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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란 무엇인가? (수 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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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점의 차이- 알렉산더 vs 디오게네스

  알렉산더 대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손에 넣었던 그리스의 정복자였습니다. 반면,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디오게네스는 평생 옷 한 벌을 가지고 나무 통 속에 살았을 만큼 욕망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을 때, 디오게네스는 강 가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게 보여서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정복자 알렉산더가 아니라 옷 한 벌로 세상을 살아가는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신에게 부탁할 생각이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비웃듯이 말했습니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저처럼 발가벗고 일광욕을 하시면 될 거 아닙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지라 알렉산더는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렸습니다.
“나, 나도 지금 당장 당신처럼 일광욕을 하고 싶지만,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내 일이오.”
“세계를 정복해야만 일광욕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지금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왜 꼭 세계를 정복한 다음에 하려고 하십니까?”

관점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알렉산더는 일의 성취의 관점에서 세상을 봅니다. 그러니 세상은 할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광욕을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삶 그 자체를 즐깁니다. 얼마나 많이 성취하였느냐,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는 것은 그의 삶의 행복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가난한 디오게네스가 세상을 호령하는 알렉산더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입니다.

2.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이다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가정과 국가, 세계의 역사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역사철학자인 E. H. Carr가 1964년에 쓴 <역사란 무엇인가> 란 책이 있습니다. 카(Carr)는 “역사란 역사가의 해석” 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여,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사실을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각자 가진 가치와 관념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사건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3. 여호수아의 역사해석- 하나님의 구원사

  여호수아는 이제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고자 합니다. 시대적으로,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소수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비와 바람을 다스리는 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자녀를 제물로 바쳐서 신의 마음을 달래는 몰렉신도 섬겼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동네 곳곳에 가나안 사람들이 섬겨오던 우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바알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풍작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10여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신앙이 느슨해졌을 것입니다. 오래 믿다보면, 타성에 젖기도 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려니 가나안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풍작을 얻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처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바알신을 섬기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새롭게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세겜에 모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언약을 체결하기 앞서, 먼저 지난 과거를 돌아봅니다. 본문 1-13절까지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의 역사관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메소포타미아강 건너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를 주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며 고통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일곱 족속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여주셨습니다.l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들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축하지 않은 성읍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보는 여호수아의 관점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끌어내어, 인도하여, 주었다.”  “내가 보내었고, 재앙을 내렸고, 붙였다.” “내가 축복하였고, 건져내었고, 쫓아내었고, 주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하였습니다.

4.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편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 “아내가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어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태풍이 와서 올해 농사 망했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우리가 고생한다.”
물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오늘 내가 이렇게 고생하게 된 데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역사 해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라면, 자신의 과거를 누구 탓으로 돌리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의 과거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잘 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고, 실패하고 잘 안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 계셔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의 지나온 과거의 아픔과 눈물,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장로교 시조인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시고 역사를 마무리하시는 분이십니다.

5.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함석헌 선생님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 선생님은 씨 즉 민중의 고통은 곧 십자가의 고난이며 이런 고난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앞으로 세계를 구원할 민족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의 예언처럼,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난 날 겪었던 고난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13년간 고생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시기한 형들 때문에 죽을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 때문에 고생했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 앞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괜히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통하여, 직장 동료들을 통하여, 대통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고생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5천년 고난의 역사를 걸어온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연 법칙’ 의 지배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신의 부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신의 법칙’ 밑에서 살고 있다.”
자연의 법칙은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성공하고, 게으르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일하여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난에로 부르신 것입니다. 가난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내 자녀도 역시 열심히 신앙생활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습니다. 자녀를 통하여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대기만성이라고, 사도 바울처럼, 어거스틴처럼 늦게 주님께 돌아와 거룩한 주님의 사역자로 크게 쓰임받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6. 어떻게 살 것인가?-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4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성실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생하여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직장에서 말 못할 어려움을 겪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갖고 떳떳이 살아갑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악조건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합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8세기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에게는 매우 교만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교만한 공주가 실수로 반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시녀들을 시켜서 반지를 찾게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공주는 공연히 하녀들에게 화를 내며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하녀가 슬며시 공주의 오만함을 꾸짖었습니다.
“공주님, 그렇게 화내시면 아니 되옵니다.”
“뭐야? 시녀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나는 왕의 딸이란 말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역사를 영어로 History 하고 합니다. His Story를 합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사건을 모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 입니다.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우리들에 의해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슬픔과 기쁨, 고난과 영광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로 짜여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서 있는 여러분,
성실과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사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승리하십시오.
(조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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