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은 당신의 “주”이십니까? (눅 17:7~10)

  • 잡초 잡초
  • 278
  • 0

첨부 1


1. 의미 없이 사용하는 “주”라는 말

성경의 용어 중에는 그 개념이 시대와 사회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의 “주”라는 말입니다. 이 주라는 말만큼 신자들이 정말 자주 쓰는 용어도 드물 겁니다. 하루 동안에도 수십 번 이상 이 말을 쓰며, 기도와 찬송과 개인 묵상에서도 빠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할 때, 성경 본래의 의미, 성경시대에 그 말을 할 때에 가지고 있었던 의미 그대로 사용하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 “주”라는 말의 의미와 함께 또 그 상대어가 되는 “종”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고 할 때 …

대부분의 방언과 언어에는 “주”라는 말이 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페인어에는 “주”를 의미하는 ‘세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의 ‘미스터’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데요, ‘세뇰 돈키호테’, ‘세뇰 산초’ 등 주로 남자의 이름 앞에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아무개 씨’를 말하는 ‘미스터’와 구별하여 ‘주(lord)’라는 말을 쓰지만, ‘lord'의 원래 의미와 상관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영어의 ‘씨’라는 호칭을 ‘선생’ 혹은 ‘선생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역시 다른 언어권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존경의 의미 없이 통상적인 호칭일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교회 안에서, 혹은 성도들이 사용하는 이 주라는 호칭도 사실 별 의미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 기도하는 분의 기도를 들으면서 공감이 되고 그 표현에 은혜가 되면 다들 “주여”를 연발합니다. 어떤 분은 한숨을 쉴 때도 “주여”합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서 ‘답할 사람 손들어라’ 하니까, “저요” 대신에 “주여”라고 하더라구요. “주여”라는 말이 너무나 입에 익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라는 말은 이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이 “주”라는 말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최고의 권세자요 만인지상인 로마 황제에게만 쓰던 용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백성과 신하들과 제국 내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살아있는 신이자 신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만 “주”라는 호칭이 주어졌습니다. 로마 시민들, 공무원, 군인들은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가이사 만이 우리 주님입니다.” “옳습니다. 가이사 만이 우리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이 “주”라는 호칭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호칭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주”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더 이상 로마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이사가 주님이시요”라는 인사를 해오면, 신자들은 “옳습니다. 가이사 만이 우리의 주님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닙니다. 주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도 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아도나이”, 즉 “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서 “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내게 너무 벅차고,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내게는 너무나 과분하여 저는 단지 당신을 주라고 부를 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황제보다 더 높고 크신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황제 외에는 주라 부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주라 부른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감히 신의 아들이요 신의 대리자인 황제 외에 누구에게 주라는 명칭을 붙이느냐?” 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황제를 거부하는 것, 황제에 대한 불복종이자 국가 반역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죄인으로 붙잡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인간에 불과한 로마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절하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 만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한 마디를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라는 호칭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함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라는 호칭을 함부로 사용하는 이유는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들의 삶과 신앙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의 평안, 우리의 헌신, 우리의 감사, 우리의 기도’ 등이지 예수님이 주체가 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또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기도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의사가 되셔야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갑부가 되셔야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상담자가 되셔야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찬양이나 기도에서 “나”라는 말이나 “우리”라는 말을 한번 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한 주인은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아니라 우리의 “종”일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들어있는 힘센 요정과도 같은 존재로 여기는 지도 모르지요. 초대 교회 성도들이 황제에게만 붙이던 이 호칭을 예수님에게만 쓰면서 이것 때문에 죽어갔는데도, 우리는 반대로 “주”라고 부르지만 우리를 위해서 일해주고, 우리의 뒤치다꺼리나 해주고, 심지어 우리 대신 희생하여 주기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사 자기 피로 사신 신광 가족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 명칭에 맞는 대우를 해드리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의 “종”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종입니다. 말이 종이지, 성경의 용어는 “노예”입니다. 지금이야 민주화되어 노사가 서로 협약하여 문제를 함께 풀어 가는 시대지만 예수님 당시에 노예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들은 동물처럼 시장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었고 사고 팔리는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가격표를 목에 걸고서 말입니다. 튼튼하고 젊은 노예는 비쌌으며, 나이 많고 병든 노예는 헐값에 내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노예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죽이거나 스스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종으로 팔린 노예들은 귀를 뚫어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이름표를 귀에 달아야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개념도 없었으니 꿈도 못 꾸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주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요한이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주인의 이름을 따서 ‘벤허의 노예’ ‘옥타비아누스의 튼튼이’ 정도의 이름만 붙었을 뿐입니다. 주인이 ‘몇 시에 일어나라’하면 그 전에 일어나야 하고, 시키지 않아도 일을 찾아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그리고 일년사시사철 쉴 틈 없이 일한다고 해도 주인이 월급을 주거나 사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이러한 노예의 생활을 단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밭을 갈거나 소나 양을 돌보는 일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 노예들은 일터로 나가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주인이 그들에게 “수고 했구나. 빨리 와서 밥부터 먹으라”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야, 배고프니까 빨리 식사 준비해!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곁에서 잘 챙기고 살펴봐. 그리고 내가 다 먹거든 그때 먹고, 잘 치운 후에 정리 잘하고 쉬도록 해. 아, 그리고 내일 할 일 준비도 해 놔라!”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자신의 노예가 자신이 명한 것을 잘 행했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저희는 무익한 종입니다.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도리를 행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노예에게 지극히 당연한 생활이었습니다. ‘전국 노예협의회’라도 있어서 착취니, 부당한 처사니, 노동 시간을 단축시켜달라느니, 임금을 조금만이라도 좀 올려달라느니, ….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한 번 노예는 죽을 때까지 노예였습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그들이 불렀던 흑인영가의 대부분에서 “천국”을 그리는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죽어야만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왜 스스로를 “예수님의 노예”라고 불렀을까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지금 제가 드리는 이 질문을 만약 그들이 들었다면 이 질문처럼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위하여 하늘의 영광 버리셨을 뿐 아니라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주인이라고 부르고 자신이 그 노예가 되는 지극히 당연하고 오히려 영광 중의 영광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아직 흑인 노예가 팔고 팔리던 시절, 한 흑인 소녀가 팔리기 위해 수레 위에 올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서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다 팔렸는데 이 소녀만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삐쩍 말랐는데다가 병마저 들어 사갔다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날이 어두워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팔리지 못한 대신에 노예 상인의 성적 노리개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한 백인 신사가 다가와서는 소녀를 사주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노예상인에게 돈을 지불한 백인 신사는 흑인 소녀에게 다가와서는 “이제 너는 자유야. 내가 너를 샀지만 나는 너를 종으로 사지는 않았어. 그러니 네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소녀는 멍해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사가 저 멀리 갔을 때에야 비로소 소녀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거저 마음 착한 백인에게 팔려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그였습니다만, 자유라니 그것은 차라리 꿈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소녀는 신사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사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는 당신의 노예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원래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 사탄의 노예, 세상의 종으로 살다가, 장차 저주와 심판으로 가게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에 매여 사탄의 노예가 되어 사탄의 노릿개감에 불과하던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리시고 낮아지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어마어마한 값을 치르시고 사탄의 수중에 있던 우리를 사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을 얼마나 천만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꺼이 자신을 예수님의 “노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1902-1973)은 백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노래를 잘하여 영광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3개국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아이젠하워, 캐네디 대통령 취임 시에 국가를 독창했고, 1958년에는 유엔 대표로 지명 받았으며, 19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자유상패>를 받았습니다. 그가 40년간의 성악 활동을 끝마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으므로 유명해진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름이 없으며, 자유나 권리도 없습니다. 노예가 무엇을 내세울게 있습니까?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것을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자기 생각을 말한다든지, 자기 변명을 한다든지, 대가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노예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라”고 하면 할뿐입니다. 노예의 기쁨은 주인이 만족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예의 월급이고 대가입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종, 즉 섬기는 이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 되신 예수님을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과 자세로 성도와 이웃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섬기는 삶을 산 후, 상 받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종의 행복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와 “내가 누군가?”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예수님과 관계하여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입니까? 예,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이십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주님의 종으로 살아온 지난 날들이 행복하셨나요?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시고,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종이라면, 그 주님 앞에서, 교회에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름, 출신, 학벌, 직업 등, 그 모든 것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주 예수님과 그의 복음만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여기며, 주님만을 섬기고 높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나의 주”라는 고백 한 마디 때문에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 때문에 죽는 것마저 행복으로 여겼던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즐겁게 자신을 예수님의 노예로 드려 충성하고 봉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의 종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삶의 보람이자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천국에서 최고로 높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