을 치기로 함께 모의하여 유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겠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손상을 입혀 성벽 재건을 무산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남을 만한 명품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데 첫 번째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내적 장애물입니다. 이러한 적들의 음모를 들은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사기를 완전히 저하시키는 절망적인 노래가 퍼진 것입니다. 대적들의 책동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흙더미는 아직도 산더미 같은데, 나는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 힘으로는 이 성벽 다 쌓지 못하리. 원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쳐들어와서 우리를 죽여서, 일을 못하게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라는 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는 그 일을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경기도 심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위축되면 해야할 일은 크게 보이고 자신은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냐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 볼 때도 그랬습니다. 적들은 거인처럼 보이고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희망은 살아지고 소망은 꽁꽁 얼어붙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아 버립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힘이 쇠하였다고 했습니다. 기운이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낙심과 두려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낙심합니다. 적들이 자신들을 살육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간의 분열(12)이 생깁니다. 정작 일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면 성벽을 건축할 수 있겠습니까? 성벽 재건에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생 최대의 명작을 만들어야 할 느헤미야가 넘어가야할 두 번째 장애물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두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 넘어 그의 일생에 위대한 명작을 남겨 놓았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세 가지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집요하게 방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쟁자가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10번이나 말을 번복한 바로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전에 같이 회당에서 일했던 집요하게 쫓아다니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도 적들은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조롱하고 비난합니다. 이 때 낙심될 수 있습니다. 같이 조롱하고 비난하며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을 택하고 있는가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감정적인 문제의 해결 방법입니다. 명품을 만들려고 일하다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상할 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늘 감정부터 건드립니다. 아내가 건드립니다. 남편이 건드립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건드립니다. “넷까지 것이 뭐한다고?” 감정을 상하게 하면 일을 포기해 버립니다. 잘 하려고 하는 사람 조롱하고 비난하면 낙심해 버립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낙심하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욕하는 것 저들에게 돌려 달라고 합니다. 이방인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악을 덮어두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이니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못 본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보면 느헤미야의 신앙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장사가 없습니다. 내 속상한 감정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다 털어놓아 버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속상한 감정을 다 받아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시편의 기도를 보십시오. 어떤 기도는 민망할 정도의 저주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같은 인간의 한을 다 받아 주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고상한 것처럼 생각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는 억울한 것, 가슴 속 깊이 있는 응어리를 다 풀어도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한나처럼 술취한 여인같이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짓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의 문제가 먼저 풀립니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기도하고 나면 어느새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오히려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고 말씀합니다.

위기가 다가 오면 올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했던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먹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게셋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당시에 국무총리였습니다. 그 때 나라는 120도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이방인으로 출세한 사람입니다. 돈도 벌었습니다. 권력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권력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결점을 찾습니다. 다니엘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왕에게 고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자고 제안하고 그물을 쳐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이 위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니엘서 6장 10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조롱과 비난을 극복하고 명품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사자들의 입을 봉하였고 그의 몸은 손가락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위력입니다.

조롱받으면 조롱받을수록 비난받으면 비난받을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예측된 미래가 고통과 고난 아니 죽음이 다가 온다하여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조롱받고 있습니까? 비난받고 있습니까? 집요한 방해를 받고 있습니까? 현실의 어려움을 보며 답답하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86:7)"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5)"

그런데 기도했는데도 문제는 대적들의 방해가 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방해 계획을 세울 때 어떻게 합니까? 그냥 자신의 감정만 하나님께 아뢰고 끝납니까?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적들이 실제적으로 연합하여 예루살렘에 쳐들어오려고 합니다(7-8). 이 때 느헤미야는 어떻게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상시적인 위기를 대처할 방법을 강구합니다. 기도하고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게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하여 보초를 세우는 것입니다. 방해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심한 사람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워 함께 명품을 완성하느냐는 것입니다.
같이 일하여 성벽을 완성할 사람들이 적들의 조롱을 듣고 감정이 상해있습니다. 집요하게 방해하는 외적들의 침략 계획을 듣고 기운이 빠지고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특히 적들과 인접한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원조를 부탁했습니다. 공동체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음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넓고 낮은 곳에 백성들로 하여금 무기를 가지고 서게 한 후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싸우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비난하지 않습니다.

열정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단이 쓰는 무기가 낙심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사단이 악령과 함께 성도를 무찌르고 넘어지게 하는 무기 전시회를 열었답니다. 무기 밑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장 비싼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령들이 대장인 마귀에게 물었답니다. "왜 이 무기는 다른 것에 비해 크지도 않은데 이렇게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까?" 마귀가 대답했답니다. "이 무기는 백발백중 서서히 넘어지게 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지." 그 무기는 쉽게 구할 수 있고 도처에 널려 있는 낙심이라는 무기였다고 합니다. 명품을 만드는데 치명적인 방해 요소 중의 하나가 낙심입니다. "나 같은 것이, 이제 도무지 할 수 없어, 이제 끝이야, 교회에 나가서 기도해도 소용없어, 이 나이에 무엇을, 우리 가정은 어쩔 수없어, 우리 아이들은 , 우리 남편은, 우리 나라는, 우리 교회는 별수 없어" 낙심합니다. 한 사람이 낙심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낙심하면 자신의 가치를 평가 절하합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 절하합니다. 대부분 낙심은 세 가지에서 옵니다. 첫째 소유의 상실, 둘째 목표 달성의 장애물, 셋째 기대치에 못 미치는 대가로 인해 옵니다. 그러나 낙심을 극복하는 자들이 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가, 야곱도, 요셉도, 욥도, 바울도 낙심의 늪을 건너 명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낙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낙심한 자가 일어 설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어떤 경우에서도 일어나 명품 인생을 만들 수 있고 인생 일대의 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인신 매매를 당했습니다. 피를 나눈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요셉의 앞길을 방해했습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낙심하지 안았습니다. 다 떠난다 해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보디발에 집에 가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도 총리가 되어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여 그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창 39:23)"

바울이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려버렸고 그레스게도 디도도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후 4:17-1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정 위로해 주시는 세워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니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찬양)”
바울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8)"

낙심 사단이 사용하기 가장 편리하고 가장 흔하고 가장 치명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를 서서히 썩어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보이지 않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싹을 잘라버리는 도구입니다. 바울은 누가 비아냥 거리고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해도 낙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하여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주님이 닦아 주십니다. 이 땅에서 다 대가 받지 말고 닦아줄 눈물 가지고 가야합니다. 계7:17을 보세요.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계21: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셋째로 외적인 장애물과 내적 장애물이 겹쳐 어려움을 당할 때 명품을 만들고자 하는 당사자의 일에 대한 태도입니다.
적들이 노리는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느헤미야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역시 비웃음을 당하고 함께 일할 사람들이 낙심하고 자포자기하면 자신 역시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영광을 다 버리고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왔는데 태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방해 공작을 적들이 조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성을 건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반을 쌓았습니다.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루어 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니 적들이 연합하여 방해 공작을 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고 수비대를 세우고 건축합니다. 조직적인 반대에는 조직적인 대항 방법을 마련하여 극복합니다. 백성들을 무장을 시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한 손에는 삽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일하게 합니다. 귀인들과 민장들이 솔선 수범을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앞장서서 이 일을 감행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그들의 꾀를 폐하셨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시작한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루고자 하는 성벽 재건은 단순한 야망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예를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의한 비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인간적으로 권력, 부도, 명예도 어느 정도 이룬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이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외적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장애물이 있다고 그만 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쓴 공병호 박사는 명품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삶에 대한 각성을 하고 자신을 위한 투자하며 명품 인생을 위하여 도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룬 전문가들은 얼마동안 그 일을 했느냐보다 자신의 성과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정교하게 노력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교한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끈기와 반복, 집요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명품을 만든 사람들을 보면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위대한 것은 백련 천마(百練千磨)의 산물"입니다. 백 번 갈고 천 번 닦을 때 명품이 나옵니다. 영광은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옥이라도 갈고 닦아야 빛이 납니다. 명인(名人)이나 대가(大家)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미한 낙수라도 한 자리에 줄곧 떨어지면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고 사막이라도 깊이 파면 맑은 샘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천리 길도 발 밑의 한 발자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파우스트는 시인 괴테가 50년을 걸려서 쓴 생애의 명작입니다. 플라톤(Platon)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국가(Republic)’를 완성하기까지는 다른 여타의 서술 연구방법으로 아홉 번을 써 본 다음이었고, 키케로(Cicero)는 자신의 웅변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 30년 동안 매일같이 친구들 앞에서 말하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밀튼(Milton)은 ‘실락원(Paradise Cost)’을 쓰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고, 기본(Gibbon)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쓰기 위해 26년 간을 일했고, 브라언트(Bryant)는 그의 시가 발표되기 전에 99번이나 다시 써 보았다고 합니다. 노아 웹스터(Noah Webster)는 웹스터 사전을 만들기까지 36년의 세월을 연구에 몰두해야 했고 아이작 뉴톤(Isaac Newton)은 그의 작품을 위해 새벽 2시 전까지는 절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베토벤(Beethoven)은 청각 장애 등의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하나의 곡을 열두 번은 다시 썼다고 하며 미켈란젤로(Michaelangelo)는 ‘최후의 심판’을 8년 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성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는‘최후의 만찬’을 10년 간 그렸는데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하루 종일 먹는 것도 잊었다고 합니다. 거친 들에 고운 장미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가마 속의 콩도 삶아야 먹을 수 있습니다. 옥도 닦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합니다. 아몬드를 먹으려면 껍질을 까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날개를 쓰는 새를 만드셨습니다. 느헤미야의 일생 일대의 명품 예루살렘 성벽 재건도 우연히 되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난관을 극복하며 끈기와 반복, 집요함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천하 모든 것보다 가치있는 생명으로 우리를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시간을 통해 명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신앙으로 재건하고 무너지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재건하고 우리의 자녀, 교회, 민족을 믿음으로 재건하여 명품을 만드는 비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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