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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은 대로 되는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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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은 대로 되는 믿음
마태복음 8:5 ~ 13

어느 마을에서 어떤 형제가 배를 훔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분노한 주민들이 형제들의 목을 매 달아 죽이려 합니다.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걱정하던 마을 촌장이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비록 저들이 악인일지라도 우리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을 순 없다. 대신 도둑질을 했다는 표시를 새겨 놓으면 평생 어딜 가도 죄책감을 가지고 편히 살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합시다.”사람들은 촌장의 말대로 형제의 이마에 커다랗게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저기 배 도둑 지나간다.”하고 놀려댔습니다. 견디다 못한 형은 밤을 틈타 마을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마에 새긴 글자에 대해 묻는 사람들 때문에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결국 형은 좌절감에 빠져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스스로 비참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나 동생은“어디로 간들 내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 남아 죄과를 달게 치르리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마을에 남기로 마음먹고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이 내뱉는 온갖 비난을 묵묵히 견뎠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동생에 대한 비난은 점차 줄어들었고 묵묵히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오히려 칭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우연히 그 마을을 지나다가 한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글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나그네는 길을 가던 마을 사람에게 그 노인의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을 사람의 대답이“글쎄요...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잘은 모르지만 저 분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 분처럼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아마 저 이마에 새겨진 글씨ST는<성자(Saint)>의 약자임이 틀림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살았지만 그의 삶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의인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비록 과거에 지은 죄가 있지만 이제는 다 끊어 버리고 성실한 삶의 모습으로 결국에는 칭찬을 받는 삶이라면 그를 훌륭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 중에 무엇으로 칭찬 받을 수 있습니까?
혹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미모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이상하게도 연세 드신 할머니들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 동네 총각들 마음 설레게 안했던 분들이 없습니다.“처녀 때는 나도 꽤 괜찮았다. 동네 총각들이 줄 섰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이 많습니다. 이걸 보면 평균적으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거울을 많이 보는데 그 이유가 여자 분들은 거울을 보면서‘이 정도면 꽤 예쁘다’고 생각들 하시나 봅니다. 착각은 자유라고는 합니다만 예쁜 것도 좋고, 또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미모도 한순간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줄곧 칭찬 받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가 하면 옛날에 공부 잘한 것 가지고 자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른들치고 자기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 공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부모들은“나는 너만 할 때 1등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럼 꼴찌는 누가 했다는 건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하여간 자기 자식들에게 하는 말 들어보면 전부 공부 잘했고 그 중에 절반 이상은 1등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배운 지식과 똑똑함도 세월이 지나서 지금 자기 자녀들에게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부모님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혹시 돈을 잘 벌고, 돈을 많이 가지셨습니까? 그러나 그 가진 것을 영원히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에 칭찬을 받아야 될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다면 무엇으로 칭찬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실 것 같습니다.“너 왜 그러니? 내가 너 때문에 마음이 아프구나. 참 답답하다.”하신다면 우리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해 봐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밖에 없습니다. 특히 믿음에서 입니다. 믿는다고는 하는데 시시때때로 나를 돌아다보면 그 믿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믿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다는 건지, 주님께서 얼마나 인정 해 줄 수 있는 믿음인지 캄캄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깊이 생각해 보고 분석도 해보고, 잘 가고 있는 믿음인지 잘못 가고 있는 믿음인지를 수시로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토마스 그룸]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육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신앙을 세단계로 말합니다. 먼저는<인지적 차원에서의 신앙(Faith as believing)>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믿는 대상을 내가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추어주시는 빛 안에서 또 인격과 인격의 만남 속에서 깨달음이 점점 커집니다. 좀더 깨닫고 좀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다고 하는 입장에서 좀더 확실하게 사랑을 알게 되고 능력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게 됩니다. 깨달아는 지는데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깨달아 나가면서 그것이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신뢰적 차원에서의 신앙(Faith as trusting)>입니다. 깨달아 졌으면 이제는 말 그대로 믿어집니다. 신뢰가 갑니다. 이제 더 아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깨달음만으로도 믿음이 가면서 평안합니다. 처음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가 자기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게 될 때 이제는 다 몰라도 좋습니다. 다 알 수도 없고요. 아니 아무 것도 몰라도 좋습니다. 다만 그 마음에는‘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합니다. 그 사랑 안에 나는 평안합니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요? 더 깨닫지 않아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뢰적 차원에서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행동으로 나타납니다(Faith as Doing)>. 두 번째 단계인 <신뢰적 차원에서의 신앙(Faith as trusting)>이 정서적인 차원이라면 이 세 번째<행동의 신앙(Faith as Doing)>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믿어지니까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에 찬 행동이 나의 삶에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피곤하고 지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신뢰를 잃어버릴 때 그렇습니다. 믿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반대로 믿음이 가집니다. 믿음이 생길 때 걱정이 없습니다. 믿음이 생기니까 용기도 창의력도 발동합니다. 그래서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그 만남의 관계에서 신뢰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만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걸 찾아야합니다. 그것을 회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믿은 대로 소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믿은 대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절대적인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 앞에 공표하시기를“이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굉장한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며, 믿음의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더 중요한 사실은 오늘 이 백부장 자신이 아파서 예수님께 간청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 종이 아픈 것입니다. 당시의 노예나 종의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을 이 사람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품 적으로 판단하자면 참으로 어진 성품을 가졌다고 할 만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을 합니다.“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그런데요,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곧 바로 대답하십니다.“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이게 흔한 일이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와서 간청했습니다.“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이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이에 비하면 오늘 백부장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차별하시는 것같이 오해가 됩니다. 하지만 왜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요청에 단번에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칭찬까지 하셨을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먼저는 이 백부장에게 있었던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예수님께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마음을 보고 예수님도 놀라셨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신분적 차이나, 주종의 관계에 개의치 않은 백부장의 하인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놓았더니 예수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참 사랑의 마음은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킵니다.
또 하나 남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배려할 줄 아는 믿음이 그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감동하셔서 친히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뭐라고 합니까?“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하면서 극구 사양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대인인 예수께서 이방인인 백부장의 집에 들어가셨다면 틀림없이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것이 말거리가 되어서 예수님의 입장이 곤란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처할 예수님을 위해서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씀씀이 입니다.
그리고 이 백부장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정말 놀라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가셔서 고쳐 주신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말씀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보면 이 사람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꼭 주님이 손으로 만지셔야한다면 데려오지 왜 굳이 주님을 모셔가겠냐는 것입니다.

9절에 보니까 자기의 힘만으로 안 되면 수하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동원해서라도 데려올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의미 속에는“당신은 말씀 하나로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이게 백부장의 결정적인 믿음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칭찬받을만한 놀라운 믿음의 실체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던 부분입니다만 들어보고 순종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것으로 해결입니다.”그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보세요, 예수님도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응답이 무엇이라 하십니까?“가라, 네 하인이 나았느니라.”해야 옳습니다만 주님의 대답은 다릅니다.“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이 사람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반쯤 믿는 정도의 믿음이었다면 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만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100%믿으면 100%은혜가 될 것이요, 50%믿으면 50%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 지어다.”위대한 믿음, 큰 믿음으로 주님께 로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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