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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성장과 성숙으로 뻗어가는 교회 (엡 4: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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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성숙으로 뻗어가는 교회
(에베소서 4장 1절 - 6절, 14절 - 16절)

  51년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그것은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어찌 서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1955년 10월 2일, 방재항 목사님과 10여명의 교인이 바로 이 동산 위에 천막을 치고 첫 예배를 드린 이래로 51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성전에서 많은 교우들이 1부, 2부, 3부, 4부로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듯이,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쇠퇴하고 소멸되어 가지만 하나님은 영신교회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51년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 그것은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헌신과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몇 번의 교회 건축을 거치면서 많은 교우들이 내 물질을 드리고 옥합을 깨뜨리며 땀과 희생을 주님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그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 이 교회가 이 자리에 우뚝 설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51년의 역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산 역사였습니다. 어려운 고비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일꾼을 보내 주셨습니다. 또한 여건을 주장해 주셨고, 그리고 필요한 물질과 환경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지나고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 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미래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드리고자 했을 때,하나님은 그의 충심을 보시고 그의 손을 멈추게 하시고 수풀에 걸린 숫양으로 아들을 대신해 번제를 드리게 했습니다. 바로 그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산에서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영신교회의 아름다운 이름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1년 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돌리는 박수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성장과 성숙으로 뻗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4장 14절 이하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아멘.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는 것은 바로 성숙을 의미합니다. 16절의 "그 몸을 자라게 하며"는 성장을 의미합니다. 성장과 성숙은 마차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그

  우리 영신교회는 이제 성장과 성숙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기체요,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움직이며 변화하며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기에 생명이 있기에,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이란 무엇입니까? 몸집이 자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에는 반드시 성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건강한 성장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초등학교 학생이 몸집이 어른처럼 거대한데 그 아이의 정신연령이 초등학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반대로 어떤 아이의 정신연령은 대학생 수준인데 그 몸집은 유치원 학생수준이라면 그것도 비정상입니다. 성장에는 성숙이 동반되어야 하고, 성숙한 교회는 성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종종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집은 커졌는데 그만틈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인 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열심인데 세상에 나가서 성숙한 삶을 살아나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영신교회가 성장하는 교회임과 동시에 성숙한 교회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14절에 보니,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이기적입니다. 자기만 압니다. 유혹에 빠져 갑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이 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그렇다면 영신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가 될 때, 주님은 가장 기뻐하시고 그런 교회를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 가운데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자녀도 있고 아주 흡족하게 여기는 자녀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수 많은 교회가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꼭 합당한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향해서도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경 1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아멘.
  너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길 가의 풀 한 포기도 목적이 있어 존재합니다. 이 땅의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하나님이 목적이 왜 없었겠습니까?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하면서 릭 워렌 목사의 저서를 통해 교회의 목적을, 예배하는 교회, 교제하는 교회, 훈련하는 교회, 사역하는 교회, 전도하는 교회, 이 다섯가지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그 교회를 성장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목적에 맞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것은 바로 선교의 목적, 영혼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어부의 역할, 고기 잡은 어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영혼구원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목적 외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니 다른 마을로 가서 전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 택하신 목적, 교회가 존재하는 바로 그 이유는 선교와 전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에 나와 거듭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다시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영신교회에 더욱 놀라운 성장과 성숙의 기회를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교회가 성장과 성숙하려면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용납이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대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이고 흠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형제로, 내 자매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 집에 나중에 돌아옵니다. 그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내쫓지 않고 그를 용납하십니다. 달려가서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납입니다. 여러분들도 서로를 용납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장과 성숙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교회는 문턱이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다. 문턱이 있으면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누구든지 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노인은 안된다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워낙 계단이 워낙 많은 교회이다 보니 튼튼한 사람만 오지, 연약한 사람은 못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턱을 낮췄습니다. 교회는 바로, 부요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누구든 오실 수 있는 곳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거절이 없어야 합니다. 거부가 없어야 합니다. 용납이 있어야 합니다.

  2절 말씀을 읽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아멘.
  우리가 서로 용납하려면 내가 겸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교만에 빠져 나는 잘났다! 하면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죄인이고 저 사람도 죄인이니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말 하고 싶어도 참는 것이 온유입니다. 야생 말을 길들여 순한 말로 만드는 것이 온유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살면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부라고 하고 싶은 얘기 다 합니까? 할 얘기가 있고 못 할 얘기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좀 참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안 맞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안됩니다.

  예전에 어떤 바보같은 사람이 낚시를 하는데, 고기를 잡으면 자를 꺼내어 재더랍니다. 그리곤 고개를 갸우뚱 하며 다시 물에 던져버립니다. 이상하다 싶어 옆에서 물었더니, "우리리 집 후라이팬은 30cm 넘는 고기는 요리할 수가 없으니 ..."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자기 기준에 빠져서 좋은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온유입니다. 참아주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께 부탁합시다. “내가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좀 참아주세요~!” 이것을 참지 못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왜 좀 기다려주면 될텐데,,, 참아주면 변할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저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부족함을 내가 덮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보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의인이고 방주를 120년동안 만든 훌륭한 분이지만, 그 분이 홍수가 끝나고 나니 긴장이 풀렸습니다.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포도 농사를 짓고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어 그만 취해버렸습니다. 취한 것 까진 좋은데 더우니 벌거벗고 누웠습니다. 그것을 보니 둘째 아들 함은 동네 방네에 다니며 소문을 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과 막내아들 셈과 야벳은 우리가 어찌 아버지의 하체를 볼 수 있느냐 해서 뒷걸음질 치고 이불로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감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으면 그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좀 다른 것이 있으면 못 참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 교회는 조용하게 예배를 드리는 편이라고 합니다. 그 분이 어느 날 다른 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설교도 시작하기 전에 주여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랍니다. 도저히 설교를 못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설교를 시작하니 그 교회의 교인들이 얼마나 설교를 진지하게 듣는지, 말 끝마다 아멘! 아멘! 하며 말씀을 먹기를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이 그동안 자신의 생각을 회개했답니다. 그동안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평가했구나 싶고, 통성기도나 주여삼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느냐가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답니다.
  설교를 하다보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말씀이 닫자 마자 바로 튀어 나오는게 다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다른 건 다를 뿐이지 틀린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의 방식과 자세가 다를 수는 있지만,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 똑같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다른 것을 용납하는 것이 용납니다.

  부부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바바리 월터라는 유명한 여성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남편은 유명한 컴퓨터 전문가 입니다. 이 부부가 서로 유명하고 성공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집에와서도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정도가 심해 늘 논쟁하고 충돌하곤 했답니다. 그러다 둘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자기에게 맞는 이상적인 여인을 다시 찾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원하는 여성상을 쭉 쓰고 컴퓨터에 입력했습니다. 그 조건에 합당한 여성 후보 20명의 리스트가 올라왔습니다. 1등이 누군가 싶어 보았더니, 이혼한 전부인이더랍니다. 부부란 그런 것입니다. 가장 잘 맞지만, 가장 잘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왜 입니까? 용납이란 이해하지 않으면, 인내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면 수용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명절을 맞이해서 곧 가족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가족들끼리도 서로 마음을 닫고 대화를 안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서로 용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부부는 오랫동안 아이를 낳고 살았답니다. 무려 아이가 11명이나 되었답니다. 그러고도 뭔가 심기가 불편해서 이혼하기로 합의하곤, 그동안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반씩 다 나누기로 했습니다. 다른 재산이나 물건은 다 반씩 정확하게 나누었는데 아이 11명을 나눌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랍비한테 가서 물었습니다. 랍비가 한참 생각 후에 대답하기를, 하나 더 낳아서 12명을 만들어 6명씩 나누라고 하더랍니다. 수긍이 되어 돌아온 둘은 이혼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쌍둥이를 낳아서 13명이 되어버렸답니다. 이것도 하나님 뜻인가보다 싶어 서로 노력하며 살았더니 이전보다 더 좋은 부부의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 살면 더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었을텐데 그냥 포기하고 이혼하는 바랍에 그 행복을 도둑맞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납의 모습입니다. 서로를 용납하려면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가 많이 배우지 못해도 인정하고 존중해야지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면 용납이 안됩니다. 가끔 어떤 부인들을 보면 남편들에게 함부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신 주제에 뭘 안다고... 텔레비전에 뭐가 나와서 한 마디하면 당신이 뭘 안다고 하며... 남편의 기를 죽이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한 부인이 있었는데 이 부인도 남편에게 늘 "뭘 안다고..."를 연발하며 남편의 기를 죽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차를 몰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서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달려가보니 의사의 진단은 이미 남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너무 구박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남편 없는 과부가 되는 것이 너무 서러워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남편이 흰 천을 걷고 슬 일어나더니 "보, 나 살았어. 여보 나 안 죽었어!"하더랍니다. 그 때 부인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의사가 죽었다잖아!!!"

  존경하지 않으면 용납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을 용납하려면 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납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절 말씀을 읽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아멘.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합니다. 바로 평안해야 합니다. 가정에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영락교회를 섬기시던 한경직 목사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부흥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싸우는 것은 마귀가 틈 타는 것입니다. 교회는 평안할 때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될 때 성장과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보니, 초대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몸도 하나요 성경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한 지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머리 안에서 지체입니다.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가 될 때 성장과 성숙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하나가 되려면 뭔가 조건이 필요합니다. 기차 여행을 할 때 보면, 누가 옆에 타도 말을 잘 안 겁니다. 어쩌다 얘기를 하게 되면 첫 질문이 "고향이 어디십니까?"입니다. 강원도 평창이라고 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마음이 50%는 열립니다. 오죽 했으면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 다음이 어디 대학을 나오셨습니까? 다음에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 어디 나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30%는 마음이 열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옆에 계신 분께 묻겠습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다!"그러면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백성이니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분열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갈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그것 하나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다 잘하지만 못하는게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제일 많이 사는 로스엔젤레스의 L.A타임지에서 "한국인들의 네가지 열심"에 대한 기사를 실었답니다.
  첫째는, 한국은 경제에 열심이다. 즉 돈 버는데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던 사람도 미국에서 돈 벌려고 세탁소다, 슈퍼다 안 하는게 없고, 한국 인의 돈 버는 열심은 유태인을 능가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디 가도 땅 사고 집사는 것은 한국인이랍니다.
  두번째, 한국인의 열심은 교육에 있답니다. 이사도 불사하고 좋은 학교에만 보낼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그 열심은 국내에서나 외국에서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대학의 수석 졸업자들 중 한국인이 많습니다.
  세번째 한국인이 잘 하는 것은, 중국인은 어딜 가면 음식점을 세우고, 일본인은 회사를 세우는데 한국인은 교회를 세운답니다. 열 사람만 모이면 교회를 세운답니다.
  마지막이 문제인데, 한국인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 열심히 있답니다. 3명이 모이면 2:1로 갈라지고 5명이 모이면 3:2로 갈라지고, 10명이 모이면 5:5로 갈라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남이 잘 되면 꼭 끄집어 내리는 것이 한국인의 특성이랍니다. 같은 한국인이 좀 잘되려고 하면 비방하고 질투와 시기가 많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프다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타임지에서 마지막으로 꼬집는 것이, 한국인은 절대 미국인과 싸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때문에 신경 쓸게 없다는 결론이었답니다. 우리 민족처럼 뛰어난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고, 얼마나 예민하고 지혜로운 민족인지 모르는데 문제는 하나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되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보니, 교회에서 계 모임 하는 분들이 나누어지더라구요. 이 쪽 계는 따로 모이고, 저 쪽 계도 만들어서 각자 제주도, 거제도로 다니다보면 이것이 파벌이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계원들은 계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 제가 계주할테니까 저한테 부으십시오. 우리가 주님 따라 가야지 계주 따라 가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늘 교인들에게 상처가 되고 문제가 되더라구요.
  교회가 하나 될 때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삼겹줄은 모이면 강한 것입니다. 평안의 줄로 하나되는 교회에 바로 성장과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51년동안 영신교회를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름에 합당한 교회로, 서로를 용납하는 교회로, 성령안에 하나되는 교회가 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푯대를 향해서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우리 영신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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